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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리뷰 '분노의 포도'] 탄생 120주년 존 포드 회고전 - 서울아트시네마

아름다고 유쾌한 무도회를 위하여




억압의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을 찾아 나선 이스라엘 민족처럼, 죠드 가족은 수대에 걸쳐 경작해 왔던  오클라호마의 고향 땅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희망의 땅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죠드 가족은 산업화와 대공황으로 그들의 땅을 빼앗기고, ‘포도’로 실컷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꿈이 실현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고물트럭을 타고 떠난다. 

하지만   풍요와 희망의 상징인 ‘포도’를 수확하는 대신, 그들은 그들이 부딪치는  비참한 현실 앞에  ‘분노’하게 된다. 


▣ 분노(wrath)

당시의 시대 상황은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업의 기계화로 노동이 자본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산업구조의 변화의 상징인 트랙터는 소작농들을 대대로 내려 온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었다.  한대가 수십 명의 노동자를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산업의 변화 즉 구조적 실업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산업의 지배구조도 변화되었다. 트랙터 위에는 지주 대리인이 있으며, 이의 위에는 대지주 혹은 토지회사가 자리하고 있고, 그리고 이 피라미드의 최상층부에는  은행이 위치하고 있었다. 결국 정점을 중심으로 연쇄적인 지배구조의 사슬이 노동자를 그들의 땅에서  축출한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토지에서 생산수단을 상실한 소작농들은 임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몰락한 소농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이주하면서, 노동력이 과잉 공급된다.  임노동자간의 생존을 위한 일자리 다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과잉노동력과 굶주림을 이용하여 대지주 농장주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다. 죠드 일가는 Keene Ranch에서 상자 당 5센트의 복숭아 따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임금 파업을 주도하던 케이시의 죽음으로 당장 반으로 깎인다. 

백만 에이커를 가진 한 사람의 대지주는 비옥한 토지를 놀리면서,  10만 명의 빈농들은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의 극단적인 편향성에 빈농들의  ‘분노’가 영글어가고 있었다. 이는 불공평에 대한 분노이며, 인간의 가치를 상실해가는 참담함에 대한 분노였다. 


▣  공동체와 형제애 

◆노동자의 각성

 ‘커다란 영혼의 극히 작은 일부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다른 나머지의 영혼과 함께 더불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극히 작은 한 가닥의 영혼을 나머지 영혼과 합쳐서 전체가 되어야한다.’ 

스타인벡의  인간관은 위의 문장들에 녹아있다.  이것은 더 이상  ‘나’라는 가족 대신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한 신념이다. 그는 배타적인 가족중심의 편협한 울타리를 열고, 두루 사람간의 형제애로의 사고 범주의 확장이 비참한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 된다고 믿었다.  한사람 한 사람 각자들의  힘의 합은 두 사람의 연대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타인벡의 협동과 형제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존 포드는 생생하게  재현한다. 

‘나’에서 ‘우리’로의 개념의 이동이다. 여기서의 나는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공동체의 각각의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의 확장이다. 

죠드 가족의 아버지가 빵을 사기위해 가게로 간다. 어린 아들과 딸들이 가게로 와서 사탕을 바라보고 먹고 싶어 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가게 여주인에게 사탕 가격을 묻자 그녀는 1센트에 두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탕은 한개 5센트였다. 이를 안 트럭 운전수는 음식 값을 치르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간다. 

임시 캠프장에서 어머니 Ma가 가족을 위해 스튜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몰려들자 그녀는 부족한 식량임에도  배고픈  아이들에게 스튜를 나누어준다. 그녀는 배타적 가족중심이 아닌 모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열려있는 인간애가 가득한 인간상을 드러낸다. 

이를 단순히 흔한 휴머니즘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극도의  결핍의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 주는 희생과 형제애는 정신적 의식의 성장이며 영혼의 성숙을 의미한다. 

이 성숙은 계급 대 계급의 부르조아 타도의 계급투쟁을 위한 자원의 축적이 아니며, 자신이 처한 운명에 대한 생산적인 극복이다. 이는 “인간보다 먼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이며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각성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스타인벡이 깊이 체화한 생물학에서 군집을 이루는 ‘밀집대형’으로의 집단 속의 소통을 의미한다. 이는 개개인의 합으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톰은 어머니를 떠나면서 말한다. “케이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자신의 영혼 말고 거대한 영혼을 가져라. 모두에게 속하는 거대한 영혼. 저는 주위의 어둠 속에 있어요. 어머니가 계신 곳 어디에나요. 가난한 자의 투쟁이 있는 곳 어디에나요. ”

톰 죠드가 어머니에게 남기는 이 마지막 작별 인사는 형제애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으로의 각성과 성숙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존중의 가치가 어떠한 곤경과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발현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 리더의 역할  

공동체가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현명한 리더가 필요하다. 존 포드는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품은 리더, 자신의 사익을 포기하는 희생하는 리더, 그리고 비전과 철학을 체화한 리더의 모습을  제시한다. 리더는 주위의 고통과 수난을 자신이 감당한다. 

 존 포드는 케이시를 리더의 이상적인 전형으로 부각시킨다. 임시 캠프장에서 톰을 보안관으로부터 구해주고 자신이 대신 체포된다. 그는 주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리더였다. 

또한 복숭아 농장에서 불공평에 대항하여  싸우다 곤봉으로 머리를 맞고 죽게 된다.  사익을 포기하고 자신의 희생을 보이는 리더인 것이다. 

무엇보다 케이시는 비전을 제시하는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가족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편협한 인간이었던 톰에게 영적 성숙을 불어넣는 정신적 리더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눈에 띠는 인물은 어머니 Ma이다. 

그녀는 닥친 환경에 침착하게 대응하며 현명함과 강인함을 보인다. 시어머니가 자동차 속에서 사망하나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는 슬기로움을 보인다. 

또한 그녀의 주위에 대한  사랑은 넉넉하고 따뜻하다.  그녀에게는 먹을 것을 구걸하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위로가  존재한다.  그녀는 가족의 범위를 확장시켜 이웃을 품는  포용하는 리더 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의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강인하고 담대하게  가족을 이끌어 나간다.  비참한 삶에 절망하지 않고 싸워나가는 강인함을 보인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비전을 제시한다. 그녀는 열린 영혼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신화를 현실화는 자이며, 따뜻한 어머니의 상이며, 신뢰의 상징이 된다. 


◆ 자본가의 자각  

협동의 공동체는 임노동자만의 공동체가 아니다. 모두를 아우르는 공동체이다.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고 주위에 높은 담을 쌓아두는 자본가는 향후 지속성을 이루기 힘들다. 자본가를 키우는 것은 결국 노동과 소비에 힘입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들도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해야한다.  자신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 자본가의 의무라는 편협한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해관계자를 돌보아야한다는 공동체의식의 각성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자본가의 사회적 책임이며 성장의 추동력이 된다. 


▣ 아름다고 유쾌한 무도회
 
“농부들은 그들의 생산물을 팔 시장이 없습니다. 몇 년간의 저축은 사라졌습니다. .... 실업자들이 암울한 생존의 위협에 직면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물질적인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정신과 도덕의 실패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탐욕의 결과입니다.”

이는 1933년 루스벨트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삶의 곤궁은  물질의 결핍뿐만 아니라, 정신의 무장의 해제로 비롯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부에 대한 집중의 욕심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스타인벡과 존 포드의 작품에 재현되고 있다. 물질 결핍의 상황이 의식을 짓누르지만 결코 정신이 이에 무릎 꿇지 않는다. 사상의 갑옷을 입고 있다면 곤궁의 허약함이 침투해도 이를 능히 막을 수 있다.

포드가 말하는 정신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긍휼과 협동이다. 그리고 불공평과 탐욕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말한다.  이는 대상의 타도가 아니며 대상과의 합일을 위한 몸부림이다. 

결국 포드의 지향은  아름다운 공동체이며,  이의 결과는 모두가 함께하는 아름다고 유쾌한 무도회인 것이다. 

*프로그램 : 탄생 120주년 존 포드 회고전 (~10.5일 까지)
*상영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종로구 인사동 옆 위치), 
*<분노의 포도> 상영시간 : 9월 28일 일요일 16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