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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철원기행>리뷰 : 관객은 ‘새로운 물결’

철원의 한 고등학교의 평교사인 아버지의 정년 퇴임 일에, 춘천에 사는 어머니, 큰 아들 부부,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택에 모인다. 

아버지는 가족 앞에 이혼을 선언한다. 폭설로 교통이 묶여 가족은 2박 3일간 불가피한 동거를 한다. 가족들은 황당함 가운데, 각자의 속내를 드러내며 감정의 골을 깊이 판다.




관객을 빨려 들어가게 하는 영화와 관객과 다소 거리를 두는 영화 중, 어떠한 영화가 좋은 영화라 할 수 있을까?  

영화 <철원기행>은 거리두기를 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 클라이맥스도 없고, 이야기의 맺음도 열려 있다. 즉 이 영화는 관객이 하나의 주된 줄기를 잡고 이야기를 따라 가도록 하는  친절한 구조의 영화들과 질감이 다르다.

주인공들의 행동이나 이야기의 인과관계도 촘촘히 짜여 있지 않고, 다소 개연성이 부족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는 관객이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기존의 영화들이 관객의 집중을 위해 씬의 이음매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에 반해, 철원기행은 에피소드적인 씬들이 투박하게 굴곡을 두고 이어진다. 

그렇다고 이러한 영화의 구성을 두고 불평하기엔 이르다. 영화와 관객간의 거리두기는 어쩌면 관객에겐 유익일 수 있다.  

관객과 감독간의 소통은 친숙한 전개,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 씬을 설명하는 적절한 음악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익숙함은  영화 지켜보기를 방해 할 수 있다.

오히려 관객과 영화와의 단절이 진정한 의사소통을 끌어낸다는 역설이 존재할 수 있다. 감독은 사물· 인물이 어떠한 상태인가를 설명해주기보다, 관객이 이를 찾아 나서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영화의 라스트 씬은 이러한 역설을 적절히 보여준다.  카메라는 아버지가 이사로 가구가 치워진 텅 빈 집을 지켜 보는 장면을 포착한다. 이후 이사짐을 싣고 떠나는 트럭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빈방은 가족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럼 아버지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가족은 다시 합쳐질까? 관객은 자기 머리 속에서 영화의 결말을 내린다. 이 지점에서 관객과 감독은 강력한 의사소통을 이룬다. 

거리두기의 또 다른 예는 영화 속 톡톡 던져지는 유머이다.  이는 이야기 전개의 윤활유만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오싹한 블랙 유머다. 

며느리와 마트에서 쇼핑을 한 후, 시어머니가 물품을 자신의 카드로 결제 하는 장면은 블랙유머의 진수다. 며느리가 자신의 생리대를 슬쩍 계산대에 올려놓자, 시어머니는 매몰차게 따로 계산하도록 한다. 이 장면은 실소를 자아내면서, 시어머니의 성품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 않았음을 추측 할 수 있다. 

이처럼 감독은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로부터 소외된 관객 대신 적극적으로 의미를 탐색하는 주체를 찾고자 한다. 이 때 관객도 영화가 추동하는 감성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는다. 

따라서 객관에 근거한 관객은 분노와 열정의 열기를 식히고 차분히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한다. 쌓아놓은 감성이라는 관성의 힘에 지배되기보다, 새롭게 냉철한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관객은 이제 ‘새로운 물결’이다. 

(4월 21일 개봉,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수상, 6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