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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 모스트 바이어런트 > 리뷰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가?



한 남자의 숨가쁜 호흡이 거칠게 들려온다. 잠시 후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가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남자, 난방유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히스패닉계 아벨은 자신의 직원인 줄리앙에게 말한다. “앞을 보란 말이야.” (Look forward.)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에겐 뒤를 돌아보는 것은 죄악이다. 오로지 앞을 향해 달리며 끝없이 성장하는 것, 그래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삶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약금으로 자신의 전 재산 100만 달러를 부두의 부지 매입 한 곳에 올인한다. 게다가 잔금 150만 달러는 한 달 후 청산해야한다. 은행 대출도 여의치 않다. 그에겐 포트폴리오란 개념이 없다. 

아벨은 자신의 부의 총액을 넘는 빚을 지면서까지 투자하는 무모함을 보인다. 그는 부를 가지면 가질수록 부의 만족도는 서서히 하강한다는 위험회피의 보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부가 늘면 늘수록 그의 만족도의 기울기는 더욱 상승한다는 ‘폭력적인 욕망’에 그는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폭력적인 욕망에 그의 고문변호사는 아벨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간절히 원하죠?”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가

욕망과 깨끗함은 병존할 수 있을까? 욕망의 폭력이라는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바르고 깨끗함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가? 단적으로 그가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을 때도 그는 의연하게 이러한 공정함을 지킬 수 있을까? 

아벨은  꿈의 실현을 추구하지만  공정하며 표준화되고 고급화된 사업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그의 회사 이름도 ‘스탠다드’이며, 법에 어긋난 행동은 범하지 않는다. 그는 커피와 차를 선택하라 한다면 차를 고르라고 직원들에게 말한다. 최고의 수준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가’ 아니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가’라는 고뇌에 찬 갈등이 잔금 150만 달러를 마련해야 하는 아벨에게 던져진다.  반듯한 의식으로 버텨내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생존이라는 존재로 인해 도전받는다.  

하지만 기실 존재의 성격은  생존의 위협이라는 외부적 압력이라기보다, 이러한 갈등에 놓이도록 유도한 내면의 폭력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의식이 기존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1981년 ‘가장 폭력적인 해’(a most violent year)는 이처럼 ‘가장 폭력적인 욕망’의 산물인 것이며, 이러한 폭력의 가치가 이 시대의 보편화된 가치로  뿌리내린 것이다. 

아벨도 이 표준화된 폭력적인 가치에 순응하며, 그의 신념과 그의 표준을 버린다. 마치 줄리앙의 피가 뿌려진 부두의 유류탱크에 구멍이 나, 기름이 쏟아져 나오자, 그 틈새를 헝겊으로 막는 아벨의 모습은 구멍 난 그의 의식에 세상의 폭력의 가치를 대신 메우는 태연함을 의미한다. 


◆ 장르의 혼합과 서서히 점강하는 연출

이 영화는 아벨이 그의 의식의 선형성을 꺾고 폭력의 비선형의 곡선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보인다.  이러한 접근은 지금까지의 장르 영화에서 흔히 접근해온 내용들이다.  선형적인 의식이 결국 존재에 의해 굴절된다는 것은 창의적인 주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미덕은 어디에 있을까? 

이 영화는 우선 시대의 가치이며 아벨의 가치인 폭력적인 욕망을 씨줄로 하고, 미스테리 스릴러의  각론이라는 날줄로 짜여진, 촘촘한 직물이라 말할 수 있다.  

스릴러 장르로서, 우선 잔금 150만달러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라는 과정의 추적이다. 

또한 미스테리 스릴러로  이중의 악들이 아벨을 압박한다.  그의 경쟁자들의 짓이라고 추정되는 그의 탱크로리를 빼앗는 가시적 악이 나타난다. 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내부의 악이 그를 압박한다.  장부조작과 탈세혐의로 그를 기소하겠다는 검찰을 그는 이해할 수 없다. 

이처럼 이 세 가지 큰 줄기로 미스테리 스릴러의  얼개를 구성하면서, 관객들은 줄기들의 뿌리를 모색하게 된다. 아울러 아벨의 욕망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감독은 이야기의 초반에  에피소드들을  흩뿌리기만 한다.  이 이야기들을 한 곳으로 거두어들이기를 게을리 한다.  장르영화에서처럼  이야기의 전개만 이루어지고 정점을 향해 치솟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폭발적인 전개와 빠르고 뚜렷한 기승전결이 미덕으로 인정되고 있는  스릴러 장르영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이처럼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듯한 느낌에 좀이 쑤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느릿한 전개는 서서히 고지를 향해 나아가는 포복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와 스릴러물의 동시다발적인 협공으로 정점을 향해 서서히 나아간다. 그리고  드라마와 스릴러라는 각각의 제 멋과 색깔을 드러내며, 혼합된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기승전결이 흐릿하며, 그렇다고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도 아니며, 그리고 머리의 회전을  요하는 관습의 수수께끼장르도 아닌 영화가 장르의 혼합과 서서히 점강하는 연출로 서늘한 공포와 쭈뼛함을 안겨준다. 

마침내 우리는 크라이막스에서 스릴러 장르의 장기인 반전에 무릎을 치며, ‘가장 폭력적인 시대’에 공감의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의 고정화된 사고의 전복을 요구한다. 고답적인 틀 속에서 미세한 조정으로 무엇인가를 제조하고자하는 관행대신, 그 틀 자체를 과감히 깨뜨리기를 요구하고 있다. 

감독은 이러한 새로운 형식을 제시함으로서, 우리의 정형화된 사고에 새로운 충격을 던져준다. 창조는 바로 이러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