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시들게 하는 자가 있다.
중년 지식인 지주 아이딘은 자기중심과 교만의 벽에 둘러싸여 사랑하는 이들과 자신의 영혼을 무력한 ‘겨울잠’에 빠져 들게 한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 니할, 그리고 여동생 네즐라는 ‘양심, 도덕, 이상과 원칙’을 말하지만 정작 ‘이기적이고 심술궂고 냉소적인’ 그리고 세입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아이딘으로 인해 압박과 굴욕을 당하고 있다.
아이딘은 이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조차 마비 상태인 것에 의심과 회의를 하지 않는다. 부패한 그의 영혼은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 사회적 대립과 심리적 대립
아이딘의 위선적인 삶의 가치관은 사회적 대립과 심리적 대립을 통해 노출된다. 아이딘은 지식인과 지주라는 병존하기 힘든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무계급성인 반면, 지주는 계급성이어서 상호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지주라는 신분을 통해 사회적 대립을, 그리고 지식인의 신분을 통해 심리적 대립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회적 대립
우선 사회적 대립으로 지주와 세입자간의 계층대립이 영화의 전반부에 도출된다. 특히 아이딘 뿐만 아니라 아내 니할도 지주계층의 위선에 한 몫 거든다.
감독은 계층 대립과 관련, 부와 가난과의 양극화에 문제 제기를 하기보다, 상류계층의 지주가 하층민의 자존심을 망가뜨리고 멍들게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지주계층은 상속으로 물려받은 유산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자선으로 해결하고자한다. 니할이 자선에 끌리는 것은 주변의 고통을 나눠가짐으로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감독은 이러한 지배계층의 비인간성과 위선에 카메라를 들이 밀고, 가난한 자의 마지막 품위를 지켜주고자 한다.
△심리적 대립
또 하나의 대립구도는 지식인 아이딘과 주변인들이다. 이는 심리적 대립이다.
아이디는 도덕적인 방향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하지만, 실상 그는 종교의 문턱에 발조차 걸치고 있지 않다. 또한 선을 말하지만 부모의 묘비에 참배 한 적도 없다.
이러한 그가 남보다 좀 더 교육의 기회를 누렸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의 거만과 우월감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판단하고 냉소를 보낸다. 자신의 원칙과 잣대만이 통용되어, 주변을 무시하고 옥죄게 한다. 이들에겐 그저 절망적인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 자각, 에피퍼니
종교와 자선과 고상함을 말하지만 내면의 독선이 주변의 영혼을 시들게 하고 이들을 자신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가운데, 이 영화는 어떻게 높아진 아이디의 마음을 낮자가추어 가는지, 어떻게 겨울잠에 빠져 있는 그의 영혼을 깨울지, 그 과정을 추적해 간다.
이 영화에서 자각은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퍼니’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자각의 첫 단계는 구원자의 도래처럼 자신의 영혼이 정신적 마비상태인 겨울잠에 빠져 있다는 부정적 에피퍼니를 느끼는 것이다. 이는 진실을 깨닫는 자각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얼마나 교만에 빠졌는지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얼마나 얼빠졌는지 자각한다.
이후 진실에 직면하는 에피퍼니는 새로운 출발인 희망의 에피퍼니를 창조한다. 드디어 긴 겨울잠에서 깨어 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말한다. 철저히 낮아지는 영혼의 거듭남을 체험한다.
◆ 감정이입과 완급 ; 영화의 형식미
심벌즈가 상대를 향해 날라 가지 않아도 좋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 체이싱이 없어도 좋다. 벽을 타고 가는 스릴이 없어도 좋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폐쇄된 공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저 바라보기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은 단지 서재이며 방이다. 그리고 대화와 논쟁이 영화의 핵심을 구성한다.
관객들은 마치 공연장에서의 연극 한편을 관람하는 느낌을 받는다. 폐쇄된 공간인 서재 등에서 아이딘과 여동생 네즐라, 그리고 아이딘과 아내 니할이 긴 쇼트로 날 선 대화를 나눈다.
관객은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이들의 입씨름을 구경한다. 그런데 어느새 이 논쟁의 자리에 끼여 들어 서재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후 관객 자신이 아이딘이 되고, 네즐라와 니할이 된다. 니할과 네즐라의 말의 송곳이 관객의 가슴에 꽂힌다.
이처럼 이 영화는 단지 팔짱끼고 바라보기에서 그 인물로 이입하는 신기한 체험을 허락한다.
또한 이 영화의 장점은 긴장과 이완의 리듬이다.
폐쇄된 공간에서의 긴장감이 심장을 후벼 판다. 어깨는 굳어지고 허리는 욱신거린다. 그런데 확 트인 거대한 벌판과 빼어난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진다. 눈덮인 설경이 가슴의 열감을 식힌다.
진실을 노출시키는 날 것 그대로의 대화에서 관객도 상처받지만, 아름다운 기암괴석의 카파도키아의 절경은 영혼에게 위로를 선사한다.
관객은 이러한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즐기며, 긴장된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이 교만과 허위의식에 빠져 헤매 일 때, 영혼의 마비를 자각하고, 자신의 그대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춤으로써 진실을 깨닫는다는 성찰의 과정을 관객의 감정이입과 영상의 완급을 통해서 능숙하게 실현시킨다.
*2014, 67회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196분, 5월 7일 개봉, 제작국-터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