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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 > [ 말씀 QT ] 의지의 방향을 전환시키며 (고후 5:17)

신약 성경에는 ‘εν χριστω’(엔 크리스토), 곧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어구가 자주 발견됩니다. 특히 바울서신에 약 181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에 나오는 비중이 큰 만큼, ‘엔 크리스토’는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in Christ’를 기록하고 있는 대표적 구절이 고린도 후서 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the new creation has come. The old has gone, the new is here.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새 피조물, a new creation, καινή κτίσις (카이네 크티시스)로 정의합니다. 새 피조물이란 인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의 중심을 전환시킨 자를 일컫습니다. 즉 의지의 방향을 전환시킨 자가 새 창조물입니다. 자기자랑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전향한 새 피조물이 하나님의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vs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특성을 가집니다. 무엇보다 이 둘은 ‘의지의 방향’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자기자랑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향해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우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 있어 의지의 방향은 ‘자기자랑’입니다. 자기자랑이란 유대인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는 것과 관련됩니다. 이 의미를 확장하여,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처분가능하다는 인간의 자주성, 그 결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교만함등이 자기자랑에 포함됩니다. 인간의 자주성과 교만함은 육적인 삶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여기서 육이란 인간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실존을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자기의지에 의한 통치를 신뢰하는 자로, 의지 곧 에너지를 자기자랑을 향해 쏟고 있습니다. ②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반면 엔 크리스토에 있는 자에게 있어 의지의 방향은 자기자랑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러한 순종은 우선 자신의 의지인 자기 에너지를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한 자기지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대체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자의 의지의 방향인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터 잡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후반절은 말합니다.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신뢰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자신의 근심과 힘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 등이 순종을 이끄는 힘이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처분가능하다는 인간의 자주성과 자기자랑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교만함을 내려놓는 자입니다. 이러한 의지의 방향의 전환으로, 자기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에 순종하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새 피조물 ( καινή κτίσις 카이네 크티시스)과 회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입니다. (고후5:17) 이 구절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in Christ’ ‘εν χριστω’(엔 크리스토)에서. ‘엔’은 장소의 ‘in’을 의미하지 않고 ‘도구’ ‘대리자’라는 뜻으로, ‘~에 의하여’ ‘~의 중개로’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중개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비추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롭게 창조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새롭게 됨의 전제조건은 ‘엔 크리스토’입니다. 인간이 새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의 의미는 자기이해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기이해가 이전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자기 이해가 자신이 삶의 주인이며 힘의 창조자라는 인식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새로운 자기이해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인식과 연관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즉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진다는 오만의 잘못을 회개할 때, 의지의 방향이 전환되는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됩니다. 이 회개를 바탕으로 인간이 영의 지배하에 놓여 질 수 있습니다. 이 회개의 결과는 생명과 평안의 회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갈2: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됩니다.(고전7:2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키십니다.(빌4: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얻습니다.(엡1: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갈3:26).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합니다.(고후2:14)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합니다.(빌3:1)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소유합니다.(빌4:13) 그리스도 안에서 튼튼히 서게 됩니다.(살전3:8))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하게 됩니다.(몬1:8)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가 됩니다.(엡1:12) 결국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까지 자신을 지배해 왔던 자기 의지의 통치를 끝내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실존을 말합니다. 자기자랑의 소욕에 빠져있는 이전 것을 끊어내고,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자기이해를 터 잡아 영의 지배하에 있는 새것으로 거듭나는 실존을 뜻합니다. 이러한 실존의 전환은 자신이 스스로 창조자로 살았다는 잘못을 회개하고, 이러한 회개를 기초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자기이해를 통해 가능합니다. ◆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증거인가, 결단과 관련하여 엔 크리스토와 관련된 또 다른 질문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근거로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결정의 척도를 무엇으로 삼는가에 의해 파악될 수 있습니다. 척도라는 말은 대안 의사결정시에 사용되는 기준을 말합니다. 우선 자기의지에 지배되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세상의 질서와 자기지혜를 결정의 척도로 사용합니다. 자신의 사고와 세상의 법칙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판단하는 겁니다. 자기지혜가 결정의 우선 기준인 탓에, 하나님은 인간의 사유와 언어에 갇히는 존재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 율법을 따지는 하나님, 나의 삶에 무관심한 하나님, 나의 신음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전락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있어 판단의 척도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고후5:16)(새번역)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NLT) 이 구절은 신자가 세상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평가하지 않고, 새로운 척도로 살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드러냅니다. 이 결단은 자기의 의지로부터 그리스도의 지혜로의 전향입니다. 이 결단을 거쳐 의지의 방향의 전환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신앙의 결단이란 자기 지혜라는 가치 표준을 허물고, 오로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가치평가기준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로운 척도로 받아들이는, 전향을 위한 결단을 말합니다. 결국 신자가 자기의 지혜와 세상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척도로 살아간다면,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는가? 엔 크리스토와 관련되어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신자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나의 육적인 지혜를 끊고 그리스도의 지혜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전 것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로마서 8:9는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You, however, are not in the realm of the flesh but are in the realm of the Spirit, if indeed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 And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rit of Christ, they do not belong to Christ.” 이 구절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육에 속하지 않고 영의 세계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And because you belong to him, the power of the life-giving Spirit has freed you from the power of sin that leads to death.(NLT) 이 구절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존재는 성령이며,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새롭게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성취됩니다. 디도서 3:5도 성령이 거듭나게 하시는 영이심을 강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였으니”“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NIV) 이 구절은 성령 안에서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을 통해 새롭게 창조됩니다. 결국 말씀 묵상과 이에 기초한 기도를 통해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어 이전 것을 몰아내고 새것을 얻게 됩니다. ◆ 의지의 방향을 전환시키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의지의 방향을 전환시킨 자입니다. 자기 자랑을 의지의 방향으로 삼고 있던 자가 이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지혜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자입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새로운 피조물은 세상의 질서를 따른 잘못을 회개한 자입니다. 자기자랑의 잘못을 회개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에 기초하여, 자기의지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의 순종으로 전향한 자입니다. 이러한 전향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의지의 방향의 전환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새 피조물(카이네 크티시스)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영적인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새 사람은 자기자랑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옛사람이 질적으로 변화되어, 말씀의 지배 곧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의 전환은 의지의 방향이 전향되는 것을 말합니다. 의지의 방향이 자기자랑에서 그리스의 말씀으로의 순종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 결과 새 피조물은 자기자랑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You, however, are not in the realm of the flesh but are in the realm of the Spirit, if indeed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롬8:9a) <참고문헌>윤창우,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 협성대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 혐오주의 정치 ]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기 위해

[ 혐오주의 정치 ]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기 위해

정치의 공간은 피상적으로 책략과 다툼의 공간으로 비칩니다. 그런데 정치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현실’과 ‘의미’의 간극에서 서로 밀거나 당기는 변증법의 과정이 벌어지는 곳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정치란 정치 행위자들이 각자 신봉하는 신의 ‘의미’를 ‘현실’에서 이루기 위한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 서서 정치를 이해할 때, 베버의 통찰을 원용한다면, 정치는 현실을 의미로 착각하는 신비주의정치와 현실과 의미사이를 좁히고자 하는 금욕주의 정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공간에서 부각되는 문제의 하나는, 특히 증오와 혐오의 현실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신비주의자들이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구축 확산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조화를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러한 혐오의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원칙의 정치행위자들과 유권자들의 몫으로 남습니다. ◆ 신비주의 종교 vs 금욕주의 종교 (박영신) 베버에 의하면 삶의 의미지향성의 기초를 마련해주는 것은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삶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가에 따라, 삶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의 의미가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버는 종교를 금욕주의 종교와 신비주의 종교라는 두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금욕주의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고 현실의 잘못을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신의 도구인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고자합니다. 잘못된 현실과 신의 뜻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현실의 오류를 수정하는 겁니다. 반면 신비주의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진실로 인정하는 현실긍정론을 말합니다. 즉 인간은 현실체제에서 발생하는 잘못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과 조화롭게 어울리고자 합니다. ◆ 신비주의 정치행위자 vs 금욕주의 정치행위자(박영신) 이처럼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삶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현실부정과 현실긍정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잘못된 현실과 신의 뜻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자하는 금욕주의 종교에 대해, 신비주의종교는 그 현실을 그대로 지켜가고자 합니다. 정치의 공간도 이러한 두 종교의 현실인식 관점에 따라 작동되고 있습니다. 정치의 공간은 ‘현실’과 ‘의미’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인데, 정치는 이 두 수준 사이에서 벌어지는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집합목표(의미)를 겨냥하는 행위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목표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의 오류를 부정· 수정하는 부류이며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의 오류를 긍정 강화하고자 하는 부류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행위자 마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자의 삶의 의미 지향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신비주의 정치 행위자는 현실의 가치를 긍정합니다. 이들은 그의 종교를 관장하는 신의 뜻, 곧 의미지향이 곧 현실의 가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치행위자는 그 현실을 수용하고 강화하는 시도를 행합니다. 반면 금욕주의 정치 행위자는 현실의 잘못된 가치를 부정합니다. 이들은 그가 믿는 신의 뜻이 현실의 가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정치행위자는 그 현실의 오류를 수정하여 현실을 의미와 일치시키고자 합니다. 결국 현실적응의 신비주의 정치행위자들은 그 현실이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는 반면, 현실부정의 금욕주의 정치행위자들은 그 현실이 진리를 배반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현실주의 정치, 증오의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 정치공간에서 의미와 현실간의 거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정치의 행위가 달라진다면, 우리 정치가 추구해야 할 지향성은 현실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하는 진리추구의 정치가 되어야 하고, 현실주의 정치는 배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진리추구의 정치행위자들은 주어진 현실체제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그 흐름을 과감히 거스르며 신의 의미와 현실의 간극을 좁혀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모험가는 ‘원칙의 사람’으로 불립니다. 반면 신비주의 정치행위자들, 곧 현실주의 정치행위자들은 현실체제의 질서에 순응하는 ‘얕은 정치’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현실체제에 적당히 편입해가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사로운 목적을 추구함에 따라 공공 영역을 약화시킵니다. (박영신) 이러한 얕은 정치에는 증오와 혐오를 확산시키는 정치가 포함됩니다. 집단의식의 표출인 증오와 혐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닌, 훈련받고 양성된 집단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카롤린 엠케) 이러한 집단의 혐오 이데올로기는 신비주의 정치가들이 자기 충족적 확신(self sufficient belief)에 사로잡혀 혐오를 의미지향으로 확신함에 따라 형성되고 확산되어 갑니다. 예컨대 반페미니스트들과 반PC주의자들은 집단의 구심점이 되는 리더를 세우고 제도권 안에서 공적 집단을 창설하여 집단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이 집단의 궁극적 목표란, 개혁의 정책들을 그럴듯하게 피상적으로 제시하지만, 본질적으로 집단의 정체성인 여성· 장애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터 잡아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의 전략은 모순적입니다. 개혁과 증오는 마이너스 상관관계에 놓여있는데도, 이 집단은 혐오의 확산을 위해 개혁을 부르짖는 모순적 정책을 제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의 추구는 공동체에 카오스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의 혐오주의가 공감과 관용이 들어설 자리를 빼앗고 미러링이나 집단적 백래쉬현상을 초래하여, 공동체의 ‘갈라치기’를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갈라치기의 대표적 실례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이는 젠더 갈라치기의 전형적인 사례로, 표를 위해 공동체를 쪼개는 얕은 술수로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현실주의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결과가 긍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직전 대선의 방송3사출구조사에서 윤석열 후보는 20대 남성의 58.7%의 지지를 획득하였고, 이재명후보는 20대여성의 58.0%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여성가족부폐지라는 공약이 20대여성의 민주당 지지로의 이탈과 20대남성의 국민의힘 지지로의 흡수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데, 직관적으로 그 이탈과 흡수의 변량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약이 실제로 윤석열후보의 표를 증가시켰다는 실질적 증거를 찾기 힘든 이유입니다. 오히려 여성가족부폐지 정책은 이후 윤대통령의 국정운영의 골칫거리가 되었으며, 현재도 국민의힘이 중도 포지셔닝으로 안착하는데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대통령이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 그 이념화의 단초는 사실상 여성가족부폐지의 공약에서 발견됩니다. 이 시점에서도, 혐오이데올로그들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대통령을 이념에 매몰되어 있는 자로 비난하는 신기하고 웃기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 결국 현실주의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는 현실주의 정치행위자들이 혐오와 증오등 현실의 오류를 ‘의미’로 확신하여, 그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동시에 공공의 안녕을 해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간의 조화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기 위해 이처럼 한국 정치의 공간에서 정치행위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미’는 개인의 창의성과 공공성의 강화를 통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조화에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속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정치행위자들과 유권자들의 몫입니다. 정치행위자들은 현실체제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혐오와 증오주의를 씻어내어, ‘현실’을 개인의 창의와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해를 추구하는 ‘의미’로 변질시켜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혐오를 배제하는 결정적인 힘은 유권자들에게 있습니다. 혐오이데올로그들이 한국 정치의 공간에 똬리를 트는 시도를 막는 힘은 국민들이 투표로 혐오주의의 집단의 싹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때 유럽과 미국에서 활개치고 있는 극우성향 정당이 한국의 정치 공간에서 발붙일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진실된 정치행위자들, 곧 ‘원칙의 사람’들이 신의 의미와 현실의 거리를 좁혀가며, 또한 유권자들이 공동체의 조화를 바라며 투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때, 헌법 10조가 꿈꾸는 ‘모두가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누리는 현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고문헌>박영신,“우리에게 정치는 무엇인가”카롤린 엠케, 정지인 옮김, 「혐오사회」

[ 자연실업률가설과 스태그플레이션 ] 정부의 인내와 국민의 참을성이 물가를 낮추고 경기를 회복하게 되는 지름길

[ 자연실업률가설과 스태그플레이션 ] 정부의 인내와 국민의 참을성이 물가를 낮추고 경기를 회복하게 되는 지름길

물가가 여전히 높고 경기가 침체된 경제 상태에서, 정부당국은 조기에 경기침체를 벗어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때 정부의 총수요자극책은 자칫하면 물가를 더욱 밀어올리고 경기침체를 지속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즉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정부당국이 물가가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경기부양책에 나서게 되면, 경제는 오히려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정부의 인내와 국민의 참을성이 경제를 회복시키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프리드만(Friedman)과 펠프스(Phelphs)가 제시한 ‘자연실업률가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 자연실업률가설에서의 스태그플레이션 주지하듯이 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정체에 의한 낮은 성장률 (높은 실업률)이 나타남과 동시에 소비자 물가지수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제상태의 통념에 의하면, 인플레이션과 불황은 trade-off현상으로, 이 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개의 정책 목표는 동시에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오일 쇼크 발발이후, 인플레이션과 낮은 성장률이 동시에 발생하였습니다. 경제성장과 물가가 역trade-off관계에 있는 경제상태가 나타난 겁니다. 이러한 스태그플레이션은 자연실업률의 고리 순환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 순환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실업률 상태(A점) → 정부지출증가에 의한 물가상승과 실업률 감소(B점) → 노동자의 물가오인의 해소에 의해 기대물가의 상승과 자연실업률로의 회귀(C점) → 정부의 총수요억제책으로 물가하락과 실업률 증가(D점) → 지속적인 총수요억제로 물가하락과 자연실업률로의 회귀(A점) 」 그런데 이러한 loop에서 D점이 A점으로 떨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가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발생한 것은 정부가 D점에서 성급하게 총수요자극책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 (참고)정부지출증가로 물가상승, 실업률 감소 : 필립스곡선의 A점 → B점 현재, 경제상태는 A점에 있습니다. 즉 인플레이션은 0이며 실업률은 자연실업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실업률을 낮출 목적으로 정부지출을 증가시켰습니다. 이 때 총수요곡선은 상승이동(xx → ẋẋ)하게 됩니다. 이 같은 총수요의 증가는 생산물가격을 상승시키게 됩니다. 생산물가격은 올랐지만 명목임금은 아직 상승하지 않아, 명목임금을 생산물가격으로 나눈 실질임금은 하락하게 됩니다. 여기서 실질임금 하락이 경제에서 중요한 이유는 노동시장의 수요·공급은 명목임금이 아니라 실질임금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즉 실질임금의 하락은 노동수요의 증가, 노동공급의 감소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기업과 노동자는 실질임금의 하락에 대해 반응 정도를 달리합니다. 이점이 경제 상태의 변동을 초래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우선 기업은 물가상승에 즉각 반응합니다. 기업은 실질임금의 하락에 따라 고용을 늘리고 생산량을 증가시키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실업이 감소하고 국민소득이 증가합니다. 기업의 대응과 달리, 노동자는 물가를 오인합니다. 총수요의 상승으로 물가가 올랐지만, 이는 자기기업의 생산물가격이 증가했을 뿐, 일반물가는 상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따라서 실질임금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기업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의 물가오인으로, 경제는 필립스곡선의 A점에서 B점으로 선상이동하게 됩니다. ◆ (참고)자연실업률로의 회귀 : B점 → C점 경제가 B점에 머무는 동안, 노동자도 실질임금이 하락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명목임금의 인상을 요구하게 되고 기업은 물가상승만큼의 명목임금을 상승시킵니다. 명목임금의 상승과 이미 상승한 물가상승의 영향에 따라, 실질임금은 원래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즉 실질임금의 하락은 노동수요의 감소와 실업률을 증가시켜 실업률도 원래의 균형점으로 돌아갑니다. 필립스곡선도 상향이동하게 됩니다. B점에서의 인플레이션율 만큼 명목임금이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요곡선과 필립스곡선이 교차하는 지점 Ɓ에는 명목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만큼 상승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명목임금은 계속 상승하고 필립스곡선도 상승이동을 계속합니다. 결국 필립스곡선은 총수요곡선과 일치하는 새로운 균형점 C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C점은 기대물가상승률만큼 명목임금이 상승한 지점으로 실질임금이 과거와 같이 유지되는 지점입니다. 따라서 정부당국의 정부지출에 의해 실업을 줄이고 국민소득을 늘리고자 하는 시도는 장기적으로 기대물가의 상승과 실업률의 균형실업률로의 회귀로 마무리 됩니다. 다시 말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는 A점에서 C점으로 이동했는데, 실업률은 불변이고 물가만 상승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대인플레이션율과 명목임금상승률이 일치하고 있을 때의 실업률, 즉 A점과 C점에서의 실업률을 자연실업률이라고 합니다. 자연실업률은 다양한 정의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자연실업률 수준에서는 노동시장이 균형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자연실업률은 균형실업률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자연실업률은 △마찰적 실업만 존재할 때의 실업률 △물가상승률이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수준의 실업률 (NAIRU: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 △잠재GDP수준에서의 실업률로 정의내릴 수도 있습니다. ◆ 정부의 물가하락을 위한 총수요억제 : C점 → D점 정부당국은 C점의 물가가 높다고 판단하여 물가를 끌어내리고자 합니다. 즉 총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이번에는 통화당국이 통화공급을 줄여 금리가 상승합니다. 이러한 금리 상승은 투자감소, 소비감소를 가져오게 되어 총수요감소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총수요곡선이 아래로 이동(ẋẋ →xx)하게 되고, 경제는 D점에 머물게 됩니다. D점에서는 실업률은 자연실업률보다 높아지고, 물가는 C점보다 하락하게 됩니다. 실업률이 증가하는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요의 억제로 물가상승이 저하되지만 명목임금의 상승률은 여전히 높습니다. 이에 따라 실질임금이 높아지게되어 이윤이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실업률은 상승하게 됩니다. 결국 물가를 낮추기 위해선 경제주체들의 고통이 요구됩니다. ◆ 물가가 높고 경기침체인 상태에서 경제가 자연실업률로 회귀하지 못하는 이유 경제는 원래의 자연실업률로 회귀되지 않고 D점에 머무는 경향이 높습니다. D점은 여전히 물가가 높고, 실업률은 자연실업률보다 높은 지점입니다. 그런데 경제는 하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 지점에서 지속될 수 있습니다. 경제가 이처럼 균형점으로 회귀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물가의 하방경직성 때문입니다. 이는 기업들의 독과점적 이유에 의한 것,그리고 시장구조의 특성 때문입니다. 독과점이 생산물가격의 하락을 저지하고 있기에, 물가가 하방경직성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독과점, 카르텔이 혁파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데도 한국 좌파진영은 정부가 카르텔척결을 말하면, 또 카르텔 운운하냐며 투덜댑니다. 역시 ‘경제는 우파가 잘 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둘째는 임금상승률의 하방경직성 때문입니다. 파업등 노조의 실력행사로, 명목임금이 낮아지지 않고 하방 경직되면 실질임금이 여전히 높게 됩니다. 따라서 노동수요가 늘지 않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게 됩니다. 이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들은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입니다. 노동시장의 내부자 곧 노조 구성원들은 소득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지만,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은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의 길을 영영 찾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 게다가 민노총등 노조들은 현재 노란봉투법의 입법을 요구하고 좌파정당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실제로 입법을 강행할 태세입니다. 이는 노조들과 좌파정당들의 철저한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노조가 내부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잠재적 노동자들의 노동시장의 진입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 개혁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노조의 슬로건은 아마도 다음으로 추정됩니다. 'I will live alone, not together') 셋째는 실업률은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는 일부 정파의 생각 때문입니다. 이 정파들은 인플레이션 상승을 허용하면 실업률은 제한 없이 낮출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경기침체를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서 확장적 경기자극책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히려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정부당국은 A → B →C→ D→ A의 고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D지점에서 한 정파, 예컨대 국회의석 다수를 차지하는 좌파정당이 경기자극책을 강조하여 국민에게 돈을 뿌린다면, 이 자극은 실업률의 감소와 물가의 상승으로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물가상승에 먹혀버리게 됩니다. 그 결과 경제는 물가 하락, 실업률 하락이라는 A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 정파가 국회를 장악하게 되면 국가의 경제는 엉망이 되어 국민의 삶은 더욱 고단해집니다. ( 생각건대 좌파진영이 내년 총선에서 200석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좌파정당들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현 우파정당 정치인들의 탐욕적 헤게모니 다툼이 이러한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국민의 후생을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후생만 생각하니, 우파정당이 내년 총선에서 100석 이하로 쪼그라들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만약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의 본령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좌파가 실제로 국회를 장악하게 된다면, 세상은 노조에 가입한 자들과 이들의 이익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시민단체들만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헤게모니 싸움을 한 우파 정치인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며, 이러한 정치낭인들은 여의도를 영원히 떠나야 할 것입니다. ) ◆ 스태그플레이션의 예방책 경제가 D점에 머무를 때, 즉 높은 물가와 경기 침체가 지속될 때, 정부가 우선적으로 주의해 야 할 점은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예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정부가 스태그플레이션을 예방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의 가속화를 막는 것입니다. 정부가 취해야 하는 인플레이션의 예방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자연 실업률을 넘어서까지 실업률을 저하시키는 경기자극책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②재정적자를 불러일으키는 과도한 화폐공급을 억제해야 합니다. 예컨대 정부가 지출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그 국채를 매입하면 통화량이 증가합니다. 이러한 재정적자는 억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③ 현재의 디플레 효과를 조기에 경기자극책으로 상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인플레이션 예상이 진정되고 난 후, 경기부양책을 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성장률과 잠재성장률이 각각 1.4%, 2%로, 침체 상태에 놓여 있는 경제가 있습니다. 이 때 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를 참지 못하고 실제성장률을 3%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총수요자극책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러한 수요자극의 효과는 물가상승으로 그대로 먹혀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각국의 실제 사례가 앞의 조건들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① ③을 잘못했기 때문에, 미국은 ②를 잘못했기에, 더욱 높은 인플레이션에 빠졌으며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물가가 높고 경기침체 상태인 경제에서 실업률을 내리는 것이 정의라고 우기는 정파들(예컨대 한국의 민주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다간 국민의 삶은 더욱 고단해질 뿐입니다. 결국 이러한 경제상황에선, 정부의 인내와 국민의 참을성이 물가를 낮추고 경기를 회복하게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즉 先 인플레이션 진정, 後 경기부양이 경제회복의 정도입니다. “There is no royal road to happiness.” <참고문헌>최갑식, “선진국 스태그플레이션의 이론과 대책”








[ 금융투자소득세의 문제점 ] 금투세 도입, 조세회피 가능성 높고 장기투자 유인 억제 내년 시행유보가 논의되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는 조세중립성 제고 효과와 과세제도의 단순화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조세회피가능성 △부자감세 △장기자본의 이탈 △결집효과등 완화 장치 부재 △증권거래세 폐지로 인한 주식시장 변동성 확대등의 문제점을 초래할 수 있어, 금투세의 신중한 도입이 요구된다. ◆금투세도입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들 ① 조세 회피 가능성 존재 금투세는 과세를 회피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선의의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게 될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금투세의 설계구조에서 기인한다. ◇금투세 설계구조금투세는 현행세법과 과세대상 및 세율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두 법은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를 비과세로 만든다는 입법 목표를 두고 있는데,금투세는 97.5%를 비과세대상으로 삼고 있다. 또한 현행 세법의 과세 기준인 20%, 25%(3억원을 분기점으로 하여 대주주의 1년 이상 보유시의 현행 세율)를 세율로 책정하고 있다. 둘은 단지 과세대상선정 방법 측면에서 다를 뿐이다. 현행법은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을 기본적으로 비과세로 두고, 대주주 요건을 통하여 과세대상을 선정하고


[ 기업 다각화의 장단점 ] 산업다각화와 국제다각화의 장단점은? 기업다각화는 산업다각화와 국제적 다각화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다각화는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다각화 산업다각화는 기업가치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낳습니다. ①긍정효과다각화로 인해 현금흐름 상관성이 낮을 경우, 다각화는 현금흐름의 안정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러한 현금흐름안정은 기업의 위험을 감소시켜 자본조달비용을 낮추고 부채조달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 기업이 경기변동에 대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경우, 그 기업의 수익은 시장전체의 경기변동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기업의 수익률 변동이 시장전체의 수익률 변동과 동조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이처럼 그 기업의 수익률의 변동성과 시장전체기업들의 평균수익률의 변동성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면, 이는 그 기업의 체계적 위험인 베타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의 베타가 높다면, 그 기업의 자기자본비용은 높아집니다. 또한 자기자본비용과 타인자본비용의 가중평균인 가중평균자본비용도 높아지게 됩니다. 결국 높은 자본비용은 기업 가치를 낮추게 됩니다. 기업 가치는 영업현금흐름에서 자본적 지출을 차감한 금액을 위험(재무위험과 영업위험)과 자본조달활동을 반영한 가중평균자본비용으로 할인한 금액인데, 분자인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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