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언적 당위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했습니다. 트루먼은 폭격명령이 정당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폭격이 전쟁을 빨리 끝내어, 아군 및 적군의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트루먼의 이 같은 생각에 반박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폭격으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이 죽도록 한 것은 살인과 다름없다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이 주장은 금기의 엄격성과 관련됩니다. 금기의 엄격성이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는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가 불가침의 규범을 거역한다면 실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가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무고한 사람을 고의적으로 살해하면 안되는 것이 이 규범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절대적 규범을 강조한 철학자는 칸트입니다.
칸트는 절대적 규범과 관련된 당위를 정언적 당위라 칭하였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ought), 해서는 안되는 일(ought not)은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과 관련됩니다.
정언명령은 가언명령으로부터 구분됩니다.
여기서 가언명령(hypothetical imperative)은 어떤 특정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해야한다는 가언적 당위와 관련됩니다. 예컨대 로스쿨에 진학하기 위해선 법학적성시험에 합격하여야 한다는 당위는 로스쿨에 입학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할 때 사라지는 의무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언명령은 특정한 욕구 바람의 유무와 무관하게 해야하는 당위와 연관된 것입니다
◆ 정언적 당위와 보편적 원칙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절대적 당위, 곧 정언적 당위는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 까요? 예를 들어 전쟁에서 민간인을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당위는 어떻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요?
정언명령에 의한 당위가 수용되는 것은 그 명령이 보편적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그 규범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되는 규범에 의거해서 행동하는 보편적 원칙은 우리 모두에게 입력되는 일종의 알고리즘입니다.
◆ 결과주의
하지만 이같은 보편적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예외를 두고 싶은 유혹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때는 보편적 행위를 위반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을 때입니다.
트루만의 폭격명령의 예처럼, 트루만이 원폭 투하를 명령한 것은 그 행위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같은 결과주의적 사고가 끔찍한 행위를 초래하게 됩니다.
원폭투하의 행위가 악한 것은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인데, 이 행위의 문제점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는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행위의 이면에 깔려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수십일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보트 안에 어린아이 한명과 서너 명의 어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먹을것이 떨어져 아사직전입니다. 그런데 저편에 구원의 배가 나타나더니, 그 배의 선장은 바다의 신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제물이 필요한데, 이 아이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허기진 어른들은 어떤 결정을 할까요?
이 아이를 죽이면, 자신들은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아이를 넘겨주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결과주의적, 전체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1할을 다른 9할의 사람들의 노예로 하는 것이 노예가 존재하지 않는 때보다도 결과적으로 사회전체의 만족도를 높이는 경우, 어떤 죄없는 흑인을 무고죄로 처벌하는 것이 흑인의 백인살해로 인해 터진 사회적 혼돈을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경우등이 결과주의적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사례들입니다.
◆ 결과주의의 극복
결과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선, 전체의 효용의 관점보다 개인의 권리를 결정의 기초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사회전체의 효용을 늘려 다수의 이익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고가 사회전반에 뿌리내릴 때, 비록 사회의 발전 속도는 굼뜰 지라도 사회는 궁극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예컨대, 개인들의 자가용 승용차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사회전체의 효용을 위해 유리할 수 있습니다. 자가용의 사용의 제한으로 인해,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의 수는 적어지고, 대기오염은 줄어들고, 에너지소비는 감소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전체의 효용이 개인의 자가용 사용으로 인한 효용의 합보다 클 지라고, 자가용 사용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제한될 수 없습니다. 개인은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도구가 아니라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은 집합적 목표추구를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되며, 목적 자체로서 취급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한국사회가 집단의 질서와 집단의 이익 지향에서 개인권 지향의 사회, 곧 개인의 창의와 존엄이 강조되는 사회로 전환될 때, 모두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는 지적은 설득력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