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영화

영화 <사울의 아들>리뷰 : 신은 죽었단 말인가?




영화의 오프닝 신은  주인공 사울을 롱테이크로 클로즈업한다.  사울의 얼굴은 지치고 때론 무표정에, 상실로 뒤덮여 있다. 그는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유대인 시체를 처리하던 비밀 작업반)에 소속해 있다.

하지만 엔딩 신에서 사울은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무표정 대신 환한 미소를 보인다. 행복과 자기 만족감이 넘쳐난다.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이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나?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사울의 아들>은 같은 소재의 영화들과 결을 달리한다. 유대인의 억울한 희생과 나찌의 사악함, 그리고 유대인의 목숨을 구해주는 의인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헝가리 출신인 38세 신인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유대인의 영혼을 구하고 무엇보다 의인인 사울 자신의 영혼도 구한다는 면에서 차별성을 띤다. 



이 영화는 속과 머리를 울렁거리게 한다.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끌려가  ‘토막’(시신)이 되는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존더코만도들이 유골을 태운 재를 삽으로 강가에 뿌리는 장면으로 매슥매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충격은 과거 홀로코스터 영화들의 학습효과로 오히려 둔감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롱테이크 화면의 흔들거림과 사운드의 생생한 불협화음이 오히려 영화와의 접착제를 떼어버리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실감을 불어넣는  이러한 효과들이  에너지를 영화 속으로 쏟게 한다.  

아마도 주된 이유는 사울의 상식과 통념에 반하는 행위에 있다. 

사울은 우연히 가스실에서 죽지 않은 자신의 아들이  안락사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기서 그는 미션을 발견한다. 랍비를 불러 제대로 된 유대교 장례식을 거행하고 아이를 묻어주고자 한다. 그는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음이 넘나드는 아우슈비츠에서, 미친 듯이 랍비를 찾아다닌다. 영화 전개의 대부분이  랍비를 찾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므로 그렇다 치더라도, 사울은 살고자 몸부림치는 동료들의 안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동료들의 훼방꾼이다. 죽은 자 때문에 산자들이 죽을 수 있다. 

사울의 굽힘 없는 비이성적인 행위에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울은 왜 랍비를 애타게 찾았을까? 이에 대한 답이 사울의 비상식적 행위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유대법에 따른 장례식은 카디쉬(Kaddish)를 암송하며 시작한다. 카디쉬는  애도자의 기도( mourner's prayer)이다.   

사울은 ‘카디쉬’를 낭독할 랍비를 찾은 것이다.  

먼저 死者의 입장에서의 카디쉬는 망자가 사후세계로 들어가기까지(죽은 후 12개월)의 진혼과 애도의 역할을 한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영혼은 영의 세계, 즉 사후세계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정화시키는 기간(12개월)을 보내야만 한다.  애도자는 11개월 동안 매일 죽은 자에게 존경을 표하며,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이러한 애도자의 기도는 신이 보기에  죽은 자의 덕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법의 장례식에서 랍비의 카디쉬는 죽은 자가 사후세계로  들어가기까지의 첫 기도가 된다. 

사울은 랍비가 카디쉬를 암송하며 죽은 아이를 제대로 묻어주고자 한다. 이는 죽은 자가 앞으로의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덕이 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산자를 죽음에서 구하는 자선만이 구원의 모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울에게 있어 죽은 자의 내세의 삶을 위한 기도도 자선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우리의 상식과 관념에서의 구원이 아닌 사울 관점에서의 영혼의 구원 방식을 제시한다. 우리가 보기에 어이없는 사울의 행동이  그에겐 소명이 된다. 

영화의 엔딩 신에서 사울 앞에 아이가 나타난다. 아이(사울 자신의 아이가 아닌 죽은 아이들의 상징으로서)를 바라보며 사울은 미소를 짓는다. 이는 그가 영혼과 내세를 연결하는 도관(conduit)이 되어 아이를 영혼의 안식으로 인도한 것에 대한 행복을 의미한다.  사울의 행복은 그의 도관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애도자의 입장에서의 카디쉬는 신에 대한 순종을 뜻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면 산자는 신에 대한 불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애도자가 매일 카디쉬를 암송하며 이러한 상실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붙든다는 것이다. 

사울의 경우 신의 존재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선택된 민족인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대학살을 당하고 있는데도 신은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  

신은 정녕 사랑이며 정의로운지 묻게 된다. 악이 선을 지배하고, 억울함이 판치는 이 세상에  정의의 신은 존재하는가라고  외칠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침묵하고 있다.  그럼 신은 죽었단 말인가? 

이러한 상실감과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찰 때, 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다. 더 이상 살아 갈 힘도 버텨낼 의지도 없다.

이 때, 카디쉬는 애도자의 힘이 된다. 신과 세상의 부정의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신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믿음의 동아줄을 다시 부여잡게 한다.  

아무리 힘들고 정의가 무너졌다지만, 다시 일어서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신과의 관계의 끈을 더 세게 동여맨다. 

영화는 말한다. 세상의 부정의와 억울함으로 인해 패배감에 사로잡혀 드러눕지 말라고 한다. 일어서서 신에 대한 믿음을 가슴 판에 새기라고 한다. 이럴 때 신은 정녕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곁에 늘 머물러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말이다.  

엔딩 신에서 사울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절망과 패배가 아닌 회생의 기쁨이 넘쳐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死者와 산자가 ‘제대로 된 장례를 통해’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

(2월 25일 개봉, 107분), 
(제 68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 제73회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