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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QT

< 죽음의 극복 ①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말씀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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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라틴어 격언에 ‘dum spiro, spero’(숨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While I breathe, I hope.)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인인 키케로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이 격언은, 문장의 앞 뒤 문구를 바꾸어 표현하면, ‘희망하는 한, 우리는 숨쉬게 된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 있을 지라도 희망이 있다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다지 마음의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고통의 원인을 찾는데서 헤어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앞 뒤로 꽉 막혀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그 희망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우선 떠오릅니다.  
 

◆ 희망의 상실의 원인과 희망의 회복

희망의 회복은 무엇이 희망을 잃게 하는가에 대한 답 찾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의 원인이 환경의 압제에서 기인한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절망의 뿌리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육의 죽음과 영의 죽음으로 구별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 죽음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연적 죽음은, 창세기 3:19b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의 구절처럼,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물리적 죽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의 개념과 관련하여 희망을 이해할 때, 희망의 상실의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연관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공포와 희망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를 의미하는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과 허무를 느끼고 희망을 상실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희망을 잃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희망의 회복은 죽음에서의 해방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이라는 영적 죽음의 극복이 희망을 되찾게 하고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겁니다. 


◆ 죽음의 원인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걸까요?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걸까요? 

로마서 6:23절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이 구절은 죄 값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의미하는 죽음을 겪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죄란, 사도바울에 의하면, 악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악한 행동을 ‘어두움의 일’로 상징되는 부도덕한 행동들(롬3:12~13)과 ‘육체의 일’로 표현되는 우상숭배등(갈5:19~21)으로 정의합니다. 
 
무엇보다 잡신들과 자기자신이라는 우상에 인도되는 삶은 대표적인 악행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이 우상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악행 중의 악행으로 평가받습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악행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충실한 자녀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All those gathered here will know that it is not by sword or spear that the Lord saves; for the battle is the LORD’s, and he will give all of you into our hands.”

이처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신뢰하는 예리한 칼과 창으론, 적과 싸워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스스로 우상이 되어 이 우상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악행이 됩니다. 싸움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자신이 믿는 칼과 창으로 싸움에 나선다는 것은 인간이 삶의 주인되어 자신을 섬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러한 인간의 오만함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러한 악행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 죽음의 극복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죄를 말하는 것으로,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살아나기  위해선,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로부터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옛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아래 있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16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An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die but will have eternal life.”(NIRV)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점(16a)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인이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것(16b)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예수가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신 지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셨고, 예수의 버려짐으로 인해 우리는  버려짐(죽음)으로부터 건져올려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부활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결과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믿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선악에 따라 보상하고 응징하는 원리에 반기를 들고 그의 고통의 원인을 당장 찾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죄한 자의 고통의 의미를 賞善罰惡(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쉽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8)라고 말합니다. 

욥의 또 다른 친구 빌닷은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욥8:20)라고 욥을 비난합니다. 

욥의 친구 소발도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욥11:14~17)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과거에 범한 죄로 인해 정당한 벌로써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의 정의가 욥에게 내려졌다는 겁니다. 

이 친구들은 욥의 고통과 상황을 살피기보다 비난부터 퍼붓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사랑으로 지켜보시면서 그의 아픔에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버려짐으로부터, 곧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날 수 있게 됩니다.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통 속에서 솟아 일어나 희망의 빛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환경의 압제가 우리의 등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압제 가운데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곁엔 사랑의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아들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버려짐으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에 함께 참여하시어 나의 고통과 상처를 싸매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희망을 부여잡게 됩니다.  사망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된 우리는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Where, O death, is your sting?”(고전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