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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의 화목 > [ 말씀 QT ] 무릎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며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b)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틀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인간은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의 자격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성경은 화목(reconciliation)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화목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유대인의 민족적 교만과 유사한 인간의 교만에 있습니다. ◆ 화목이란 ‘화목하게 되다’는 헬라어 동사 καταλλάσσω(카탈라쏘)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관계의 화해는 결혼한 자들의 다툼과 화해와 관련됩니다. 고전 7장11절은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고 화해하라고 촉구합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다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 “To the married I give this command (not I, but the Lord): A wife must not separate from her husband. But if she does, she must remain unmarried or else be reconciled to her husband. And a husband must not divorce his wife.” 11절에서 화목이란 남편에 의해 모욕감을 느낀 아내가 분개하여 남편과 이혼하려는 상황에서, 남편에 대한 분노와 모욕감을 버리고 다시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목되다’는 상대의 잘못에 의한 분노와 모욕감이 상호 관계를 망가뜨렸을 때, 다시 관계가 친밀하게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과 하나님의 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도 친밀한 관계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화목은 죄의 세력 하에 놓여 있어 하나님과 대적하고 있던 자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회복은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화목이 하나님의 의, 의로우심에 의해 성취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시는 의로움을 말합니다. 따라서 죄인이 하나님의 선물인 의로움을 믿음으로 받을 때,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앞서, 하나님의 의를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 되십니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점을 지적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면 두 가지 은혜를 받게 된다. 곧, 첫째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흠이 없고 순결한 삶을 배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 5:21도 하나님의 의가 자비로우신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5:21)“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이 구절의 “In Him, we would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은 “We would be made acceptable to Him and placed in a right relationship with Him by His gracious loving kindness”(AMP)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겁니다. ◆ 화목과정의 세 단계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목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의 결과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의가 죄인인 인간에게 주어짐으로 인해,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그런데 화목되는데 있어 문제는 화목을 성취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는 점입니다. 화목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게 된다면, 인간의 죄로부터의 해방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비근한 예로 인간사이의 화해도 같은 이치가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의 원수를 자기 자신과 화목하게 하려해도, 그 상대가 여전히 자신을 적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의 화해시도는 우스운 일로 끝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화목 과정의 세 단계가 중요성을 가집니다. 이 단계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세 단계를 모두 완성하지 않을 경우,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목의 첫째 단계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시어, 인간과의 화해를 이끄시는 단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단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5:18a)“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a)“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in Christ, not counting people’s sins against them”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간의 직분을 주시는 단계입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5:18b)“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고후5:20a)“We are therefore Christ’s ambassadors, as though God were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셋째는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항했던 감정을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b)“Be reconciled to God” 이 구절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의가 주어져도 인간이 이를 믿지 않으면 죄의 세력에서 벗어 날 수 없으므로, 이 하나님에 대항하는 적대감을 포기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를 위해 세 번째 단계가 주목됩니다. ◆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바울도 복음 영접의 세 번째 단계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해도, 이들이 그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선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였습니다. 로마서 11:15절은 이 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롬11:15a)“if their rejection brought reconciliation to the world,”(NIV)“When Israel rejected God, the rest of the people in the world were able to turn to him.”(CEVDCI)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로 주어진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구원관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믿는 구원체계는 율법주의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언약적 율법주의’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언약적 율법주의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선민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들의 구원과 관련된 관심은 구원의 획득이 아니라 주어진 구원의 유지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 안에 남아 있기’(remaining in covenant) 위한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어 율법은 지기 힘겨운 의무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선물이자 특권이 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지속적인 생명을 확보하고 계약의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계약적 율법주의자들은 행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또한 이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도, 다양한 속죄수단을 동원하여 회개할 때 다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택하시어 구원과 율법을 주셨고, 이들이 그 율법에 순종할 때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민족적 교만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5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We who are Jews by birth and not sinful Gentiles”라는 바울의 진술은 유대인이 이방 죄인들과 다르며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당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자의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민족적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태가 됩니다. 이 교만이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여 죄사함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를 막고,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오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릎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며 이러한 유대인이 품고 있는 교만의 선민사상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열린 신앙과 대립됩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 교만을 자양분삼아 이스라엘을 배타적 공동체로 세웠습니다. 계약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유대 민족공동체의 구원만을 강조할 뿐 이방인의 구원을 배제한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계약적 율법주의를 거부합니다. 유대인은 이미 선택된 백성으로 구원을 얻었고, 민족적 특권인 율법에 순종함으로 그 구원을 유지한다는 계약적 유대교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하고 행위의 보상을 운운하는 계약적 율법주의자를 배격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구원은 이미 특정 민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계약적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닫힌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의 백성들만이 그들 만의 구원을 자랑하고 누립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믿음을 허락하는 공동체에는 누구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여의도정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들만의 구원을 추구하는 유대인의 민족적 폐쇄공동체와 민주당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폐쇄 진성 공동체가 오버랩되어 보이는 것은 착시일까요?) 결국 하나님과 화목되기 위해선, 곧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선, 유대인들의 민족적 교만과 선민의식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유대민족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원의 백성이라는 교만, 이방인들을 배제하는 탐욕, 계약적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자신의 행위와 의로움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시하는 오만등, 이러한 유대인들의 행태들은 타락한 성품의 결과일 뿐 생명의 회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단계는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와 생각과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품을 때, 하나님은 이 자들에게 곁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무릎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죄 짐을 지으셨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이 자를 용납하시게 됩니다. 결국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기쁨은 민족적 교만과 나의 교만을 과녁으로 삼을 때만이 얻어지는 소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태도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뿌리 깊은 유대인의 민족적 교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참고문헌>한천설, “하나님의 의의 표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 신근수, 「언약적 신율주의와 칼빈의 구원론 비교」,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화목과정의 세단계 #언약적 율법주의


[ 미시 파시즘 ① ] 북한 사회주의 체제 유지의 동력, 미시 파시즘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이후 탄생된 사회주의체제는 동유럽과 동아시아등 제3세계 국가들로 확산될 만큼 자본주의의 대항이념으로 부상하였습니다. 하지만 2024년 현재, 사회주의체제의 종주국인 소련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생산력의 퇴보로 곧 망할 것으로 예측되었던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예상과 달리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북한의 계속국가 유지의 동력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북한 권력의 지속적 재생산의 요인으로 ‘미시파시즘’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 스탈린주의가 아닌 파시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겁니다. ◆ 스탈린주의 대 파시즘 ①전체주의(totalitarianism) 특징사회주의 국가의 대표적 체제모형으로 전체주의가 꼽히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와 브레진스키(Friedrich and Brzezinski)는 전체주의의 특징을 “통일적 이데올로기, 일인독재에 의한 단일정당 정치, 비밀경찰 시스템, 무력과 소통의 독점, 계획경제가 상호 지탱해주는 하나의 유기적인 실체”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특징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소수엘리트들은 주변의 합리적 의사를 무시한 일방통행의 의사결정을 내립니다. 따라서 리더의 의사에 반하는 개인과 소수집단의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체주의 체제는 구성원에 대하여 전면적인 통제를 가하고 있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자유와 권리가 실종된 전체주의 체제의 존립 목적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후생의 증대에 있지 않고 소수 엘리트들의 권력 획득과 유지에 있습니다. 이 체제가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이유입니다. ②스탈린주의 VS 파시즘이 같은 전체주의체제의 폭력적 행태는 소비에트, 파시스트 및 나치 체제등에서 발견됩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 파시즘, 나치즘은 모두 전체주의체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주의와 나치즘(파시즘)은 주요한 차이점을 보이는데, 그 구분의 기준은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가능한가라는 점에 있습니다. 나치즘은 대중이 참여를 통해 통치를 하였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구분됩니다. 스탈린체제는 일인독재, 정치적 숙청, 굴락(Gulag, 소비에트의 집단노동수용소)정치, 사상통제등으로 구성원을 통제하였습니다. 반면 나치즘 또는 파시즘은 전체주의 이론이 위로부터 동시에 밑으로부터 끓어올라 대중 속에 확산되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나치는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통해 효과적 내적 통제를 달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체제는 체제의 단일성과 폭력성을 구성원의 내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 결과 하부 구성원과 체제가 동일시되었고, 이 점이 파시즘 체제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③미시파시즘의 정치이처럼 권력의 재생산, 확대, 발전은 거시적 통제방식 보다 미시적 통제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향식으로 폭력적인 방식을 동원하는 거시적 통제방식 보다, 체제의 논리가 구성원의 삶 속에 깊이 침투하여 이들이 스스로 권력을 지지 옹호하도록 하는 미시적 접근이 권력 재생산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통제방식이 미시파시즘의 정치로 불립니다. 미시파시즘을 이용한 정치는 전체주의적 통치방식의 일환으로, 권력이 국민개인의 일상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 아래로부터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는 측면을 부각시킨 정치를 말합니다. 이러한 통제는 체제의 ‘단일적 유기체’(monolithic organic entity)를 가능하게 하여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합니다. ◆미시파시즘의 전개 ①전개의 과정그런데 이러한 미시파시즘은 위로부터의 일 방향적인 강압에 의해 전개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길들여진 몸’(docile bodies)에 의해 생산적이고 수평적인 확산에 의해 미시파시즘이 개별행위자에게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즉 근대국가의 권력이 억압적인 실체로서 개인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 속으로 유입되어, 개인 주체가 그 권력을 실행함으로써 개별적 행위의 권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개인은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을 실행하는 하나의 담지자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푸코의 통찰입니다. ②북한의 미시파시즘의 전개, 권력이 개인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개인이 권력을 사랑하고 행사하는 애국적인 전사가 형성되는 과정은 북한 주민의 반미민족주의의 의식화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북한 주민들이 호전적 반미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은 국가의 선전과 교육에 힘입은 바 큽니다. 이에 덧붙여 반미 민족주의는 주민들 자신의 내적 동학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우선 북한의 체계적인 반미교육이 북한주민들의 반미 민족주의를 강화시켰습니다. 1986년에 간행된 인민학교 2학년생들을 위한 수학교과서에서 호전적인 용어를 사용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나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 때 인민군대 아저씨들이 한 전투에서 미제 승냥이놈들과 괴뢰군놈들을 합하여 278놈 족쳤습니다. 미제 승냥이놈들은 196놈이고 나머지는 괴뢰군놈들입니다. 괴뢰군놈들은 몇 놈 족쳤습니까?(『수학』 1986: 29).” 이처럼 북한 주민들은 적대적 반미교육을 통해 미국을 승냥이의 나라로 인식하게 되고, 반미 민족주의를 가진 전사로 커가게 됩니다. 그런데 북한주민들은 국가의 아래로부터의 교육에 의해 반미 민족주의의 인식을 가지게 된 것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패전의 기억을 통해 반미민족주의를 자생적으로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한 탈북자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미제 승냥이놈이라는 말이 가장 모욕적인 것이었어요. 미군놈들은 두 발 달린 짐승으로 우리 국민을 식민지 노예로 만든 사악한 살인자들이자 악랄한 착취자들로 묘사되었죠” 이처럼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거의 모든 북한 주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국가의 호전적인 반미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의식화하여, 애국심과 전시민족주의로 무장한 전사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의 미시파시즘이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부분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징후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집단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주의적 내지는 이기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향함에 따라, 또한 ‘위대한 지도자 어버이 수령’이 자신들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체험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강한 국가주의적 반미의식과 실천 의지를 약화시켜 왔다는 겁니다. 그러함에도 북한 주민들의 미시파시즘은 여전히 정권을 지탱해주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핵전쟁의 위기는 미제에 대한 증오심을 배가시켜 왔고 경제난으로 인한 삶의 피폐와 곤란 역시 미제의 탓으로 돌려지면서 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미시파시즘을 견지해왔다는 겁니다. ◆ 북한체제 유지의 동력 북한 권력층은 ‘전시민족주의’ 기제를 통해서 국가 권력을 개인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주민들의 미시파시즘을 형성하였고, 이러한 권력과 폭력의 미시파시즘을 동원하여 체제를 위기 속에서도 유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의식화되고 내재화된 증오와 폭력의 파시스트적 반미민족주의가 주민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실행되어, 주민들은 미국에 저항하는 애국적 전사로, 규율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재생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미시파시즘적 정치가 주민들과 체제와의 단일의 유기체를 형성하여 북한의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동력이 된 것입니다. <참고문헌>강진웅, “북한의 국가 권력에 대한 미시적 접근”

[ 미시파시즘 ② ] 우리 안의 파시즘, 일상의 파시즘이란?

◆ 미시파시즘(micro-fascism)의 동학 ‘미시파시즘’의 개념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해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개념은 푸코(Foucault)의 통찰에 빚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들뢰즈와 가타리(Deleuze and Guattari)가 집필한 「Anti-Oedipus」의 서문에서 파시즘의 미시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략적인 주적은 파시즘, 즉 대중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활용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역사적인 파시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우리의 머릿속과 일상행위에 내재된 파시즘, 즉 권력을 사랑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욕망하게 하는 바로 그 파시즘이다” 이처럼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역사적 국가적 파시즘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푸코에 의하면, 우리 모두 안에 있고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떠나지 않는 파시즘이 존재하는데, 이 파시즘은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욕망을 가지게 하는 파시즘이며, 우리 안에 내재된 파시즘입니다. 미시파시즘, 즉 ‘우리 안의 파시즘’은 국가권력이 개인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개인이 권력과 폭력의 파시스트적 사고에 젖어들어 권력과 폭력의 담지자가 되고, 이 힘으로 공동체 밖의 적과 맞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폭력과 증오의 파시즘은 능동성과 연계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선 폭력성의 원류는 삶의 자발성과 능동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삶에 긍정되는 가치는 자발성과 능동성인데, 이 자발성과 능동성의 요체는 능동적 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능동적 힘은 공격적이고 파괴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괴적 힘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 관점에 설 때, 파괴와 폭력이 공동체에 봉사하고 기여한다면, 그 폭력은 용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파시스트적’이란 말은 긍정적인 삶의 능동성을 생산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인데, 공리주의적 관점에 따른 파시스트적 행위는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에 대한 실례가 북한 주민들의 호전적 반미민족주의의 내면화입니다. 주민들은 미국을 승냥이로 취급하며 미국에 호전적 적대와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국가에 의한 의식화와 자발적인 내면화에 의해 스며든 파시스트적 반미민족주의는 위기에 처한 북한의 체제를 버텨주는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 우리 안의 파시즘 능동성과 관계된 파시즘과 달리, 일상의 삶에서 폭력과 권위를 행사하는 파시스트적 행동도 광의의 개념에서 일상의 파시즘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국가차원의 파시즘과 비교되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개인의 파시스트적 행태는 도처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여성· 아동· 장애인· 빈민등에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행태, 학교폭력, 직장 상사에 의한 성희롱등이 미시파시즘의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집단이 있다면, 이들은 미시 파시즘을 행사하는 파시스트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미시파시즘은 최근 정치권의 좌파 진영에 아비투스로 정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 테면, 좌파 명망가들의 성추행, 당내 선거부정, 86세대 운동권 리더들의 대중에 대한 오만한 태도등, 좌파진영이 행해 온 일상에서의 폭력과 파괴는 좌파진영의 취향이 된 것입니다. 최근 민주당의 국회의원후보 공천과 관련하여 현역의원하위평가의 불공정성 논란도, 미시 파시즘과 관련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의정활동과 지역구관리가 우수했던 의원들이 하위 10%의 평가를 받은 것은 공천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반 페어게임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이러한 불공정성은 정당 엘리트들이 구사하는 미시파시즘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파시즘에 항거했던 좌파진영의 구성원들이 일상의 삶에서 다채로운 모습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자들의 미시파시즘의 습속이 좌파 진영의 독특한 취향으로 자리함으로써, 좌파진영의 순수성과 공동체의식이 단지 허위의식으로 판명된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민주당의 현 주류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해 북한이 체제를 유지시키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체제는 북한주민들의 파시스트적 반미민족주의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체제 유지 방식도 북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개딸이라 불리는 민주당의 근본주의 당원들이 파시스트적 행태로 민주당 주류체제를 지탱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권력과 폭력을 사랑하고 행사하는 파시스트의 전형이며, 민주당 주류의 권력유지에 기여하는 규율권력입니다. 결국 현 좌파 주류들이 권력유지를 위해 파시스트적 폭력과 권력을 행사 할지라도, 개딸· 근본주의 노조· 좌파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등 체제의 호전적 파시스트적 구성원들이 그 체제의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한,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현 좌파 체제는 –북한의 미시파시즘의 사례가 이 점을 입증하고 있듯이- 쉽사리 와해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총선도 우파정당에겐 험난한 도전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농후한 이유입니다.








[ 금융투자소득세의 문제점 ] 금투세 도입, 조세회피 가능성 높고 장기투자 유인 억제 내년 시행유보가 논의되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는 조세중립성 제고 효과와 과세제도의 단순화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조세회피가능성 △부자감세 △장기자본의 이탈 △결집효과등 완화 장치 부재 △증권거래세 폐지로 인한 주식시장 변동성 확대등의 문제점을 초래할 수 있어, 금투세의 신중한 도입이 요구된다. ◆금투세도입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들 ① 조세 회피 가능성 존재 금투세는 과세를 회피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선의의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게 될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금투세의 설계구조에서 기인한다. ◇금투세 설계구조금투세는 현행세법과 과세대상 및 세율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두 법은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를 비과세로 만든다는 입법 목표를 두고 있는데,금투세는 97.5%를 비과세대상으로 삼고 있다. 또한 현행 세법의 과세 기준인 20%, 25%(3억원을 분기점으로 하여 대주주의 1년 이상 보유시의 현행 세율)를 세율로 책정하고 있다. 둘은 단지 과세대상선정 방법 측면에서 다를 뿐이다. 현행법은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을 기본적으로 비과세로 두고, 대주주 요건을 통하여 과세대상을 선정하고


[ 기업 다각화의 장단점 ] 산업다각화와 국제다각화의 장단점은? 기업다각화는 산업다각화와 국제적 다각화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다각화는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다각화 산업다각화는 기업가치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낳습니다. ①긍정효과다각화로 인해 현금흐름 상관성이 낮을 경우, 다각화는 현금흐름의 안정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러한 현금흐름안정은 기업의 위험을 감소시켜 자본조달비용을 낮추고 부채조달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 기업이 경기변동에 대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경우, 그 기업의 수익은 시장전체의 경기변동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기업의 수익률 변동이 시장전체의 수익률 변동과 동조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이처럼 그 기업의 수익률의 변동성과 시장전체기업들의 평균수익률의 변동성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면, 이는 그 기업의 체계적 위험인 베타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의 베타가 높다면, 그 기업의 자기자본비용은 높아집니다. 또한 자기자본비용과 타인자본비용의 가중평균인 가중평균자본비용도 높아지게 됩니다. 결국 높은 자본비용은 기업 가치를 낮추게 됩니다. 기업 가치는 영업현금흐름에서 자본적 지출을 차감한 금액을 위험(재무위험과 영업위험)과 자본조달활동을 반영한 가중평균자본비용으로 할인한 금액인데, 분자인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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