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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공동체주의] 슬픔을 꿈으로 베어내며 - 고발의 적개심보다 交通으로

아침에 숲길을 산책하다 두 갈래 길을 만났다.  사람들이 적게 가서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는 길이 한편에, 그리고 낙엽을 밟은 흔적이 많은 길이 또 한편에 숲 속으로 펼쳐져 있다.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는 ‘판단의 틀’에 달려있다. 선택을 결정하는 준거의 표준이 내면에 배태되어 있다면, 선택을 둘러싼 방황은 사라지게 된다. 




판단의 표준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지를 알려주는 자아 정체성에 담겨 있다. 

마이클 샌델 등과 함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인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판단의 기준이 되는 자아정체성은 ‘타인과의 대화적 관계’에서 해석된다고 말한다. 

즉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나는 김모씨의 오래된 친한 친구입니다.’라고 답한다면, 이 사람은 김모씨와  신뢰에 기초한 대화적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계성은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아정체성은 개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판단하기보다, 기대와 의무가 교환되는 호혜성의 관계를  통해  발견된다는 것이다. 자원을 제공하면 이에 대한 대가가 돌아올 수 있다는 일방의 기대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타방의 의무가 조화되어 구축되는  신뢰를 통해, 호혜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이러한 관계성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은 파악된다.    

호혜성의 범위는 두 사람의 관계를 넘어 공동체로 확장될 수 있다.  

그가 ‘나는 ○○ 주식회사를  다닙니다.’ ‘나는 ○○ 종교단체에 속해 있습니다.라고 답한다면, 그의 자아정체성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를 수용한다는 뜻이 된다. 공동체는  공동체의 연결망을 통해 그에게 자원을 공급하고, 그는 공동체를 위해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다. 상호보완의 호혜성이 공동체와 구성원 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판단의 표준은 가치를 수용하는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테일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가치가 인간 행위의 판단의 표준이며 자아 정체성의 전제조건이라고 지적한다. (홍영두)

그러므로 그가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한다면, 이는  자신이 어디에 위치에 있는지, 즉  어떠한 공동체에 속해있는지에 대한 ‘위치 고민’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호혜성이 성립되는 대화적 관계성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은 판단의 표준이 되어 갈림길에서 헤매지 않도록 한다.   


◆부정의 互惠성, 공동체를 파괴

공동체의 구성원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수용하여, 개인의 권리보다 공동체의 公同善을 위해 힘쓸 도덕적 의무를 품게 된다.  

문제는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단지 개인의 목표 실현의 도구로 삼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에 편향되어 있는 구성원은 나르시시즘의 문화 속에서 자기실현을 인생의 주요가치로 삼는다. 따라서  공동체의 요구, 공동체의 질서와 체계, 그리고  타인에 대한 진지한 의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홍영두)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이는 마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황홀하여 수선화가 되었다는 神話처럼,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나르시시즘의 심각한 폐혜는 자신에 취하여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방기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주범이 된다는 것이다.  구성원 상호간의  도덕적 의무감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여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 

이들이 공동체에서 자신의 목표를 쟁취하는 도구는 관계의 호혜성이다.  공동체에서 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이 연결망은 자원으로 변화되어, 경제자본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특정인과 기대와 의무의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면, 이 연결망은 자본이 되어, 경제적 자본과 권력을 생산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를 파괴하는 부정적 네트워크는 우리사회에 뿌리내려온 폐해였다. 혈연· 지연· 학연등 ‘연줄’이  공적인 선택 기준인 능력보다 우월하게 시스템을 지배해 왔다. 든든한 배경은 곧 권력으로 치환되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압박하고 지배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 불과한 이가 투명한 공적 질서보다 힘센 연결망의 힘에 기대어 공동체의 실력자로 부각되는 불공정한 사회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비애와 분노를 분출한다.  

더 나아가, 자격 없는 이에게  연결망을 허용하여 자원을 배분한 공식 권력자에게 슬픔, 실망, 그리고 배신감을 품게 된다. 


◆슬픔을 꿈으로 베어내며

그러나 우리는 비애와 좌절 속에 빠져 있을 수 없다.  이를 도려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겐  미래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도덕적 의무인, 개인의 권리를 앞세우기보다 공동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래서 좋음보다 옳음이 우선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꿈은 결코 포기하거나 거둘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발의 적개심보다 交通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시민의식을 지니는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자원을 불공정하게 배분한 이가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침을 보여주고, 원천적으로 구성원의 분노와 불만의 원인을 없앤다면,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포용과 연대성이 약화된다면, 공동체는 파편화되어 대립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공동체는 단죄보다 연대를 중시하며  ‘같이의 가치’를 공유할 때, 구성원간의 유대와 호혜성은 더욱 높아지고, 공동선을 향한 우리의 長征(장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고자료>
홍영두(2003),“공동선의 연대 정치와 민주주의의 배제의 동학”, 시대와 철학 Vol 14, No.1
스테판 뮬홀외, 김해성 조영달 옮김 (2011),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