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빌론 유수
사망의 압제가 비탄과 슬픔을 자아낼 때,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마침내 죄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내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바빌론 유수>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악행(유다왕 여호와김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함)을 범한 결과, 바빌론 幽囚(바빌론 유수, Babylonian captivity, BC 586~538)를 당합니다.
바빌론 유수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2세(성경의 느부갓네살)에 멸망당하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겪은 사건을 말합니다.
바빌론에 억류된 유대인들은 조국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짓습니다.
시편 137편 1절은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By the rivers of Babylon we sat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137:1)
◆ <나부코(Nabucco)>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바빌론에 노예생활을 겪고 있는 유대인들의 회한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녹아있습니다.
나부코는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성경에는 느부갓네살로 기록된 자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나부코> 3막에 나오는 곡으로, 제목은 ‘가라, 내 마음(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시편137편을 기초로 만들어진 곡입니다.
유대인들을 노예로 끌고간 이들이 유대인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남의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137:4)라고 한탄합니다.
이처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유대인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그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가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가서 산 기슭 언덕에 앉아보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흙 냄새가 나는
조국땅 산들바람 부는 곳
요단강 둑에도 가보고
무너진 시온 탑에도 가 보라”
“예루살렘의 잔인한 운명처럼
쓰라린 비탄의 시를 노래하자
아니면 주님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어
우리의 이 고통을 견디게 하소서”
◆ 바빌론 유수의 종결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고통 속에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에스라 1:1과 1:3은 말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에스라 1:1)
“the LORD moved the heart of Cyrus king of Persia to make a proclamation throughout his realm and also to put it in writing”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1:3)
“Any of you who are his people may go to Jerusalem in Judah to rebuild this Temple of th LORD, the God of Israel, who lives in Jerusalem. And may your God be with you!”
하나님은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왕 키루스2세(성경에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유대인을 자신의 고국으로 돌려보내주십니다.
이렇게 바빌론 유수는 고레스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마침내 종결됩니다.
◆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며
아무리 잔인한 운명에 놓여 있을지라도, 쓰라린 비탄의 시를 쓸지라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긴 죄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죽음에 놓여 있는 죄인을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신실하신 존재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죄인들의 상처를 여전히 싸매시고 우리의 구원을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 고레스왕이 통치하던 페르시아와 유다는 앞의 내용처럼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바빌론 유수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영토에 위치한 나라)의 고레스왕을 감동시킨 사건이 다시 현재에 재현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