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stinct of the coffee is temptation
커피의 본능은 유혹
Strong aroma is sweeter than wine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다
Soft taste is more rapturous than kiss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Black as the devil
악마처럼 검고
Pure as an devil
천사처럼 순수하고
Sweet as love
사랑처럼 달콤하다.
--커피예찬 (Admiration of coffee) 탈레랑
키스보다 더 황홀하다는 이 커피는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커피 없인 못 살 정도로, 커피가 밥의 자리를 꿰 찰 정도이다.
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정설이 되었다. 그런데 이 커피가 어떻게 세상에 널리 보급되었을까?
에디오피아에서의 커피는 좁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에 전해졌다. 6세기에 에디오피아가 예멘을 침략하여 이곳을 지배하면서 커피가 전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커피는 처음에 아라비아의 수피교(이슬람신비주의) 수도승들이 졸지 않고 밤새워 기도하기 위해 커피체리로 만든 차 ‘키쉬르’를 마셨다. 이 키쉬르를 아라비아인들은 ‘카와’(Qahwah)라 불렀다. 커피의 어원은 이 ‘카와’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커피는 수도승에서 일반신도에게까지 전파되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커피가 이슬람교 순례자들을 통해 페르시아, 이집트, 터키, 북아프리카등의 이슬람교 전역에 소개되면서 커피는 널리 보급되었다.
1536년 오스만투르크 터키가 예멘을 점령한 직 후, 커피콩이 터키 제국의 주요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커피는 예맨의 모카항을 통해 터키로 수출되었다. 현재 커피명의 하나인 모카는 이 항구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커피는 터키에서 다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터키인들은 커피가 주요 수입원이 되자, 커피 수출을 독점하기 위해 커피나무와 종자의 반출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싹이 트지 않게 하기 위해서 커피열매인 체리를 뜨거운 물에 담그거나 원두를 볶아, 이를 예맨에서 반출하였다.
이러한 철통같은 단속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전파 되었을까? 이는 애국적인(?) 절도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고려로 목화씨가 들여온 경우와 유사하다.
1600년대 인도 남부출신의 바바 부단이라는 이슬람교도가 메카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커피 씨앗을 몰래 훔쳐 인도 남부 지방의 산악지대에서 재배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도에서 이 커피나무를 들여왔다. 혹자는 예멘의 아덴에서 커피나루를 몰래 네덜란드로 날랐다고 한다.
여하튼 이 묘목은 암스테르담 식물원에서 길러졌고, 이 커피 묘목을 자신들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이식하였다. 커피나무는 고온, 고지대 그리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지 나라들은 유럽으로의 주요 커피 공급처가 되었다.
이후 유럽의 십자군 전쟁도 유럽으로 커피가 전파되는데 기여한다.
◆ 교황 그리고 해군장교
커피가 로마에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를 사탄의 음료라고 배격하였다. 커피가 이슬람교도들이 즐겨 마신 음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음료를 마실 경우 사탄이 그들의 영혼을 데려 간다고 믿어, 당시 교황 클레멘트 8세에게 커피음용을 금지시켜 달라고 청했다.
교황은 직접 이 음료를 시음해본다. 커피의 은은한 향과 맛에 끌린 교황은 “사탄의 음료가 왜 이렇게 맛이 좋은가? 이렇게 좋은 향과 맛이 나는 음료를 이교도들이 마신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나는 이것을 세례주어 사탄의 콧대를 꺾어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의 음료로 만들겠다.”라며 커피에 세례를 주었다.
또 커피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프랑스의 한 해군장교의 비전과 희생이 컸다.
1714년 네달란드의 암스테르담 시장은 루이14세에게 어린 커피나무를 선물한다. 이 묘목은 파리 왕립 식물원인 Jardin으로 옮겨 심어진다.
마르티니크(카리브 해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섬)에 복무하던 가브리엘 마티외 드 클리외라는 노르망디 출신 해군장교는 고국 프랑스에 잠시 들른다. 그는 유럽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마시는 것을 보고, 마르티니크섬에 커피나무를 심으면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1723년 궁중의사의 도움으로 이 커피 묘목을 획득하여 마르티니크섬을 향해 출발한다. 클리외는 묘목을 유리상자안에 심는다. 햇빛 흡수율을 높여 흐린 날에도 상자 속의 온도를 높일 수 있었고, 바다 소금기로 묘목을 보호 할 수 있었다. 밤에는 선실에서 따뜻하게 보호하여 커피나무를 보살폈다.
이 묘목을 안전하게 운반하는데 남다른 고초가 있었다. 클리외가 묘목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 동료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려 하자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커피나무를 지켰다.
또한 큰 폭풍우에 시달리는 속에서 물이 부족 하여, 식수는 배급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이 마실 물을 아껴 배급받은 식수를 커피 묘목에 주었다.
“물은 나를 한계에 다다르게 할 정도로 부족했다. 하지만 난 나에게 배급된 물을 커피나무와 나눠 마시며 한 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나의 가장 행복한 희망을 커피나무가 살아있음에 걸었고 그것은 나의 기쁨의 근원이었다.”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한 클리외는 그의 사유지에 묘목을 심었고 커피나무는 크게 번식하였다. 그는 애지중지 묘목을 키워 커피 종자를 2파운드 가량 확보해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1759년 이 섬에서는 1,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수출할 수 있었다.
1777년 1천 900여만 그루의 커피나무를 재배하게 되었고 이 묘목은 다시 아이티와 산토토밍고등 여러 곳으로 옮겨지다가 중남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묘목이 서인도 제도와 멕시코만 지역에 큰 부를 안겨주었다.
커피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만약 교황이 율법적인 사고에 매달려 커피를 금지하였다면, 커피의 보급은 널리 전파되지 못하여 사람들의 행복은 감소하였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비전, 봉사 그리고 희생이 없었다면 그 당시 중남미 지역의 부의 축적은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는 정파의 율법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행복보다 우선시 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이로 인해 국민이 더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제한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있다.
또 역사는 지도자들에게 국민들 위에 군림하기보다 국민을 위해 어떠한 비전을 제시하고 무엇을 희생할지, 질문하고 있다.
“커피는 우리를 진지하고 엄숙하고 철학적이 되게 해준다.”
-조나단 스위프트
<참고 도서>
마크 펜더그라스트,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양동혁, 「베이직 &올 어바웃 커피(basic & all about coffee)」
윌리엄 우커스, 「올 아바웃 커피」
강란기외, 「커피학 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