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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혐오주의 정치 ]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기 위해

정치의 공간은 피상적으로 책략과 다툼의 공간으로 비칩니다. 

그런데  정치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현실’과 ‘의미’의 간극에서 서로 밀거나 당기는 변증법의 과정이 벌어지는 곳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정치란 정치 행위자들이 각자 신봉하는 신의 ‘의미’를 ‘현실’에서 이루기 위한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 서서 정치를 이해할 때, 베버의 통찰을 원용한다면, 정치는 현실을 의미로 착각하는 신비주의정치와 현실과 의미사이를 좁히고자 하는 금욕주의 정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공간에서 부각되는 문제의 하나는, 특히 증오와 혐오의 현실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신비주의자들이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구축 확산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조화를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러한 혐오의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원칙의 정치행위자들과 유권자들의 몫으로 남습니다. 


◆ 신비주의 종교 vs 금욕주의 종교 (박영신)

베버에 의하면 삶의 의미지향성의 기초를 마련해주는 것은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삶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가에 따라, 삶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의 의미가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버는 종교를 금욕주의 종교와 신비주의 종교라는 두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금욕주의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고 현실의 잘못을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신의 도구인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고자합니다.  잘못된 현실과 신의 뜻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현실의 오류를 수정하는 겁니다. 

반면 신비주의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진실로 인정하는 현실긍정론을 말합니다. 즉  인간은 현실체제에서 발생하는 잘못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과 조화롭게 어울리고자 합니다.  


◆ 신비주의 정치행위자 vs 금욕주의 정치행위자(박영신)

이처럼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삶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현실부정과 현실긍정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잘못된 현실과 신의 뜻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자하는 금욕주의 종교에 대해, 신비주의종교는 그 현실을 그대로 지켜가고자 합니다. 

정치의 공간도 이러한 두 종교의 현실인식 관점에 따라 작동되고 있습니다. 

정치의 공간은 ‘현실’과 ‘의미’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인데, 정치는 이 두 수준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집합목표(의미)를 겨냥하는 행위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목표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의 오류를 부정· 수정하는 부류이며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의 오류를 긍정 강화하고자 하는 부류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행위자 마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자의 삶의 의미 지향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신비주의 정치 행위자는 현실의 가치를 긍정합니다. 이들은 그의 종교를 관장하는 신의 뜻, 곧 의미지향이 곧 현실의 가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치행위자는 그 현실을 수용하고 강화하는 시도를 행합니다. 

반면 금욕주의 정치 행위자는 현실의 잘못된 가치를 부정합니다. 이들은 그가 믿는 신의 뜻이 현실의 가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정치행위자는 그 현실의 오류를 수정하여 현실을 의미와 일치시키고자 합니다. 

결국 현실적응의 신비주의 정치행위자들은 그 현실이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는 반면, 현실부정의 금욕주의 정치행위자들은 그 현실이 진리를 배반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현실주의 정치, 증오의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

정치공간에서 의미와 현실간의 거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정치의 행위가 달라진다면, 우리 정치가 추구해야 할 지향성은 현실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하는 진리추구의 정치가 되어야 하고, 현실주의 정치는 배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진리추구의 정치행위자들은 주어진 현실체제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그 흐름을 과감히 거스르며 신의 의미와 현실의 간극을 좁혀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모험가는 ‘원칙의 사람’으로 불립니다. 

반면 신비주의 정치행위자들, 곧 현실주의 정치행위자들은 현실체제의 질서에 순응하는 ‘얕은 정치’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현실체제에 적당히 편입해가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사로운 목적을 추구함에 따라 공공 영역을 약화시킵니다. (박영신)

이러한 얕은 정치에는 증오와 혐오를 확산시키는 정치가 포함됩니다. 

집단의식의 표출인 증오와 혐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닌,  훈련받고 양성된 집단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카롤린 엠케) 

이러한 집단의 혐오 이데올로기는 신비주의 정치가들이 자기 충족적 확신(self sufficient belief)에 사로잡혀 혐오를 의미지향으로 확신함에 따라 형성되고 확산되어 갑니다.  

예컨대 반페미니스트들과 반PC주의자들은 집단의 구심점이 되는 리더를 세우고 제도권 안에서 공적 집단을 창설하여 집단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이 집단의 궁극적 목표란,  개혁의 정책들을 그럴듯하게 피상적으로 제시하지만, 본질적으로 집단의 정체성인  여성· 장애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터 잡아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의 전략은 모순적입니다. 개혁과 증오는 마이너스 상관관계에 놓여있는데도, 이 집단은 혐오의 확산을 위해 개혁을 부르짖는 모순적 정책을 제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의 추구는  공동체에 카오스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의 혐오주의가 공감과 관용이 들어설 자리를 빼앗고 미러링이나 집단적 백래쉬현상을 초래하여, 공동체의 ‘갈라치기’를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갈라치기의 대표적 실례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이는 젠더 갈라치기의 전형적인 사례로, 표를 위해 공동체를 쪼개는 얕은 술수로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현실주의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결과가 긍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직전 대선의 방송3사출구조사에서 윤석열 후보는 20대 남성의 58.7%의 지지를 획득하였고, 이재명후보는 20대여성의 58.0%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여성가족부폐지라는 공약이 20대여성의 민주당 지지로의 이탈과 20대남성의 국민의힘 지지로의 흡수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데, 직관적으로 그 이탈과 흡수의 변량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약이 실제로 윤석열후보의 표를 증가시켰다는 실질적 증거를 찾기 힘든 이유입니다.

오히려 여성가족부폐지 정책은 이후 윤대통령의 국정운영의 골칫거리가 되었으며, 현재도 국민의힘이 중도 포지셔닝으로 안착하는데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대통령이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 그 이념화의 단초는 사실상 여성가족부폐지의 공약에서 발견됩니다.  

이 시점에서도, 혐오이데올로그들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대통령을 이념에 매몰되어 있는 자로 비난하는 신기하고 웃기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

결국 현실주의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는 현실주의 정치행위자들이 혐오와 증오등 현실의 오류를 ‘의미’로 확신하여,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동시에 공공의 안녕을 해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간의 조화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기 위해

이처럼 한국 정치의 공간에서 정치행위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미’는 개인의 창의성과 공공성의 강화를 통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조화에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속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정치행위자들과 유권자들의 몫입니다. 

정치행위자들은 현실체제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혐오와 증오주의를 씻어내어, ‘현실’을 개인의 창의와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해를 추구하는 ‘의미’로 변질시켜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혐오를 배제하는 결정적인 힘은 유권자들에게 있습니다.  

혐오이데올로그들이 한국 정치의 공간에 똬리를 트는 시도를 막는 힘은 국민들이 투표로 혐오주의의 집단의 싹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때 유럽과 미국에서 활개치고 있는 극우성향 정당이 한국의 정치 공간에서 발붙일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진실된 정치행위자들, 곧 ‘원칙의 사람’들이 신의 의미와 현실의 거리를 좁혀가며, 또한 유권자들이 공동체의 조화를 바라며 투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때, 헌법 10조가 꿈꾸는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누리는 현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고문헌>
박영신,“우리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카롤린 엠케, 정지인 옮김, 「혐오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