영혼을 시들게 하는 자가 있다.중년 지식인 지주 아이딘은 자기중심과 교만의 벽에 둘러싸여 사랑하는 이들과 자신의 영혼을 무력한 ‘겨울잠’에 빠져 들게 한다.젊고 아름다운 아내 니할, 그리고 여동생 네즐라는 ‘양심, 도덕, 이상과 원칙’을 말하지만 정작 ‘이기적이고 심술궂고 냉소적인’ 그리고 세입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아이딘으로 인해 압박과 굴욕을 당하고 있다. 아이딘은 이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조차 마비 상태인 것에 의심과 회의를 하지 않는다. 부패한 그의 영혼은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 대립과 심리적 대립아이딘의 위선적인 삶의 가치관은 사회적 대립과 심리적 대립을 통해 노출된다. 아이딘은 지식인과 지주라는 병존하기 힘든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무계급성인 반면, 지주는 계급성이어서 상호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지주라는 신분을 통해 사회적 대립을, 그리고 지식인의 신분을 통해 심리적 대립을 부각시키고 있다.△사회적 대립우선 사회적 대립으로 지주와 세입자간의 계층대립이 영화의 전반부에 도출된다. 특히 아이딘 뿐만 아니라 아내 니할도 지주계층의 위선에 한 몫 거든다.감독은 계층 대
The instinct of the coffee is temptation커피의 본능은 유혹Strong aroma is sweeter than wine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다Soft taste is more rapturous than kiss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Black as the devil악마처럼 검고Pure as an devil천사처럼 순수하고Sweet as love사랑처럼 달콤하다.--커피예찬 (Admiration of coffee) 탈레랑키스보다 더 황홀하다는 이 커피는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커피 없인 못 살 정도로, 커피가 밥의 자리를 꿰 찰 정도이다.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정설이 되었다. 그런데 이 커피가 어떻게 세상에 널리 보급되었을까?에디오피아에서의 커피는 좁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에 전해졌다. 6세기에 에디오피아가 예멘을 침략하여 이곳을 지배하면서 커피가 전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커피는 처음에 아라비아의 수피교(이슬람신비주의) 수도승들이 졸지 않고 밤새워 기도하기 위해 커피체리로 만든 차 ‘키쉬르’를 마셨다. 이 키쉬르를 아라비아인들은 ‘카와’(Qahwah)라 불렀다. 커피의 어원은 이
차이나 타운의 얼개는 어쩌면 낡은 작법으로 느껴 질 수도 있다.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져 이름이 일영이 된 그녀는 자신을 키워 준 조직의 엄마를 배신하고 엄마와 맞선다. 이런 전개만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고만고만한 범죄영화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게다가 엄마와 일영의 대결이라는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로 진입하게 된 배경이 단지 일영이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에 흔들렸기 때문이라는 설정은 매끈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이러한 다소 거친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미묘한 에너지가 솟구친다. 엄마(김혜수)와 일영(김고은)이 내뿜는 날카로운 카리스마만으로, 이 영화의 야심참을 설명할 수 없다.◆ 엄마의 法“이렇게 까지 해야 됩니까? 그래도 식군데.”엄마의 심복인 우곤은 일영에 대한 엄마의 냉혹한 처사에 이렇게 묻는다. 혈육이나 다름없는 딸을 해치려하는 엄마의 생존의 방식을 우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여 유지되는 색은 처절한 핏빛이지만, 실제로 영화 전체를 감싸는 색감은 엄마의 색깔인 녹색이다. 오히려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녹색이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의 선홍색을 압도한다.이곳은 도덕 원칙과 사사로운 감정을 실현하는 장이 아니다. 이
한 남자의 숨가쁜 호흡이 거칠게 들려온다. 잠시 후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가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이 남자, 난방유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히스패닉계 아벨은 자신의 직원인 줄리앙에게 말한다. “앞을 보란 말이야.” (Look forward.)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렇게 마무리된다.그에겐 뒤를 돌아보는 것은 죄악이다. 오로지 앞을 향해 달리며 끝없이 성장하는 것, 그래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삶의 가치이기 때문이다.그는 계약금으로 자신의 전 재산 100만 달러를 부두의 부지 매입 한 곳에 올인한다. 게다가 잔금 150만 달러는 한 달 후 청산해야한다. 은행 대출도 여의치 않다. 그에겐 포트폴리오란 개념이 없다.아벨은 자신의 부의 총액을 넘는 빚을 지면서까지 투자하는 무모함을 보인다. 그는 부를 가지면 가질수록 부의 만족도는 서서히 하강한다는 위험회피의 보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부가 늘면 늘수록 그의 만족도의 기울기는 더욱 상승한다는 ‘폭력적인 욕망’에 그는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그의 폭력적인 욕망에 그의 고문변호사는 아벨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간절히 원하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가욕망과
9살 서호와 7살 지호 남매는 안산의 4호선 상록수역에서 이수, 고속버스터미널, 광화문을 거쳐 서대문구의 3호선 홍제역까지 아빠를 찾아 무박이일의 도보여행을 떠난다.홍제역으로 가는 길에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또래 깡패가 남매의 여행을 여기저기서 훼방 놓는다. 남매는 심지어 인신 매매범에 끌려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하지만 자신의 가족처럼 아이들에게 따뜻한 떡국 한 그릇을 내어놓는 구멍가게 할머니, 아이들의 버팀목인 거리의 악사, 자신의 가족처럼 남매의 행방을 찾아 헤매는 사회복지사, 그리고 아빠의 고충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경찰등은 아이들에게 어떠한 대가없이 도움을 제공하는 든든한 벗이며 가족이다.남매는 여러 험한 사건들과 맞닥뜨리면서, 세상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적지 않은 손길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어느새 우리는 서호와 지호가 된다. 4호선 상록수역에서 3호선 홍제역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서호와 지호이다.앞길이 안개에 쌓여있거나, 세상이 악과 부조리로 가득 찬 듯하여, 앞을 향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공포에 가위눌릴 수 있다. 하지만, 세상 한켠에는 따뜻한 손길 또한 적지 않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위로
신들린 듯한 드럼 소리가 이야기를 한다.한을 말하고 분노를 토한다. 이 소리는 억눌림에 대한 저항이다. 또한 뜨거운 열망을 고백한다. 이는 꿈꾸는 완성에 대한 갈망이다.드럼 스틱이 춤을 춘다. 부드럽게 감아 돌다, 어느새 폭발하며 절정을 향해 솟구친다. 드러머에 다가가는 이가 있다. 그는 손으로 경쾌하게 이 드럼 소리에 장단을 맞춘다. 그가 드럼의 리듬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리듬에 몸을 싣고, 흥겨이 장단을 맞춘 것이다.이제 이 드럼의 리듬과 선율은 ‘좋은 것’(good job)에서 위대한 것(great) 으로의 도약을 당당히 선포한다.◆ 배경이 전경이 되는 역전음악대학 신입생 앤드류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길 꿈꾼다. 우연한 만남으로 플랫처교수의 재즈 밴드에 들어간 앤드류는 플랫처의 폭언과 인신공격의 담금질속에 위대함을 향해 질주한다.영화의 구성 요소 중, 주역은 스토리와 플롯이다. 감동에 재미가 뿌려진 스토리와 메시지를 통해 관객들은 삶의 교훈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이 스토리를 위해, 배우의 연기· 음향· 음악등이 존재한다. 이들 모두는 전경이 되는 스토리에 봉사하는 배경에 머무른다.그런데 배경이 전경이 되는 역전이 이 영화에 펼쳐진다. 스토리와
한 때 슈퍼히어로 영화 ‘버드맨’으로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던 리건은 이제 한물 간 할리우드 스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다시 쏟아지기를 욕망하고 있다. 이제 할리우드가 아닌 브로드웨이에서 시답잖은 시나리오로 관객의 관심을 끌어 새로운 도약과 비상을 꿈꾼다.프리뷰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안에서 잠긴 공연장 뒷 문 틈 사이에 가운이 끼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하의 속옷 한 장만을 걸치고 도심을 가로질러 공연장 입구에 이르는 절박함을 보인다. 주위에서 비웃어도 좋다. 이 공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반드시 과거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안타까움이 그로 하여금 도심을 반나체로 활보하게 한 것이다. 리건이 욕망에 더욱 집착할 때 나타나는 존재가 있다. 과거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버드맨’이다. 새부리 가면과 새 깃털 망토를 걸친 버드맨이 그에게 다가와 속삭이며 욕망을 부추긴다. 브로드웨이 대신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 화려하게 부활하자고 속삭인다. 리건은 더욱 광폭해진다. 재즈드럼의 쿵쾅거림은 그의 욕망의 고동소리이다.◆ 착각 : 하나의 숏 이 영화는 시각적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독특한 촬영 기법을 동원한다. 공간과 시간이 달라
한비는 남 보기에 부족한 것 없는 가정의 주부이다. 남편 정석은 저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예와 부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정석은 가정을 소홀히 하는 무심한 가장이다. 자신의 아기가 있는 집에서 담배를 태연히 피우고, ‘난 집에서 잠 못 자’라며 늘 밖을 떠돈다. 소연은 조부와 부모가 빌딩 몇 채를 소유하고 있는 유복한 집안의 젊고 예쁜 아가씨이다. 하지만 소연에겐 그녀의 삶은 지옥이다. ‘나는 내 손 만 보면,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며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를 품고 있다. 약간의 삐걱거림은 있어도 외부의 기준으로 보기에 행복한 조건을 보유하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집을 나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독수리가 되고, 매가 되고 싶은 거다.정석은 남편인 자신과 아이를 버리고 집나간 아내 한비를 15년간 찾아 다닌다. 사랑해서 그리워서 찾아 나선 게 아니다. 자신도 왜 그녀를 찾는지도 모른다. 번듯한 가정을 버리고 조류가 되고자 나선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다.한비와 소연은 조류가 되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한약방에서 정신검사를 받고, 다시 약초꾼을 만난 후, 자신들을 수술해 주는 이의 거처로 인도해주는 사냥꾼을 찾아 나선다. ◆ ‘커서 무
이 영화는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풍경 화가인 윌리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마지막 25년간(1825~1851)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이다.전기 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여러 에피소드들을 제시하며 주인공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 양극성셰익스피어와 견줄 만큼 명성이 높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 터너의 진실에 대한 실마리는 우선 두 여자의 양극성이다. 평생 터너의 등만 바로 본 그의 하녀 한나와 터너의 위로이며 안식처 역할을 한 여인 부스. 이 두 여인은 각각 슬픔과 따뜻함이며, 수동과 능동이다. 또한 그들에겐 어둠과 빛이다. 이 대조는 터너의 양가감정의 또 다른 표현이다.이러한 양극성은 그의 작품에도 동시에 나타난다. 파랑, 청록(blue green), 보라색등의 마이너스 색깔과 노랑, 빨강, 녹색(green)등의 플러스색의 대조는 터너의 작품세계의 대강을 가늠하게 한다. 그의 대표작인 해체를 위하여 최후의 정박지로 끌려가는 전함 테메레르는 냉기의 파랑과 온기의 노랑을 대립시켜 쓸쓸함과 안쓰러움을 묘사한다. 노을빛과 수평선 주위의 푸른빛은 각각 산업화 시대의 도래로 등장한 증기선과 낡은 전함을
흑인이 농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공을 넣을 골대인 바스켓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바스켓의 링 모양은 있다. 특이하게도 링은 교수대의 목줄이다.이 광경은 행크 윌리스 토마스의 영상 작품이다. 노예로 유럽과 미국으로 팔려 강제 이주를 당한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극단적으로 그들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강도 아니면 나이키의 후원을 받는 프로농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농구 링을 교수대 목줄로 표현하여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인의 참담함을 그렸다.이 영상은 현재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프리카 나우전에서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 나우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현대 미술 100여점을 소개하는 한국 최초의 전시회이다.전시 작품들은 동일하게 아프리카라는 토양에 근거하지만, 작품의 층은 다양하다. 인종차별문제, 탈식민주의, 그리고 혼성문화등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각각조망한다. 이 전시회는 우리사회에 문화의 다양성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측은 “아프리카 나우전은 점차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한국사회에서 다민족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슈를 점검하는 기회가 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