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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버드맨> 리뷰: 버드맨 or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 욕망과 미덕사이에서




한 때  슈퍼히어로  영화 ‘버드맨’으로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던  리건은  이제  한물 간 할리우드 스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다시 쏟아지기를 욕망하고 있다. 이제 할리우드가 아닌 브로드웨이에서 시답잖은 시나리오로 관객의 관심을 끌어 새로운 도약과 비상을 꿈꾼다. 

프리뷰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안에서 잠긴 공연장 뒷 문 틈 사이에 가운이 끼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하의 속옷 한 장만을 걸치고 도심을 가로질러 공연장 입구에 이르는 절박함을  보인다. 주위에서 비웃어도 좋다. 이 공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반드시 과거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안타까움이 그로 하여금 도심을 반나체로 활보하게 한 것이다.  

리건이 욕망에 더욱 집착할 때 나타나는 존재가 있다. 과거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버드맨’이다. 새부리 가면과 새 깃털 망토를 걸친 버드맨이 그에게 다가와 속삭이며 욕망을  부추긴다. 브로드웨이 대신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 화려하게 부활하자고 속삭인다. 리건은 더욱 광폭해진다. 재즈드럼의  쿵쾅거림은  그의 욕망의 고동소리이다. 


◆ 착각 : 하나의 숏  

이 영화는 시각적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독특한 촬영 기법을 동원한다. 공간과 시간이 달라  씬이 바뀔 때, 마치 하나의  숏이 지속되고 있는 듯 한 착각을 준다. 이를 테면  샘과 마이크가 공연장 2층에서 대화하는 숏과 다음날 1층 무대에서의 공연 숏은 명백히 시간과 공간 면에서 다른 씬이다. 하지만 이 두 숏이 하나의 숏처럼 느껴진다. 

이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리가 곧추서고,  목과 어깨에 자연히 힘이 들어간다.  이 영화는 이처럼 한층 높은 집중도를 요구한다.  

감독은 하나의 숏으로 분절된 씬을 구성하면서, 이 영화는 팝콘을 입안에 털어 넣고 볼 만큼의 만만한  영화가 아니라고 정색하는 듯하다. 영화의 격조는 관객의 익숙했던 상식을 파괴하는 창의로부터 비롯됨을 일깨워준다. 

또한 이러한 단일 숏에 각각 의미를 분절 포함시키는 방식은  실질이 형식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형식에 매몰당하기 보다,  진실을 찾기를  관객에게 요구하고 있다. 

마치 명성과 인기라는 겉모습대신 삶의 희노애락의 괘적의 탐구라는 진실에 다가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 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이 영화의 원제는 『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이다. 감독은 우리에게 전자와 후자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전자의 버드맨은 유혹이다. 눈부신 화려함을 부추기는 유혹이다. 후자는 무지의 미덕이다. 무지에서 자각할 경우 예기치 못한 미덕을 만나게 된다. 

무지(Ignorance)는 어설픈 지식보다 유익할 수 있다. 

지식이 들어 찬 머리에는 이미 완고한 확신이 뿌리내려, 정작 불편한 진실등은 스며들 틈새가 없다. 그래서 이 지식에 지배되어 해방과 도약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지의 상태에서 진실이 다가갈 경우, 그 진실은 하얀 백지같은 무지에 순결의 색깔을 덧입힌다. 비록 진실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무너뜨리는 파괴력이 있을지라도, 진실은 무지의 토양에  향긋한 꽃을 피운다. 이 진실의 꽃은  역겹다기 보다, 군침 돌게 하는 숙성된 김치의 내음이다. 

그래서 무지는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의 낮은 마음의 밭에서나 거둘 수 있는 수확이다. 


△ 무지?
 
리건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무지는 무엇이었나? 

‘당신은 배우(actor)가 아니라 그저 유명인사(celebrity)다.’ 브로드웨이의 한 평론가는 이처럼 일갈한다.  리건의 얼치기 연극이  진짜 공연이 올라 설 자리를 빼앗은 거라고 비난한다. 

그가 애써 외면하였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모두 진정성을 찾기보다, 화려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다.  모두 금광을 캐기 위해 역마차를 타고 서부를 향해 우르르 달려 갈 지라도,  묵묵히 땅의 순박함을 믿고 이를  일구는  우직함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욕망의 폭주가 주변을 얼마나 파괴시켰는지를 몰랐다.  그의 욕망의 전차에 치인 듯한  딸 샘은 마약에 중독 된지 오래다.  하지만 그는 샘을  제대로 양육하여야 하는 아버지의 본분을 망각하였다. 사랑하는 아내도 그를 떠났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내팽개친 것이다. 

리건은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 무지하였던 것이다. 


△ 투쟁 

그런데 그가 이러한 무지의 미망에서 서서히 자각하게 되자, 그를 다시 명성과 환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유혹하는 버드맨의 목소리가 다가선다.  진실에 대한 목소리와 유혹의 목소리가 서로 엉켜 충돌할 때, 마치 까마귀 로봇이 마천루를 파괴하는 광경처럼 그의 내면은 투쟁의 장으로 변모한다. 

그래서 그의 내면의 싸움은 그를 벼랑 끝 선택으로 내몬다.  


◆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 욕망과 미덕 

이 영화는 이처럼 형식과 겉모습이 전부임을  착각하는 우리가 무지에서 깨어나 내면의 진실을 찾게 될 경우 예기치 못한 미덕을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반나체로 거리를 활보하게 하는 화려한 겉치레의 욕망을 사랑하는 이야기 인가? 아니면 무지에서 출발하여 진실을  찾아가는 진통 속에 예기치 않은 미덕을 사랑하는 이야기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