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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먼드 버크 > [ 정치사상사 ] 추상적 이성 vs 편견

< 에드먼드 버크 > [ 정치사상사 ] 추상적 이성 vs 편견

◆ 버크의 인간관 – 추상적 이성의 배격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1729~1797)는 보수주의의 鼻祖로 알려져 있는 영국출신의 정치사상가입니다. 그의 사상적 기초는 그의 인간관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적 본능적 본성에 충실한 인간관을 옹호하고, 추상적 이성에 의해 지배받는 추상적 인간관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버크는 이성을 적용범위가 제약된 불안정하고 불확신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성을 추상적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간주한 까닭에, 이성 곧 사변에 의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여러 세기를 이어 내려온 전통과 경험을 폐기하고 인간의 추상적인 이성에 호소한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회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복잡한 것인데도, 프랑스대혁명은 제한된 이성에 기댄 추상적 원칙과 가설을 내세우고 이에 따라 연역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 버크가 이상적 추상적 이론을 배격한 이유 버크가 개인의 이성적 추상적 이론을 배격한 것은 제한된 능력만을 보유한 인간 개인이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 관계하는 복잡한 사회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개인의 이성과 집단적 역사적 지혜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이라는 각 개인의 재산만으로 생활하고 교섭하게 될까 우려한다. 각 사람의 재산은 빈약한 것이어서 역사라는 보편적 금융과 자본의 혜택을 활용하면 형편이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flections on the revolutions in France) 결국 개인이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도록 한다면, 장구한 기간에 걸쳐 탁월하고 존경할 만하다고 여기는 의견은 무위로 돌아간다고 보았습니다. ◆ 버크의 편견의 옹호 이러한 추상적 이성에 대항하는 버크의 사상적 입장은 편견의 옹호입니다. 편견이란 어휘는 라틴어 ‘prae-judicium’인데, 전에 행한 결정과 경험에 기초한 판단 또는 선례를 의미합니다. 즉 편견은 개인의 이성적 사고에 회의를 품고 경험주의에 동조하여 전통의 지혜에 근거하여 합당한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버크는 편견이 이성보다 더욱 확실한 도덕적 정치적 지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편견이 지혜를 가져오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본능적 공감에 의한 모방을 통해 의견과 태도가 형성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 공감을 통하여 타인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감에 의한 모방을 통해 형성된 편견은 오랜 세월의 경험과 전통으로 축적되어, 인류가 자연적으로 형성한 집단적 지혜로 자리잡습니다. 집단적 지혜는 인류의 현명함으로 연결됩니다. 버크는 전통에 녹아있는 인류의 지혜를 강조하기 위해, 개인, 다중, 그리고 인류를 현명함의 측면에서 비교합니다. 버크는 개인은 어리석으며 그리고 다중은 신중히 행동하지 않을 경우 얼마 동안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현명하며 충분한 시간이 주어 질 경우 거의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한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편견은 본능적이고 의식적인 ‘집단적 인간지성’(collective human intellect)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편견이란 단어는 ‘인종적 편견’등에서 보이듯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편견이라는 단어를 인용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이 편견으로 매도해 버린, 많은 사람들의 의견 속에 들어 있는 잠재적 지혜에 주의를 환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편견은 정당한 편견을 말합니다. 편견이 현명하고 정당한 경우에만 인류는 그것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렇듯 편견은 이성, 이론, 추상적 사고보다 더 확실한 인류의 삶의 길잡이가 됩니다. ◆ 추성적 이성의 속박을 끊으며 “ 눈을 떴을 때 막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려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누워 있었는데, 내 사지가 각각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내 머리카락, 길고 숱이 많은 내 머리카락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묶여 있었다. 겨드랑이에서 허벅지까지 내 몸뚱이까지 가느다란 띠 몇 가닥에 묶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선을 오로지 위로만 향할 수 있었다.” (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소인국 난쟁이들이 가느다란 띠들로 자신의 몸 전체를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을 바라볼 수 없고 오로지 위만 응시할 뿐입니다. 이 풍자의 초점은 걸리버를 묶어 놓아 한 방향만 바라볼 수 밖에 없게 한 속박의 사슬이 무엇인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버크의 보수주의 사상을 이 우화에 대입해 본다면, 그 사슬은 추상적 이성이라는 굴레입니다. 추상적 이성이라는 끈이 걸리버를 묶어 놓아, 한 방향만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걸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를 둘러 볼 수 없게 됩니다. 추상적 이상이라는 끈이 자신을 묶어 놓아, 유연한 판단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재단을 연상하게 합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해 사람의 키와 침대 길이를 맞추기 위해, 침대 길이보다 큰 사람은 다리를 잘라냅니다. (제시 노먼) 그런데 이러한 프로크루스테스의 방식이 현실 문제 해결에 실제 동원된다면, 이는 혼돈과 오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오히려 맥락지향적이며 상황지향적이기 때문에, 추상적 이성에 의한 간결한 식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앞의 글은 추상적 이성에 기대어 법칙을 만들고 이를 현실의 삶에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은 오류나 논리적 실수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주어진 추상적 이성이 상황과 맥락이 얽혀져 있는 문제에 변용없이 적용되는 것은 모두를 움직이지 못하는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버크는 절대적인 추상적 이성, 원칙, 절대적 일관성등을 인간사에 응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추상적 이성은 맥락 지향적이고 상황 지향적인 삶의 문제에 접근 할 때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이러한 일관성과 추상적 이성으로 재단하려는 의지는 합리성을 벗어나게 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례가 과거 좌파정부가 추진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폐해입니다. 좌파진영의 철학은 프랑스대혁명의 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추상적 이성이 혁명과 유사한 개혁에 의해 현실의 문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실천이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추상적 이성이 명쾌하게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그 효과는 긍정적인 결과보다 국민의 고통만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좌파의 소득주도성장정책은 추상적 이성이 연역적으로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하다는 교훈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득주도성장정책의 결과를 별론으로 하고 ‘좌파가 좌파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일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좌파들은 여한이 없을 겁니다. )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보수주의 정부를 표방하는 윤석열정부가 이러한 프랑스대혁명의 이론과 유사한 방식을 현실문제 해결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버크의 보수주의를 추종한다면, 보수정부는 전통과 경험에 기반하여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여 올바른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보수주의자가 선택해야 할 적용가능한 기준은 추상적 이성이 아니라 과거부터 내려온 축적된 전통과 경험, 즉 집단적 지혜인 ‘편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수정부는 ‘보수가 보수했다’가 아니라, ‘보수가 좌파했다’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련의 사건해법에 좌파진영의 해결방식인 추상적 이성을 동원하는 모습들을 보였고, 경험, 전통, 맥락지향, 상황지향이라는 보수주의의 사상을 배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는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윤석열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6일 기준으로 4주 연속 30%대 초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버크의 사상을 윤석열 정부의 정치에 비추어 본다면, 윤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의 원인은 보수주의의 정부가 보수주의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은 점과 깊은 관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수 세력은 있으나 보수 이념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수주의의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은 보수진영이 보수주의 이념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그저 한국의 보수주의는 1980~90년대 미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와 개입주의의 외교를 지향한 신보수주의의의 아류로 이해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의 보수진영은 무엇을 保守해야 할지에 대해 천착할 때입니다. 이러한 보수의 사상이 현실문제에 적용될 때, 보수진영 더 나아가 한국의 공동체의 안정은 담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박상익, “버크의 보수주의의 사상적 기초” 제시 노먼, 홍지수 옮김,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 중보 기도 > [ 말씀 QT ] ‘한 손에 아픈 사연을 붙들고 또 다른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영혼의 구원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는 하나님과 상처 받은 영혼 사이의 단절을 이어주는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자신의 통치자, 곧 영적인 주인이 교체되는 것으로, 이전에 자신을 주관하던 것들, 곧 우상으로부터 벗어나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구원이 단순히 옛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강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유는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있어 사탄의 지속적이고 집요한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본업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불신자를 수렁 속에 빠뜨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불신자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신자는 영원히 사탄의 지배하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혼의 구원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은 구원받으려는 자를 붙들고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사탄과 영적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영혼을 잃어버린 자가 이 전쟁에서 사탄을 무찌르고 승리하게 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주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말할 것도 없이 승리의 관건은 예리한 무기를 보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올무에서 영혼을 구출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는 불신자의 의지도, 그의 선한 행위도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라는 무기는 겉으로 보기에 날 선 검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사탄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사탄의 불화살을 맞아 보기 전까지만 유효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물리치는 방안을 막9:29에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귀신을 쫒아내는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예수님은 기도만이 사탄을 쫒아 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사탄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는 인간의 의지도, 그의 선한 행위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연약하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자가,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불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이 그래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중보하다'의 일반적 개념 ‘仲保하다’(intercede)는 어원 적으로 라틴어 ‘inter’와 ‘cedere’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intercede’의 ‘inter’는 ‘between’(사이)를 의미하고 ‘cedere’는 ‘go’(가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중보하다’는 어원에 비추어 볼 때, 양쪽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서로를 연결해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intercede’의 실제 뜻풀이도 어원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Collins 사전에 의하면 ‘intercede’는 ‘to come between parties or act as mediator’를 뜻합니다. 또한 Merriam Webster 사전에 의하면 ‘intercede’는 ‘intervene between parties with a view to reconciling differences’ 즉 ‘mediate’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중보하다’는 ‘양자의 사이에 들어가다’, 또는 ‘서로 다투는 양측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사이에 개입하여 조정 중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중보기도의 특징 성경에서의 ‘중보’, 빈다는 의미를 가진 ‘도고(禱告)’의 기본적 정의도 중보의 일반적 개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보(기도)’, 곧 ‘intercession’는 중재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inter)에서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cede) 행위, 곧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는 일반적 ‘중보하다’의 개념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중보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며 특권입니다. 중보기도는 제사장적 사역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임명된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중보자가 되어 중보기도를 감당하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행해야 할 신성한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 양측의 불신으로 공동체의 안정이 흔들릴 때 양측을 신뢰관계로 연결하는 것 등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이 일을 실제로 담당하는 것은 중보기도자의 사역입니다. 둘째, 중보기도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도고하다’ ‘중보하다’는 히브리어로 ‘파가(paga)’인데, 파가는 ‘생각이 떠오르다’, ‘청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선 ‘만나다’, ‘탄원하다’란 뜻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파가’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 그분께 다른 이를 만나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헬라어의 ‘엔튀그카노’(έντυγχάνω)도 ‘도고하다’의 의미를 가지는데, ‘어떤 사람의 유익을 위해 중재한다’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2:1은 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I urge, then, first of all, that petition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be made for all people-) 이처럼 중보기도는 중재자가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즉 ‘한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그들의 유익을 위해 간청을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셋째, 중보기도를 하는 중재자는 영적 산파입니다. 중보기도는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하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차단하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존재이유입니다. 때문에 구원이 시급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그 영혼이 악한 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영혼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가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적산파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로마서8장 2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 for us through wordless groans) 성령이 연약한 영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영적 산파인 중보자는 연약한 영혼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그 영혼의 거듭남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렇게 영적 산파는 성령이 그 영혼에 임하시어 불신자가 영안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 ‘한 손에 아픈 사연을 붙들고 또 다른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깊은 밤, 적군에게 포위된 야전군으로부터 긴급구조를 요청하는 SOS의 다급한 목소리가 도중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급히 전선을 점검 하던 중 언덕 위 전선이 잘려진 것을 발견하고 연결을 시도했지만 전선은 1미터 가량이나 모자랐다. 생각다 못해 통신병은 양쪽 전선줄을 벗겨 양손으로 잡아 긴급구조 요청의 내용이 지원본부에 전달되게 한다. 이른 아침 이 통신병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망원인은 감전사로 기록이 되었다.”(이정현 「중보기도」) 독일 통신병은 이렇게 양쪽 전선줄을 잡고 처절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가 연결선이 되어, 귀한 다른 생명들을 살렸습니다. 이 예화는 단절은 곧 죽음이라는 것과, 이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기 위해 중재자의 헌신과 기도가 요구됨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중보기도의 핵심은 그 싸움이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영혼을 사로잡아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는 원수 마귀와의 싸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이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For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powers of this dark world and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이처럼 구원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하늘의 악의 영들과 맞서는 영적 전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영혼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과 대적하여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승리할 때 획득되는 것입니다. 즉 그 영혼의 영과 혼과 육을 묶고 있는 사탄의 결박이 풀리도록, 중보기도를 통해 사탄의 공격을 막고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릴 때 얻어지는 승리의 결과물입니다. 사탄은 개인, 교회, 혹은 국가가 갈등과 분열로 무너질 조짐이 보이면, 이 틈을 노리고 성벽을 공격합니다.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사탄의 이 공격을 막아내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간구하는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권능으로 사탄의 불화살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성벽을 방어하는 전사가 되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으로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어 개인과 공동체의 성벽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낙관적인 것은 우리의 승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b은 이렇게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이처럼 우리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의 공격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독일 통신병의 심정으로 ‘한 손에 아픈 사연을 붙들고 또 다른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하나님과 상처받은 영혼 사이에 끊어진 전선을 연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최종승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길이 될 것입니다.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갈등의 원인에는 상호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 불신을 틈타 하늘의 악의 세력은 성벽의 빈틈을 노리고 공동체의 성벽 전체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의료계간의 갈등은, 에베소서 6:12의 지적처럼, 혈과 육을 상대하는 다툼이 아닙니다. 이는 정부와 의료계 간의 싸움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자인 사탄을 적으로 상대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을 물리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힘으로 악의 영과 맞서 싸워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중재자로써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영적 전투에 임할 때입니다. 이 승리는 이미 주어졌다는 믿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히 이 영적전쟁에 참전 할 때, 사탄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의료분쟁에 마침표를 찍는 그 날을 맞이하게 될 것 입니다. ) <참고문헌>김한옥, “영혼구원을 위한 중보기도의 한 실례”이진, 「중보기도의 중요성과 효과적인 시행방안」, 목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공감적 보수주의 ] 공감적 보수주의의 성격

영국은 1960년대까지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일부 성과를 거두면서 모범적인 복지국가라는 칭송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영국병’(British Disease)에 걸린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로 전락하여, 1976년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 ‘대처주의’이며, 대처주의의 문제점을 수정한 정책노선이 ‘공감적 보수주의’, 또는 ‘온정적 보수주의’입니다. 공감적 보수주의는 현재 이윤율 저하와 소득 양극화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 미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 영국이 영국병에 걸린 원인 영국이 복지국가의 모범에서 IMF구제금융을 받게 된 것에는 영국병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영국병’이란 영국이 1970년대 고실업, 고물가, 강성노조, 생산성하락등으로 인해 경기침체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선 고물가가 나타난 배경에는 강성노조의 인금인상 요구가 주요 요소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5년 석탄 광업근로자들의 파업이 그 예입니다. 파업의 여파는 임금의 30% 폭등을 초래하였고 이렇게 상승한 임금이 물가를 밀어 올렸습니다. 이어서 상승한 물가가 다시 임금을 높이는 악순환이 나타남으로 인해, 영국은 ‘물가 소용돌이’에서 빠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당시 영국의 생산성이 하락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성의 상실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국가주도하의 평등주의를 지향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전 생애 복지를 실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복지정책은 높은 조세부담률과 국민의 나태를 부추기면서 근로의욕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주요산업의 국유화는 기업의 혁신과 도전이 사라짐에 따라 x-비효율을 초래하여 생산성 저하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개인이 일하지 않아도 놀고먹을 수 있게 되고, 기업은 경쟁부재로 혁신을 게을리 하게 됨에 따라, 유럽의 모범적 복지국가로 칭송받아 왔던 영국은 마침내 1976년 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1970년대 영국병에 걸린 영국의 상황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국가가 아니라 개인과 개별 기업의 창의와 도전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일깨우게 합니다. ◆ 대처주의의 등장 이러한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등장한 정치인이 대처(Margaret Thatcher)수상입니다. 히스(Ted Heath)정부(1970~74)의 교육부장관을 거쳐 1975년 보수당 대표가 된 대처는 영국병의 원인을 지나치게 커진 국가, 고세율, 개인책임의 붕괴에서 찾았습니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책임이 노동당에 있다고 본 대처는 자유시장에 입각하여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 증대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출범한 대처주의는 좌파인 노동당의 정책에도 반영되었습니다.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한 블레어의 노동당은 제3의 길을 밟으며 대처주의의 자유시장 접근법을 대체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블레어 대처주의적 경제합의(Blacherite economic consensus)’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노동당은 신대처주의에 덧붙여,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지목되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 사회복지를 강화하였습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사민주의와 대처주의를 결합한 제3의 길의 추진 덕택으로 당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지만, 보수당은 1997, 2001, 2005년 총선에서 연패하여 13년간 야당의 위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 공감적 보수주의 보수당도 연패를 끊고자 절치부심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2005년 당대표가 된 캐머런은 당을 우파에서 중도우파로 이동시키며, ‘共感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내세웁니다. 새로운 보수당은 신자유주의와 복지국가주의의 폐해를 모두 비판합니다. 즉 신자유주의는 가장 빈곤한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복지국가주의는 사람들의 국가의존성을 높이고 공동체의 상호부조를 몰아내며 개인의 근로의지를 꺾는 등, 이러한 ‘좌파의 실수들’(errors of the left)을 노출시켰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런 ‘좌파의 실수’들을 극복하고자 한 시도가 ‘공감적 보수주의’의 등장입니다. 공감적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복지국가주의의 대안으로,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강조하면서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함께 추구하는 중도우파 노선을 말합니다. 즉 공감적 보수주의의 중도우파노선은 우파의 호소력을 담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이 개인과 개별기업의 창의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감적 보수주의는 좌파적 경향도 띠고 있습니다. 대처주의의 요소인 개인주의 가치로 인한 사회적 분열을 완화하기 위해 좌파의 전유물로 간주되는 공정과 사회적 정의를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감적 보수주의는 경제성장 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에도 중점을 두고 있는 중도우파적 요소를 품고 있었습니다. 공감적 보수주의는 사회적 정의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큰 사회론’을 제시하였습니다. 큰 사회론에선 공동체 구성원 간의 연대가 강조됩니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개인(능동적 시민)· 기업· 자선단체등이 주도적으로 빈곤해소, 사회적 문제 해결에 힘쓰며, 국가는 이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는 ‘환경조성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공감적 보수주의는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을 기초로 미래를 지향하며, 동시에 공동체의 조화와 연대를 통해 과거의 사회병폐를 해소하고자 하는 과거 반성적 성격을 가집니다. 결국 캐머런의 영국보수당은 무능한 우파정당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사회정의라는 목표를 함께 지향하는 미래지향적인 정당, 유능한 중도우파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공감적 보수주의 vs 전체주의적 집단주의 현재 한국은 두 가지 난제, 즉 경제 측면에서 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사회 측면에서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국면에서, 경제성장과 사회정의를 동시에 지향하는 캐머런의 공감적 보수주의는 한국사회의 이 난제들을 타개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지속적인 이윤율의 저하는 개인의 창의와 기업의 혁신을 통해 극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국가가 개인에게 돈을 풀어 승수효과로 인해 총수요를 늘리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장기성장을 추동한다는, 민주당이 수시로 주장하는 단기 정책은 궁극적으로 이윤율 저하를 막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국가는 경제의 주체라기보다 개인과 기업의 역량을 강화 축적하는데 기여하는 환경적 조성자입니다. 국가는 개인과 기업의 역량 강화을 위한 재정적 제도적 뒷받침을 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사회측면에서 양극화는 공동체적 연대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능동적 시민, 기업, 자선단체들이 공동체 구성원간의 조화에 힘쓸 때, 사회적 분열은 완화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개인의 창의와 공동체 구성원간의 연대를 추구하는 공감적 보수주의는 현재 한국 보수정당의 지향점과 유사합니다. 윤석열정부와 집권여당이 추진하는 돌봄학교,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무상교육은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조화를 추동하는 정의로운 정책으로 이해되어집니다. 또한 윤석열 정부와 집권여당인 국민의 힘이 추진하는 의료개혁도 사회적 정의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사회 정책입니다. 지역의료와 수도권의료의 격차를 해소한다는 취지하에서 이루어지는 의료개혁은 사회정의에 부합되는 시의적절한 정책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현재 의료개혁의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의사들을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의료개혁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의료개혁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들은 개인의 자유와 공정성에 특히 민감한 집단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의사들의 이러한 공정성의 강조는 의외로 의료개혁의 소용돌이를 쉽게 끝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협의체를 통한 공정한 의대증원이 마련된다면, 자유주의와 공정성을 추구하는 의사들도 의료개혁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의사들이 추구하는 공정성은 윤석열 정부의 모토인 공정성과도 괴리되지않는 것으로, 양측의 공정의 의지는 의료개혁에 대한 낙관적인 해법을 도출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정부는 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타도되고 끌어내려야 할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윤석열정부와 집권여당이 한국판 공감적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윤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와 기업의 창의를 북돋는 정책을 제공하고 있으며, 동시에 공동체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정책을 마련하는 등, 신자유주의와 복지국가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는 공감적 보수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겁니다. 반면 범야권은 공감적 보수주의와 역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의 역량과 기업의 창의를 북돋는 대신, 국가가 경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류에 젖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가 이전지출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돈을 뿌려준다면, 경제는 선순환이 된다는 천진난만한 환상에 빠져 있는 겁니다. 이런 좌파진영의 단순한 사고로 인해 국민은 대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과거 몇 년간 좌파정부는 헬리콥터에서 돈 뿌리듯 현금을 살포한 결과, 물가 폭등 → 금리 폭등 →경기침체를 야기 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윤석열정부를 경제폭망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민주당의 선거전략은 국민이 바보라는 사고가 깔려있지 않는 한 행해질 수 없는 전략입니다. 국민들은 현재 경기침체가 민주당 정부가 초래한 물가폭등과 금리인상에 기인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물가는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재해로 인한 농산물가격의 폭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그리고 농산물물가를 제외한 물가는 높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현정부가 경제에 무능하다는 흑색선전을 펼치는 데에는 국민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대중이므로 이러한 마타도어에 속아 넘어 갈 수 있다는 착각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민주당의 국민에 대한 교만함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 결국 한국의 현재의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은 공감적 보수주의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즉 개인과 기업의 창의를 북돋아 이윤율 저하를 막고, 동시에 공동체의 분열을 통합으로 전환시키는 정의로운 사회정책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이에 역행하는 시도들은 진보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후퇴시키며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것임을 사회주의 추구세력과 전체주의적 집단주의 세력들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홍석민, “D. 캐머런의 큰 사회론과 영국 보수주의의 정치적 이미지 변화”








[ 국토 보유세와 기업의 세부담 ] 국토보유세 무엇이 문제인가? 4월10일에 실시되는 총선에서, 범야권이 국회 200석이상을 획득할 경우 적극적으로 추진 할 가능성이 높은 입법이 국토보유세의 도입일 것으로 예측됩니다. 국토보유세 입법은 이재명대표가 경기도지사시절부터 주장했던 입법이며, 용혜인 의원이 소속해 있는 정당이 기본소득추진의 일환으로 주장하고 있는 정책입니다. 국토보유세 도입의 문제는 모든 자가가구의 보유세부담이 증가하고 보유세가 임차인에게 전가된다는 점에 그치지 않습니다. 국토보유세는 토지의 용도별 차등 과세와 비과세·감면을 폐지함에 따라 법인의세부담이 많이 증가하게 됩니다. 법인의 토지 소유면적(평균 1만 8천㎡)은 평균적으로 개인의 84.3배인데, 규모가 큰 대기업 집단은 대부분 국토보유세 최고세율(2.5%)의 적용을 받으며, 이로 인해 세부담은 현행 대비 12.5배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박상수) 특히 토지 용도별 차등과세 폐지 시 사업특성 상 대규모 토지의 사용이 불가피한 물류창고, 공장, 농업법인 등에서 세부담이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이처럼 국토보유세의 입법은 대규모 기업 등 법인의 세부담이 큰 폭으로 늘어남으로써 경제 전반에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법인의 세부담 급


[ 기업 다각화의 장단점 ] 산업다각화와 국제다각화의 장단점은? 기업다각화는 산업다각화와 국제적 다각화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다각화는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다각화 산업다각화는 기업가치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낳습니다. ①긍정효과다각화로 인해 현금흐름 상관성이 낮을 경우, 다각화는 현금흐름의 안정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러한 현금흐름안정은 기업의 위험을 감소시켜 자본조달비용을 낮추고 부채조달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 기업이 경기변동에 대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경우, 그 기업의 수익은 시장전체의 경기변동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기업의 수익률 변동이 시장전체의 수익률 변동과 동조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이처럼 그 기업의 수익률의 변동성과 시장전체기업들의 평균수익률의 변동성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면, 이는 그 기업의 체계적 위험인 베타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의 베타가 높다면, 그 기업의 자기자본비용은 높아집니다. 또한 자기자본비용과 타인자본비용의 가중평균인 가중평균자본비용도 높아지게 됩니다. 결국 높은 자본비용은 기업 가치를 낮추게 됩니다. 기업 가치는 영업현금흐름에서 자본적 지출을 차감한 금액을 위험(재무위험과 영업위험)과 자본조달활동을 반영한 가중평균자본비용으로 할인한 금액인데, 분자인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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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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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 기도 > [ 말씀 QT ] ‘한 손에 아픈 사연을 붙들고 또 다른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영혼의 구원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는 하나님과 상처 받은 영혼 사이의 단절을 이어주는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자신의 통치자, 곧 영적인 주인이 교체되는 것으로, 이전에 자신을 주관하던 것들, 곧 우상으로부터 벗어나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구원이 단순히 옛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강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유는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있어 사탄의 지속적이고 집요한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본업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불신자를 수렁 속에 빠뜨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불신자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신자는 영원히 사탄의 지배하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혼의 구원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은 구원받으려는 자를 붙들고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사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