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시파시즘(micro-fascism)의 동학 ‘미시파시즘’의 개념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해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개념은 푸코(Foucault)의 통찰에 빚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들뢰즈와 가타리(Deleuze and Guattari)가 집필한 「Anti-Oedipus」의 서문에서 파시즘의 미시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략적인 주적은 파시즘, 즉 대중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활용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역사적인 파시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우리의 머릿속과 일상행위에 내재된 파시즘, 즉 권력을 사랑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욕망하게 하는 바로 그 파시즘이다” 이처럼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역사적 국가적 파시즘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푸코에 의하면, 우리 모두 안에 있고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떠나지 않는 파시즘이 존재하는데, 이 파시즘은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욕망을 가지게 하는 파시즘이며, 우리 안에 내재된 파시즘입니다. 미시파시즘, 즉 ‘우리 안의 파시즘’은 국가권력이 개인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개인이 권력과 폭력의 파시스트적 사고에 젖어들어 권력과 폭
한국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의 하나로, 담 너머 자연의 풍광을 실내로 흡수하는 차경이 꼽히고 있습니다. 차경은 실내의 문, 창, 또는 누마루등을 통해 자연의 풍광을 프레임화하여 실내에 자연을 담는 기법입니다. 차경은 실내에 거주하는 자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기도 하며, 좌절된 자아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담 너머 자연의 풍광을 실내로 담아내고자 한 이유는 자연의 질서와 이치를 4계절 관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누정이 주는 자연의 메시지 차경은 내부자와 외부 사이의 단절을 해소하여 자연이 품고 있는 이념을 내부자에게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이 품고 있는 이념은 간접적으로 누정에 대한 기록인 누정기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樓亭은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정자·정각·누대·누각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돌이나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운 것을 樓라하고 그 규모가 작은 것을 亭이라고 합니다. 누정기는 누각이나 정자등 누정을 신축하거나 개수할 때 그곳을 방문한 선비들이 누정에 대해 지은 산문을 말합니다) 누정은 인간이 자연과 상호교통하여 자연의 도를 깨닫게 하는 건축물입니다. 이러한
◆ 차경의 정의와 차경의 목표 차경(借景)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 건축물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실내의 내부자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건축 기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차경은 창, 문, 누마루등을 이용해 달성됩니다. 차경은 ‘산을 빌리고 물을 빌리고 구름을 빌리고 꽃이 필 때는 꽃을 빌리고 눈이 올 때는 눈을 빌린다’는 단순한 아름다운 경관의 이용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차경을 통해, 담이 단절시킨 폐쇄성에 갇혀있는 내부자들이 자연의 환경을 내부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독단성을 극복하고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한옥은 살기위한 집이 아닌 자연과의 어울림을 추구하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차경의 원리, 분류 借景은 영어로 ‘borrowed view’ 또는 ‘view borrowing’으로 번역되는데, 풀어쓰면 ‘making use of natural scenery’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차경의 원리는 3차원의 공간에서 2차원의 경관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는 풍경의 일부분을 프레임 형태로 담는 방식에 의해 가능합니다. 즉 사진의 프레임처럼 실내공간에서 외부로 열린 창이나 문을 통해 외부 경관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후, 환경적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신앙적 나태함등으로 인해 하나님과 소원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공동체는 다양한 위기로 인해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침체상황에서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공동체가 다시 성장하기 위해선 영적 부흥이 요구됩니다. 復興은 다시 흥한다는 말로, 영어로 revival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revival은 라틴어 re(다시)와 vivere(산다)로부터 온 말로,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또한 부흥은, 19세기 미국부흥운동의 주역인 찰스 피니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한 죄인들의 각성과 회심을 낳는 그리스도인의 첫 사랑의 회복’이란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흥은 영적으로 침체되어있는 삶과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의 회복이며 하나님을 향해 다시 가까워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흥을 가능하게 할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시선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향하게 됩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지금도 신자와 신앙공동체의 영적 부흥의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의 겨울 남자 査經會(성경공부
영적각성운동인 부흥은 성령 운동입니다. 1903년의 원산대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모두 성령의 역사에 의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주권적인 은혜는 어느 곳에서나 임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땅이 봄비를 기다리듯 성령의 단비가 뿌려질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요? ◆ 기도와 성령의 역사 성령의 역사는 성령을 사모하고 계속해서 기도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4~5절에서 주님은 성령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말하십니다.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4b. Do not leave Jerusalem, but wait for the gift my Father promised, which you have heard me speak about. 5. For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in a few days you w
신약 성경에는 ‘εν χριστω’(엔 크리스토), 곧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어구가 자주 발견됩니다. 특히 바울서신에 약 181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에 나오는 비중이 큰 만큼, ‘엔 크리스토’는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in Christ’를 기록하고 있는 대표적 구절이 고린도 후서 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the new creation has come. The old has gone, the new is here.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새 피조물, a new creation, καινή κτίσις (카이네 크티시스)로 정의합니다. 새 피조물이란 인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의 중심을 전환시킨 자를 일컫습니다. 즉 의지의 방향을 전환시킨 자가 새 창조물입니다. 자기자랑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전향한 새 피조물이 하나님의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vs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