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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 ] 국민에 의한 정치가 곧 민주주의가 아니다

[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 ] 국민에 의한 정치가 곧 민주주의가 아니다

◆ 민주주의 : 국민에 의한 통치, 국민을 위한 통치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1863년 케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民主主義는 대체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에 의한 정치가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없다면, 국민에 의한 정치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링컨의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구절이 민주주의의 정의를 함축한 설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국민이 지배하는 통치체제가 아닌,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따라서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정치체제를 일컫습니다. ◆ 민주주의 :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일치하는 정치체제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는 국민주권주의 관점에서 접근한 설명입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의 제1조 제2항에는 국민주권주의, 곧 민주주의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국민주권주의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유일한 통치자가 되는 원리로, 주권재민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국민이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국민인 통치자가 스스로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일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동일성 민주주의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민주권주의가 실현되는 이상적 모습은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곧 ‘동일성 민주주의’입니다. 즉 동일성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일하게 되어, 치자의 의사와 피치자의 의사가 완전히 일치하게 되는 통치체제입니다. 동일성 민주주의는 이상적 민주주의로 각광을 받습니다. 이론적으로 인간이 더 이상 타인의 의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따르게 되어, 자기지배를 통해 지배철폐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자유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자유를 꿈꾸었던 이론가들로 맑스, 레닌, 모택동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배 없는 이상적 사회의 실현을 지향하였는데, 동일성 민주주의가 이들의 이상과 유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치자와 피치자가 동일한 인민의 자기지배, 곧 동일성민주주의가 민주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동일성민주주의는 지배가 사라지는 해방적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 동일성 민주주의의 사례 :명령적 위임 현대 정치에서, 동일성 민주주의는 곧잘 발견됩니다.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의 하나인 주민 소환제가 이러한 예가 됩니다. 주민소환제는 치자의 의사와 피치자의 의사가 동일한 정치메커니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명령적 위임(imperative mandate)도 동일성 민주주의의 정치형태입니다. 명령적 위임은 대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대표들이 인민의 의사에 기속되어 그 의사를 수정 없이 실현시키는 정치구조를 말합니다. 명령적 위임의 사례는 최근 개딸(개혁의 딸)이라 불리는 민주당 강성 당원들의 정치행태에서 발견됩니다. 이들은 문자폭탄· 격렬 시위등으로 자신들의 의사가 관철되도록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의원들은 이들의 주장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정치 행태를 보이는데, 이 구조가 명령적 위임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개딸들은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일체감과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딸들이 자신들이 통치자가 된 것에 환호할 때, 그 그늘에는 부자유와 차별의 신음이 들려온다는 점입니다. ◆동일성 민주주의의 문제, 민주주의의 과잉 동일성 민주주의는 지배철폐와 해방을 강조하는 까닭에, 얼핏 느끼기에 유혹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일성 민주주의가 이론적으로 해방과 자유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에선 異見들을 평가절하하고 심지어 소수지배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이견들을 주장한 이들은 피지배자가 되어 해방아닌 억압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동일성 민주주의는 자유로움과 소유권이 부정되는 상황을 뜻하는 민주주의 과잉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발생은 다음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치자의 의사와 피치자의 일치를 뜻하는 동일성 민주주의가 현실정치에서 작동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이는 개개인의 의사가 국민의 의사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의 의사가 하나의 국민의 의사로 전환된다는 것은 국민 속에 여러 의견들과 대립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져 하나의 국민의 생각으로 변환되지 않으면, 피치자들 간에 의사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의견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일탈적 의견들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국민의 의사, 곧 지배자의 의사만이 타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사 불일치는 치자-피치자의 동일성을 훼손하게 되고, 결국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출현을 낳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는 해방을 누리지만 또 다른 일부는 구속과 억압에 놓이게 됩니다. 지배자는 치자-피치자의 일치로 인한 해방을 누리지만, 이견을 보인 자들은 치자-피치자의 동일성을 얻지 못하고, 부자유와 평등 아닌 차별을 얻게 되는 겁니다. 결국 동일성 민주주의는 승자와 패자가 구별되는,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라지는 가장된 민주주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승자와 지배자는 공동체에서 내부자인 ‘국민’으로 간주되고, 패자와 피지배자는 외부자인 ‘국민이외의 자’로 취급됩니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 국민에 의한 정치가 곧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가장된 민주주의의 실체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Totalitarian democracy)입니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지점은 누가 ‘국민’이며 누가 국민이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한국 정치 상황을 돌아보면, ‘국민’에는 좌파성향의 시민단체, 민노총등의 노조, 일부 언론노조, 일부 교원노조, 개딸등의 강성 당원등 이익집단들이 포함됩니다. 외부자인 국민이 아닌 자는 ‘국민’ 이외의 자들입니다. ‘국민’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참여민주주의로 포장합니다. 참여민주주의는 국민주권론이 실제로 작동되어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하지만 참여민주주의에선, ‘국민’이 국민일반의 의사와 이익을 억누르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확보하는 통로로 동일성 민주주의를 이용합니다. ‘국민’은 명령적 위임을 사용하여 국민의 대표자인 의원에게 이들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하도록 강요합니다. 대의민주주의 핵심인 자유 위임은 허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내부자 국민들은 피치자이면서 치자의 지위를 획득하여, 자신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합니다. 반면 국민일반은 공동체 외부자로 취급되고, 다수의 침묵하는 자들로 소외될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 정치의 상황에선, ‘국민’에 의한 정치가 민주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국민에 의한 정치가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국민’으로 취급되는 이익집단들의 의사가 국민일반의 의사로 전환되어, 이견을 주장하는 이들은 국민이외의 자로 간주되고 있어서입니다. 그렇다면, 국민일반의 정치적 목표는 본질적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위 ‘국민’들의 횡포를 막고 국민일반의 이익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회복은 국가적 권위의 회복에 있습니다. 국가의 권위보다 이익집단의 힘이 앞서는 사회에선, 이러한 가장의 민주주의가 활개 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의 회복의 출발은 국가의 정체를 다시금 확립하고 공고화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정체를 공준으로 하고, 이를 국민들이 깊이 인식할 때, 이를 바탕으로 국민을 위한 입법과 정책수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홍범도장군의 육사 흉상 이전 논쟁은 역사관의 다툼, 군의 정통성 확인의 다툼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부분적 균형분석일 뿐입니다. 일반 균형 분석은 국가의 의사결정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이익집단들로부터 국가의 권위를 되찾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이 국민일반의 이익과 후생을 증가시키게 됩니다. ) <참고문헌>김삼룡, “독일 기본법에서의 민주적 질서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 전체주의의 특성 ] 전체주의가 아름다운 유토피아 체제인가?

[ 전체주의의 특성 ] 전체주의가 아름다운 유토피아 체제인가?

전체주의는 경제적 자유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자들은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제, 물리적 테러와 폭력적인 대중캠페인을 통해 허구의 이데올로기를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심어줍니다. ◆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총체적 테러 전체주의자는 현실에서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닌 이들의 의도가 담겨진 생각을 이데올로기로 전파합니다. 그렇다보니 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바꿀 능력은 높지 않습니다. 실제적 경험에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자가 그린 목표에 맞추어 가상의 청사진이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의 이데올로기는 구성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주의 권력자는 유토피아적 그림을 구성원들에게 제시하며, 이들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 이 이데올로기라면 이들에게 직면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다는 논리적 유혹이 선전되는 겁니다. 이러한 유혹적 이데올로기가 구성원의 뇌리에 스며들기 위해, 권력자는 집단의 성원들에게 총체적 테러를 가합니다. 지속적인 대중 동원이나, 방송· 신문· 영화등 매스컴을 통해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는 테러를 감행하는 겁니다. (민주당이 과거 KBS와 MBC를 장악하여 자신의 정파적 이익에 맞는 방송사로 변모시킨 것도 이와 같은 총체적 테러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테러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 이데올로기라면, 비록 거짓일지라도, 부정적 현실을 타파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게 됩니다. 급기야 유혹적 이데올로기의 세례에 의해 참과 거짓의 판단을 포기하고, 주어진 이데올로기를 신성불가침의 진리로 추앙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지도자를 추종하고 그에게 확고한 충성심을 보입니다. (정치적 팬덤이 등장하는 배경도 이러한 이데올로기 세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팬덤 제거는 곧 이데올로기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정치적 팬덤의 존재여부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존재여부와 상관관계를 보일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러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전체주의를 대표하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대중조작의 무기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 총체적 지배 –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절대적 악으로 규정하는 이유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근본적 악으로 규정합니다. 인간이 총체적 테러에 의해 총체적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체적 지배란 인간의 개성을 동일한 하나의 인간으로 박제화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인간의 창조적 동력인 행위를 이끄는 개성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전체주의는 개인의 자발성과 개성을 파괴시킵니다. 인간의 다양성, 복수성(plurality of men)은 박제되어 모두가 하나의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획일성은 한국의 좌파 교육에서 발견됩니다. 좌파진영은 다양한 형식의 고등학교 형태를 일반고의 형태로 획일화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이 집단의 부품으로 전락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 개성의 획일화, 곧 다양한 인간이 하나(the One)처럼 만들어진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마리오네트, 곧 잉여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똑 같은 모습으로 동일화 되어,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의 개처럼 인간의 본성인 자발성· 개성· 창조성은 거세되어지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체주의는 정치적 다원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는 개인의 개성과 자발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전체주의는 복수성과 개성을 품고 있는 인간을 ‘인간의 얼굴을 한 창백한 꼭두각시 인형’으로, 또는 조건반사에 반응하는 실험 개처럼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체주의는 인간을 집단의 획일화된 부품으로 전락시켜, 인간다움을 거세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근본적 악으로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 스탈린 소련 공산주의는 전체주의. 전체주의 체제가 최초로 등장하게 된 배경은 독일 나치의 정권 장악이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권좌에 올라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행하면서 전체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렌트는 히틀러의 독일 파시즘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소련 공산주의를 전체주의 체제로 꼽습니다. 하지만 좌파진영은 스탈린 시대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전체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 등장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심화되는 과정에 나타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일부 지식인들도 소련 스탈린 공산주의를 전체주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이들은 1927년 홍범도 장군의 스탈린 공산당 가입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홍장군의 선택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을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대중정당이 정착된 국가, 또는 당시 미국의 동맹등으로 긍정적으로 언급할 뿐, 전체주의로 비판하는 논지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그 이유는 이들이 서구좌파 지식인과 동일한 관점에서 스탈린 공산주의에 대해 전체주의 적용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아렌트는 「전체주의 기원」에서 소련이 1928년 이후 총체적 지배의 상황에 놓인다고 지적합니다. 총체적 지배가 확립되기 전에 전체주의 운동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 운동은 개인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충성심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충성심은 다양성을 갖춘 인간에게 기대하기 어렵고 오직 인간이 인간마리오네트로 전락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윤선화) 따라서 1928년 이전에 이미 인간의 개성을 박탈시키는 이데올로기 테러가 펼쳐졌고 이로 인해 이미 인간의 다양성이 제거되었음이 추측 가능합니다.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볼 때,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해인 1927년에, 소련 공산당은 전체주의체제를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렌트의 분석에 의하면 소련공산당은 1928년에 총체적 지배를 구축하였는데,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1927년은 소련공산당이 전체주의를 사실상 확립한 시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아렌트의 분석에 근거하면, 좌파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스탈린 공산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은 비논리적입니다. ◆ 전체주의가 아름다운 유토피아 체제인가? 전체주의가 절대적 악인 것은 이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잉여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체주의 체제는 총체적 지배를 인간에게 행사함에 따라 인간의 다양성과 개성은 상실되어, 인간은 집단의 명령에 순종하는 인간 마리오네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는 인간의 자발성이 거세된 채 인간이 집단의 부품으로 전락되는 집단주의의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개성과 자발성이 강조되면 인간사이의 경쟁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패배자가 출현하게 됩니다. 이 때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간의 연대를 통해 이들에게 안전망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동체적 자유주의가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의의 특성은 전체주의가 다양성에 근거해서 선택될 수 있는 체제들 중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체제임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아무리 자유민주주의가 다양성과 인간의 개성을 중시한다 해도, 전체주의는 절대 악이므로 자유민주주의의 다양성 목록에 조차 오를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다운 삶이 영위되는 살기 좋은 체제는 시민들의 개성이 자유롭게 펼쳐져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체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도 인간이 자발성에 뿌리를 둔 개성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총체적 권력을 장악하여 인간을 개성을 갖지 않은 잉여적 인간으로 변질 시키는 총체적 지배를 행사할 때, 인간은 명령에 조건 반사 식으로 반응하는 실험개로 전락됩니다. 국가는 인간에게 먹이를 던져주면서, 자신들의 명령에 순응하기를 요구하는 겁니다. 이 집단주의적 전체주의체제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발성, 개성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히틀러의 지시에 저항하지 않고 가스실로 행진 해 간 수백만의 유대인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체제가 아름다운 유토피아 체제인가요? ◆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이 필요한 이유 육사 홍명도 장군 흉상의 이전 논란의 본질은 홍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가 가입한 공산당의 성격에 있습니다. 만약 1927년 홍장군이 가입한 소련 스탈린 공산당이 전체주의의 체제를 확립하였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홍장군 흉상은 논란의 여지없이 이전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이전은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육사의 교육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기초한 국가관 확립 △위국헌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함양 △첨단 군사 전문지식 습득 및 활용 능력배양 △창의적이고 통합적 문제해결 능력배양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연마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주의 개념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자유주의의 반동으로 등장한 것으로 인간의 자발성과 개성을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반면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과 창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전체주의와 대척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아렌트는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절대 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아렌트가 미국과 같은 민주 정부와 스탈린의 공산주의에게 도덕적 등가성(moral equivalency)을 부여하는 좌파 지식인들의 주장을 아렌트가 비판한 이유입니다. 또한 아렌트의 지적처럼 소련 스탈린 공산당은 1928년에 전체주의의 특징인 총체적 지배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의 설명처럼 1928년 이전에 전체주의 운동은 이미 구축 되었으므로, 소련공산당은 홍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한 1927년에 전체주의의 성격을 구비하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1927년 소련 공산 전체주의에 가입한 홍장군의 흉상이 육사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이전되는 것이 타당한 이유입니다. 안타깝게도 소련 스탈린 공산 전체주의에 가입한 홍범도장군은 전체주의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이주한 것이 아니라 이주된 것입니다. 자신의 자발성이 거세된 채, 당의 명령에 순종하는 인간 마리오네트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그릇된 신념이 낳은 후과라고 말한다면, 이는 가혹한 비판이 될까요? 홍장군의 이러한 사례는, 전체주의는 용인 가능한 체제의 하나로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근본적 악임을 다시금 알려주는 방증이 됩니다. <참고문헌>이삼성, “한나 아렌트의 인간학적 전체주의 개념과 냉전 :친화성과 긴장의 근거” 

[ 전체주의의 개념 ] 사회과학적 전체주의와 아렌트의 전체주의

[ 전체주의의 개념 ] 사회과학적 전체주의와 아렌트의 전체주의

◆ 전체주의 개념의 구분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은 정치 제도적 장치에, 또는 인간성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자의 접근은 사회과학적 개념의 전체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전체주의적 제도와 장치들의 관점에서 전체주의를 바라봅니다. 후자의 접근은 독일출신의 정치이론가인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분석과 관련된 것으로, 전체주의 지배의 결과로서 인간성 상실의 관점에서 전체주의를 이해합니다. ◆사회과학적 개념의 전체주의 ① 마르크스 접근과 사회과학적 접근 전체주의는 대체로 두 가지 접근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주의는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으로, 이들은 독일전체주의의 본질을 ‘자본주의의 최종단계’ 혹은 ‘군국주의적 제국주의’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독일의 파시즘은 전체주의로 포함되나 소련의 공산주의는 파시즘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서구좌파 지식인들도 스탈린 시대 소련에 대해 전체주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좌파진영의 주장과 달리, 전체주의는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회과학적 전체주의 관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칼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히틀러의 독일은 자본주의 보다 소련의 공산주의와 공통점이 더 많으며, 이 둘의 공통점이 전체주의적 독재라고 보았습니다. 프란트 노이만도 전체주의적 독재를 자유주의적 국가와 다원주의에 상대되는 의미로 정의했습니다. 이처럼 사회과학적 전체주의 개념은 전체주의가 자본주의 단계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다원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②사회과학적 전체주의의 요소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되는 전체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칼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공식이데올로기 존재 △경제전체에 대한 중앙집권적 국가의 통제 △모든 매스컴 수단을 거의 완벽하게 독점 △비밀경찰 테러 등을 전체주의의 특성으로 꼽았습니다. 노이만은 전체주의적 독재가 △행정권력이 언제라도 사람들의 생명, 자유, 재산에 간섭한다 △정치권력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한다 △테러에 의존한다라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종합하면, 사회과학적 전체주의는 적어도 △이데올로기의 조작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구축하기 위해 테러의 사용 △국가가 사회와 동일시 되어, 국가의 사회 통제를 특징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 아렌트의 전체주의 사회과학적 전체주의는 정치적 제도와 장치들을 본질적 요소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전체주의 개념은 전체주의 결과로서 인간학적 상실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이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의 핵심용어는 총체적 지배와 총체적 테러입니다. ①총체적 지배우선 아렌트가 언급하는 총체적 지배(total domination)의 전체주의는 철저한 지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체주의는 폭정(despotism), 전제(tyranny), 독재(dictatorship)등의 정치적 억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하 기원)에서 지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렌트는 「기원」에서 “전체주의는 단순히 인간에 대한 폭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잉여로 되는 시스템을 추구한다”라고 강조합니다. 이어 “총체적 권력은 조건반사의 세계, 즉 자발성이라곤 추후의 흔적도 없는 마리오네트의 세계에서만이 달성되고 보호된다.”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본질은 다양성과 개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총체적 지배의 본질은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복수성)과 개성을 동일한 하나의 인간으로 박제화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다 보니, 사람들은 완전히 상호대체가 가능한 존재로 변질됩니다. 결국, 전체주의의 핵심인 총체적 지배의 목표는 인간 개성(individuality)의 不容,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인간의 잉여성(superfluity of man)에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잉여성이란 인간이 마리오네트로 변질된다는 뜻입니다. 개성의 박탈은 모든 인간을 획일화시킵니다. 모든 인간이 똑 같은 성격과 모습으로 동일화되면, 인간의 개성이 상실되고 잉여성이 확립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인간의 고유본질인 창조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②총체적 테러그런데 자발성과 개성을 갖춘 인간을 잉여적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수단이 앞에서 언급된 이데올로기적 세뇌와 총체적 테러입니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하는 총체적 테러의 전형적 표현은 나치스의 집단 수용소와 소련 스탈린의 노동수용소입니다. 또한 광적인 정치적 운동도 총체적 테러의 제도적 장치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총체적 테러에 의해 “인간의 얼굴을 한 창백한 꼭두각시 인형들”로 전락됩니다. “파블로프의 실험에 쓰이는 개”처럼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지시에도 완벽하게 순종합니다. 행동은 없고 반응만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 마리오네트는 “자신에게 남은 자원을 이용해 새로운 행위를 시작하는 인간의 힘을 파괴하는 것”(기원)이므로 적극적 활동으로서 사유능력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의 질서는 다음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1)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한 총체적 설명을 규정한 이데올로기 2)총체적 테러(대중운동을 통한 끊임없는 정치 캠페인)3)인간 개성의 파괴와 인간의 잉여성 <참고문헌>이삼성, “한나 아렌트의 인간학적 전체주의 개념과 냉전”








[ 금융투자소득세의 문제점 ] 금투세 도입, 조세회피 가능성 높고 장기투자 유인 억제 내년 시행유보가 논의되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는 조세중립성 제고 효과와 과세제도의 단순화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조세회피가능성 △부자감세 △장기자본의 이탈 △결집효과등 완화 장치 부재 △증권거래세 폐지로 인한 주식시장 변동성 확대등의 문제점을 초래할 수 있어, 금투세의 신중한 도입이 요구된다. ◆금투세도입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들 ① 조세 회피 가능성 존재 금투세는 과세를 회피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선의의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게 될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금투세의 설계구조에서 기인한다. ◇금투세 설계구조금투세는 현행세법과 과세대상 및 세율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두 법은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를 비과세로 만든다는 입법 목표를 두고 있는데,금투세는 97.5%를 비과세대상으로 삼고 있다. 또한 현행 세법의 과세 기준인 20%, 25%(3억원을 분기점으로 하여 대주주의 1년 이상 보유시의 현행 세율)를 세율로 책정하고 있다. 둘은 단지 과세대상선정 방법 측면에서 다를 뿐이다. 현행법은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을 기본적으로 비과세로 두고, 대주주 요건을 통하여 과세대상을 선정하고


[ 기업 다각화의 장단점 ] 산업다각화와 국제다각화의 장단점은? 기업다각화는 산업다각화와 국제적 다각화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다각화는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다각화 산업다각화는 기업가치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낳습니다. ①긍정효과다각화로 인해 현금흐름 상관성이 낮을 경우, 다각화는 현금흐름의 안정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러한 현금흐름안정은 기업의 위험을 감소시켜 자본조달비용을 낮추고 부채조달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 기업이 경기변동에 대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경우, 그 기업의 수익은 시장전체의 경기변동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기업의 수익률 변동이 시장전체의 수익률 변동과 동조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이처럼 그 기업의 수익률의 변동성과 시장전체기업들의 평균수익률의 변동성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면, 이는 그 기업의 체계적 위험인 베타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의 베타가 높다면, 그 기업의 자기자본비용은 높아집니다. 또한 자기자본비용과 타인자본비용의 가중평균인 가중평균자본비용도 높아지게 됩니다. 결국 높은 자본비용은 기업 가치를 낮추게 됩니다. 기업 가치는 영업현금흐름에서 자본적 지출을 차감한 금액을 위험(재무위험과 영업위험)과 자본조달활동을 반영한 가중평균자본비용으로 할인한 금액인데, 분자인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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