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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흑백 논리의 오류 ] 흑백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의대 증원은 마무리 됐거나 또는 의대 증원은 마무리되지 않았다(원점 재검토될 수 있다)’

이 選言적 판단이 생명의 안전과 결부되면서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적 판단은 ‘흑백논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흑백논리는 조정과 협상이 불가하여 사회의 기반에 균열을 낳고 통치의 권위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 극단적 일반화와 흑백논리

흑백논리, 또는 이분법적 사고는 상황의 극단적 일반화(overgeneralization)와 연결됩니다. 

아래와 같은 표현들이 극단적 일반화를 자주 사용하는 절대론자들의 표현들입니다. 

‘넌 절대로 날 이해 못해!’ 
‘완전 싫어!’ 
‘난 완전히 망했어!.’ 
‘그건 전혀 소용없어.! 

현재 상황의 정도는 극단이 아니라 중간 언저리에 위치에 있는데도, 절대론자들은 ‘절대로’, ‘완전’, ‘전혀’ ‘never’등의 부사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상황을 단정적으로  전부(all) 아니면 전무(nothing)로 접근하는 흑백논리의 전형입니다.  


◆흑백논리의 개념과 기원

극단적 일반화가 강화되면, ‘전부(all) 아니면 전무(nothing)’로 접근하는 흑백논리가 횡행합니다.  

흑백논리란 쉽게 말해서 “네가 사느냐, 내가 죽느냐 어디 한번 해보자”라는 방식의 사고를 말합니다.  
 
이와같이,  흑백논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 expression)으로 표현됩니다. 
 
“You are either for me or against me.” “Either I’am smart. or I’am dumb” “I win and you fail.”

앞의 문장들처럼, 흑백논리에는 ‘either-or’논법에 따라 ‘good or bad’, “right or wrong”, “black or white”등 양자 선택의 극단적 용어가 동원됩니다.  

흑백논리, 이분법적 사고의 진원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排中律(law of excluded middle)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배중율에 의하면, 모든 것에는 두 가능성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ither I am a success or I am a failure.
Either you love me or you don’t. 

이처럼 배중율에는 중간이 배격되어 중간가치, 제3의 가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흑백논리의 오류와 그 발생원인 : 인공적 이분법을 본원적 이분법으로 간주

흑백논리가 더욱 심각한 지점은 흑백논리의 오류에 있습니다. 

흑백논리의 오류는 양극의 명제들 사이에는 또 다른 정도의 범주들이 존재하는데도, 고집스럽게 양극에만 의존해서 판단을 내리는 오류를 말합니다.  즉 대상에 대한 판단과 관련하여, 징표들의 사이에 여러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가능성을 무시하고 양극의 징표에만 매달려 결론을 내리는 오류를 말합니다. 

흑백논리의 오류는  양분법의 인공적 이분법을 본원적 이분법으로 간주한 탓에서 발생합니다.

양분법(dichotomy)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①본원적 2분법(real dichotomy)
②인공적 2분법(artifical dichotomy)

①의 본원적 2분법은 운명적 2분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사물자체가 원초적으로 2분류된 것을 말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중간적 존재, 중간지대(middle ground)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남과 여의 구분이 그것입니다. 이 밖에 하늘과 땅, 해와 달, 남편과 아내등이  본원적 2분법에 속합니다.  이들은 반대를 이루는 한 쌍(one pair)으로 존재합니다. 

반면 ②의 인공적 2분법은 양극성을 보이지만, 이 양극사이에 중간지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명적 2분법과 구별됩니다. 

인공적 2분법에선 사람이 인공적으로, 두 양극 사이를 얼마든지 다시 세분하여, 다각화와 다단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즉 두 범주(two categories)사이에 ‘정도의 계열’(a series of gradations)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공적 양분법에 대한 예들에는 ‘좋다와 나쁘다’, ‘춥다와 덥다’, ‘길다와 짧다’. ‘높다와 얕다’등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 범주들 사이에 다양한 정도의 계열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좋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게 나쁘지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흑백논리의 오류는 양분법 중, 인공적 2분법을 본원적 2분법으로 간주하는 태도 때문에 발생하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 ‘좋거나 또는 나쁘다’라는 판단과 관련하여, 통상 그 속성이 좋거나 나쁘다라고 단정하기보다 그 극단적 징표들 사이 어느 지점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 판단입니다. 

예컨대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또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판단에 대해, 그녀의 성품은 이 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도 판단자들은 성품을 양극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속성을 양극사이의 여러 정도의 계열들의 하나로 판단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본원적 양극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경향이 높다는 겁니다. 흑백논리의 오류가, 그래서, 나타나는 겁니다. 


◆ 이분법적 사고, 양극화 

학자들은 이처럼 중간지대를 허락하지 않는 사고를  ‘이분법적 가치의 사고’(two-valued orientation)’, ‘양극화’(polarization)라고 부릅니다.  

양극화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Polarization is the tendency to divide reality into two unrealistic extremes.” 

이 개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Polarization refers to the tendency to look at the world in terms of opposites and to describe it in terms of extremes – good or bad, positive or negative, healthy or sick, intelligent or stupid, rich or poor, and so on”

이와 같은 극단적 대립의 의식이 black and white, either-or 를 초래하게 됩니다. 


◆흑백논리의 극복을 위해서  

흑백논리의 오류가 인공적 양분법을 본원적 양분법으로 간주하거나, 반대관계를 모순관계(관련기사 : <흑백논리 오류의 원인> )로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면, 이 오류의 불식은 양극의 징표사이에 여러 정도의 계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수용될 때 가능합니다.  

미국의 여성교육가인 C. Minteer는 그의 저서 “Words and What They Do to You”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 We have an infinite number of values in our world, but in our speech we tend to speak in one or two values. If we talk as if things are either black or white and tend to ignore the shades between, we are likely to have  unrealistic picture of our universe. ”

실은 흑백의 양극단 사이에는 무한한 색채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양극화가 그 사이의 음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흑백논리의 극복은 양극단 징표 사이의 중간지대를 수용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극단의 사이에 정도의 계열이 존재한다는 점이 용납되지 않는 것은 판단자들의 이익 또는  신념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의대증원을 둘러싼 의료계와 정부간의 흑백논리적 대립이 그 예입니다. 

정부는 ‘의대 증원은 마무리 됐다’고 주장하나 의료계는 ‘의대 증원은 (2025년)마무리되지 않았다(원점 재검토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객관적 판단자라면 이러한 선언적 판단 - ‘의대정원은 마무리 됐거나 또는 마무리되지 않았다’-은 극단사이의 중간지점들이 존재하는  반대관계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양극의 사이에 정도의 계열들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실제로‘ 의대증원 원점재검토’와 ‘2025년부터 5년간 의대 10,000명 증원’의 양극 사이에는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2025년 증원, 2026년 증원의 최소화, 이후 연도부터 점진적 증원 그리고 목표증원의 탄력적 조정등이라는 계열도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조정은 정부의 당초의 계획을 일부 반영하면서, 동시에 현재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원래 기대했던 바를  충족시켜주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의대증원은 불가피하다(그 정도는 협상가능해도)는 정부의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원래의 수입에 대한 기대치와 미래의 예상치 간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의사 공급 수요 시장에서, 공급곡선은 완전 비탄력적인 수직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급곡선의 완전 비탄력은 공급량이 고정되어 있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공급자들에게 기회비용을 초과하는 수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의사들은 기회비용에 해당하는 이전수입을 넘어 기회비용을 훨씬 뛰어넘는 경제적 지대들을 향유하고 있는 겁니다. 

현재의 의대생들과 전공의들은 이러한 경제지대를 기대하며 노력한 결과, 의대에 진학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교과서적으로 판단하건대, 의대증원으로 공급이 증가하면, 공급곡선은 탄력적으로 변하면서 경제적 지대가 감소하거나 기회비용수준의 수입만이 제공될 수 있습니다. 특히 봉직의라면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습니다. 

생각건대 전공의들의 파업의 원인도 이처럼 이들의 수입에 대해 과거 기대했던 바와 미래 예측간의 위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의료개혁은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원래의 기대를 최대한 충족시키면서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의정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의대증원을 둘러싼 의정갈등이 불거진 이래 지금까지, 정부와 의료계는 반대관계를 모순관계로 못박으면서 흑백논리의 양극화를 고집해 왔습니다.  

이같은 흑백논리의 오류는 이론적으로 우리 민족의 마음바닥에 깔려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조선시대의 당쟁, 일제강점기에 친일과 항일의 대립,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남북한의 대결 양상등이 의식의 양분을 초래한 탓에, 현재의 정치 문화 군사등에서 비타협적인 흑백논리가 고착화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 

이러한 적대적 양극화와 흑백논리의 불식은, 세계가 다수의 不定의 위치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에도 확실성이 아닌 변동의 편차의 위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고가 스며들 때 가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뢰, 호혜성등이 사회 전반에 활성화 될 때 뿌리깊은 흑백논리의 벽은 비로소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회적 자본이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이을환, “흑백사고와 이치논리의 일반의미론 ·전달이론상으로 본 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