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질과 현상 우리는 삶의 본질과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진리란 비현실적이고 막연한 관념이며, 이에 대한 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본질대신 보이는 현실인 현상을 쫓는 경향을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진리의 터 위에 서기보다 현상에 매달려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현실과 신앙은 진리의 터 위에 설 때 완전할 수 있습니다. 본질과 궁극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뿌리 없는 삶입니다. 진리를 알고 삶이 진리 위에 세워질 때, 우리는 현상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에서 상황의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는 반석위에 선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의미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1세기 후반, 85년경에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은 제4복음서라 불리워지며 공관복음서와 차이를 보입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은 같은 관점에서 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지칭합니다. 이 복음서들은 갈릴리 사역 중심, 연대기적 순서, 예수님의 공생애 동선 추적 등에서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습
강남 ‘비키니 라이딩 커플’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최근 강남 한 복판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오토바이 라이딩을 즐긴 남성과 노출이 심한 비키니 차림으로 그의 뒤에 탑승한 여성이 경범죄처벌법상 과다노출 혐의로 입건되어, 19일 경찰 소환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경찰의 입건과 조사에 대해,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습니다. 수영복이지만 중요 신체부위가 노출되지 않았는데 경찰 수사는 과하다는 지적이 있는 반면,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TPO를 어긴 것이 문제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바이크 남성은 “자유롭게 바이크를 타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과다 노출한 바이크 남녀 논란의 초점은 자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 자유란? 자유의 이해는 자유를 구성하는 요소와 이들의 관계에 대한 파악으로 시작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맥칼럼(MacCallum, Gerald C.)은 자유의 세 가지 변수로 행위자(agents), 제약조건(preventing conditions), 행위(actions)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三價관계를 통해서 자유개념을 주장
최근까지 사회정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어 왔던 주제는 기본소득이었습니다. 기본소득은 무엇보다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등 불안정한 고용 노동 상황에 놓여 있는 프레카리아트들의 삶을 개선해 보겠다는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로 논의되어 온 (좌파)기본소득의 관심은 사람들이 좀 더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는 어떠한 복지정책을 도입해야 하는가에 있기보다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노동이 자기결정권에서 벗어난 소외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분배등 핵심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 노동과 인간 소외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은 인간의 소외를 초래합니다. 인간의 소외란 ‘통제력의 상실’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이 외부세력에 의해 관계가 종속되어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노동의 소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2016년 5월 발생한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망사고입니다.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이 사례는 노동자가 기계의 방식과 속도에 종속되어, 노동과정을 통제
동아리 방에서 2학년 여자선배와 1학년 남자 후배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구조가 바뀌면 세상이 좋아질까? “누나, 그게 무슨 뜻인가요?” “M(맑스)선생 말처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나도 믿는데 정말 그럴까라는 거지?” 후배는 그 명제가 듣기에 참 멋있는 말인 것 같았지만, 선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 말뜻을 넘겨짚고 이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유약한 말씀을 하시나요?” “솔직히 말해보자. 돌 던진다고 그 짱돌이 어떻게 존재를 깰 수 있단 말이야? 우리는 존재를 바꿀 '그 무엇'이 없다는 거지. 또한 사회적 구조가 변화된다고 세상이 바뀔까?” “누나 말씀은 구조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일전에 구조결정론에 대한 예를 어떤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부르주아의 경제적 기반을 갖춘 자가 보수적인 의식을 가지게 된다.’면서 그 실례가 늑대소년이었어요. 소설 '정글북'의 모글리 같은 인간 소년이 늑대 무리의 일원으로 길러지면, 그 소년은 인간이 아닌 늑대의 습성과 의식을 지니게 된다고 말이죠. 늑대의 의식은 늑대라는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결국 누나 말씀은 구조결
현재 정의의 패러다임은 응보적 정의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다임은 국가질서에 대한 존엄에 관심을 두는 과거 회귀적 관점이며, 피해자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어 피해자의 존엄을 지켜주는 미래지향적 정의관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 응보적 정의관 정의를 이야기 할 때, 곧 잘 눈을 가린 채 저울의 균형을 유지하는 여신의 이미지가 언급됩니다. 예컨대 정당하지 못한 일을 범한 자가 사법시스템의 처벌 절차를 밟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취급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법 위반이라는 한 쪽 저울의 무게가 처벌이라는 반대쪽 저울의 무게와 균형을 이루게 된다면, 모든 사람에게 정의는 달성되는 겁니다. 이러한 정의관은 응보적 정의관이라 불립니다. 범인의 범죄의 정도는 범인에게 부과하는 고통의 정도, 예컨대 징역형의 시간에 비례될 때, 정의의 저울은 항상 균형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러다임의 정의관은 과거를 정리하는 회귀적 정의에 머물 뿐, 공동체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현행의 사법 시스템은 피해자의 회복보다 가해자에 대한 제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부과만이 정의의 저울의 균형을 이
바람직한 시민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이는 그 구성원들이 비판적, 합리적사고를 갖추고 있는 사회로,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성향을 갖추어 나와 저가 우리가 되고, 함께 더 나은 이론과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비판적 합리주의 태도와 거리를 두고 있는 문빠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폐쇄된 공동체의 모습을 띠고 있어, 구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 문빠가 지향하는 형식과 실질 널리 알려진 대로, 문빠 현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가슴에 품게 되었고, 문재인대통령과 그 정부에 대한 강한 지지로 그 죄책감을 덜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속죄의식이 문재인을 지키는 문빠현상으로 발현되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종교의 속죄의식과 같았던 문빠 현상은 문재인 정부가 강력한 적폐청산을 벌이면서, 변질되어 갑니다. 즉 문빠는 形式으로는 하늘 아래 함께 있지 못할 사이인 ‘저들’ 검찰을 완벽히 무력화시킨다는 기치를 내걸면서, 그 實質로는 ‘나들’의 울타리에 포함되어 있는 현 집권 주류 강경파의 정치 경제적 특권을 지키겠다는 뜻을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