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격언에 ‘dum spiro, spero’(숨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While I breathe, I hope.)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인인 키케로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이 격언은, 문장의 앞 뒤 문구를 바꾸어 표현하면, ‘희망하는 한, 우리는 숨쉬게 된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을 지라도 희망이 있다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다지 마음의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고통의 원인을 찾는데서 헤어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앞 뒤로 꽉 막혀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그 희망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우선 떠오릅니다. ◆ 희망의 상실의 원인과 희망의 회복 희망의 회복은 무엇이 희망을 잃게 하는가에 대한 답 찾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의 원인이 환경의 압제에서 기인한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절망의 뿌리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육의 죽음과 영의 죽음으로 구별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 죽
“무엇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목표인가?”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의 답은 무엇일까요?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은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해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의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우리 자신이 성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칼빈이 의미하는 성화 칼빈은 성화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자기 헌신으로 파악합니다. 그는 이러한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을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화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라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한 전제는 자신이 오염으로부터 깨끗이 씻김을 받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란 세상을 버리고 육체의 오염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고 마치 제물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한 신애는 교도소에서 유괴범을 만난다. 그런데 유괴범은 신애에게 사죄하기는커녕, 평온한 얼굴로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신애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를 위로하러 온 교회신자들에게 신애는 이렇게 외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신애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신에게 보복하듯 교회의 집회를 방해하고 물건을 훔치는등, 죄악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 위의 내용은 이창동감독이 찍은 영화 <밀양>(2007)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다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등을 수상할 만큼 영화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밀양>은 관객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실 수 있어, 감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기독교의 구원관, 곧 칭의에 대한 확증편향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아무리 감독의
영혼의 구원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는 하나님과 상처 받은 영혼 사이의 단절을 이어주는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자신의 통치자, 곧 영적인 주인이 교체되는 것으로, 이전에 자신을 주관하던 것들, 곧 우상으로부터 벗어나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구원이 단순히 옛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강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유는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있어 사탄의 지속적이고 집요한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본업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불신자를 수렁 속에 빠뜨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불신자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신자는 영원히 사탄의 지배하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혼의 구원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은 구원받으려는 자를 붙들고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사탄과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틀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인간은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의 자격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성경은 화목(reconciliation)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화목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유대인의 민족적 교만과 유사한 인간의 교만에 있습니다. ◆ 화목이란 ‘화목하게 되다’는 헬라어 동사 καταλλάσσω(카탈라쏘)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관계의 화해는 결혼한 자들의 다툼과 화해와 관련됩니다. 고전 7장11절은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고 화해하라고 촉구합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다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 “To the married I give this command (not I, but the Lord): A wife must not separate from her husband. But if she does, she must r
◆ 차경의 정의와 차경의 목표 차경(借景)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 건축물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실내의 내부자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건축 기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차경은 창, 문, 누마루등을 이용해 달성됩니다. 차경은 ‘산을 빌리고 물을 빌리고 구름을 빌리고 꽃이 필 때는 꽃을 빌리고 눈이 올 때는 눈을 빌린다’는 단순한 아름다운 경관의 이용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차경을 통해, 담이 단절시킨 폐쇄성에 갇혀있는 내부자들이 자연의 환경을 내부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독단성을 극복하고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한옥은 살기위한 집이 아닌 자연과의 어울림을 추구하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차경의 원리, 분류 借景은 영어로 ‘borrowed view’ 또는 ‘view borrowing’으로 번역되는데, 풀어쓰면 ‘making use of natural scenery’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차경의 원리는 3차원의 공간에서 2차원의 경관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는 풍경의 일부분을 프레임 형태로 담는 방식에 의해 가능합니다. 즉 사진의 프레임처럼 실내공간에서 외부로 열린 창이나 문을 통해 외부 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