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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아크라시아]표리부동한 자를 매도할 수 없는 이유

-한국당의 개헌과 추경에 대한 오판
-앎과 행위의 불일치 , 아크라시아에 빠지는 이유는 ?

# 위스키를 즐기는 대학생 김씨는 오늘 저녁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일 아침 중요한 시험이 예정되어 있는데, 친구로부터 고급위스키를 오후에 선물 받은 겁니다. 위스키를 마시자니 내일 시험이 걱정됩니다.  결국 김씨는 달콤한 위스키 몇 잔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앞의 사례들은  ‘자제력 없음’과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제력을 잃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졌다는 말로, 앎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아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성과 욕망 사이의 갈등에서, 머리는 이성이 더 나은 것이라고 시인하지만 몸은 이성이 더 못하다고 판단한 것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입니다.


 
◆의사결정 그 이후...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사결정을 위해  각 대안의 만족・효용등의 값을 비교하여 그 값이 더 큰 대안을 선택합니다.


앞의 사례에서 김씨는  「오늘 양주를 마시지 않는다 > 오늘 양주를 마신다」라는 이성적 판단을 내립니다.  이성적 판단에 의한  즐거움이 당장 욕망에 사로잡혀 얻는 즐거움보다 궁극적으로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김씨는 이성적으로 선택한 최적의 대안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다 나쁜 대안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는 자제력을 잃고 자기 자신에게 진 탓입니다.  김씨는 도덕적 사유와 행위 간의 자기 모순을 보이며, 오늘밤의 즐거움에 대한 대가로 내일의 행복을 포기 할 수 있습니다.



◆아크라시아


김씨처럼 이성적 결정을 알고 있는데도 이보다 더 나쁜 행위를 범하는 자기모순을 철학자들은 아크라시아(weakness of the will)라 부릅니다.


학자들은 헬라어(고대그리스어)인 아크라시아를 ‘최선의 이성적 판단(best judgement) 내지 더 나은 판단(better judgement)에 따라 행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져서 어긋나는 행위를 의도적(intentionally)으로 선택하는 상태’라 정의합니다.  또는  ‘자신이 규범적으로 마땅히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결정과 다른 행위를 행하는 경우’라고 말합니다.


앞의 아크라시아의 예처럼, 이성적 존재인 우리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의 판단에 반대되는 것, 또는 이성적으로 더 나은  판단보다 못한 행동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아크라시아 현상은 일상의 경험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지행불일치, 언행불일치, 이중적 행위, 자기 모순적 행위, 표리부동, 이율배반적 일부 행위등이 아크라시아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평소엔 정의와 도덕을 소신으로 말해왔던 이가 이와 반대되는 모습을 실천으로 보일 때, 그는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사람으로 비난받습니다.




 ◆ 아크라시아에 빠지는 이유는 ?


그런데 사람들이 아크라시아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성적인 추론의 결론을 내린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모순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을까요?


고대 그리스시대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아크라시아가 가능한가, 아크라시아의 발생 원인은 무엇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 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주지주의적 관점에서 아크라시아의 원인을 무지로 파악하였습니다.


먼저 주지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아크라시아는 원래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완전한 앎의 상태에 있으므로,  이성에 근거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예에서 「오늘 양주를 마시지 않겠다 > 오늘 양주를 마신다」라는 판단이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앎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한 탓

입니다. 아크라시아는 완벽한 앎이 아닌 사이비 지식에 의해 초래된 현상이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초보학습자’도 피타고라스 정리를 틀리지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정리를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앎이란 근원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앎의 내적상태, 즉 피타고라스 정리가 포함된 기하학 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는 정리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앎이 내면화되지 못한 채 나오는 초보학습자의 말은 앎의 표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겉으로 앎의 징표일 수 있지만 실제로 앎의 근원을 내면화 하지 못한 무지상태를 드러낸 사이비 지식이라는 지적입니다 .


결국 주지주의 관점에서 이성이 욕망에 지배되는 것은  앎이 습관화 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어설픈 이성적인 앎과 이에 따른 발언은 유혹 앞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욕망에 따른 실천에 무릎 꿇게 됩니다


이처럼 사이비 지식은 지식과 욕구의 갈등을 초래하고,  욕구의 먹이가 됩니다.


따라서 주지주의 관점에서 앎과 행위의 일치를 가져오는 길은 지속적으로 학습하여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씨앗이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탓입니다. 같은 이치로, 초보학습자가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성숙된 학습자로 커나가는 것이 아크라시아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라는 지적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아크라테스를 일방적으로 악한 자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


아크라시아는 완벽한 지식의 부족, 곧 사이비 지식으로 발생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약한 아크라시아를 그 원인으로 주장합니다.


유약한 아크라테스는 숙고의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고서도 이와 어긋나는 행동에서 잠시 벗어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욕구의 이전단계에는 완벽한 앎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욕구에 휩싸이자 일시적으로 무지의 상태에 빠집니다. 이때 욕구에 의한 행위가 나타납니다. 욕구에서 벗어나면, 그는 다시 앎의 상태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아크라시아를 후회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시적인 지적 불완전 상태를 잠자는, 술 취한 상태등에 비유합니다. 
 
예컨대 잠자는 기하학자의 상태가 그 예입니다. 그 기하학자의 앎은 잠자는 상태에서 잠시 훼손됩니다. 그렇다고 그가 기하학의 지식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 그는 기하학을 아는 자이고,  잠에서 깨면  자신의 앎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잠, 술취함등의 비유는 아크라테스의 일시적 무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앎과 이에 근거한 말이 실천과 다른  이유도 유약한 아크라시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표리부동과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대한 해석은   아크라테스의 과오가 일시적인 지적장애일 뿐이라는 설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약한 아크라테스는 아크라시아의 상황에 빠지기 전에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고, 분노나 욕망에 부딪히자 술에 취하거나 자는 사람처럼 무지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욕망에 벗어난 그는 무지에서 벗어나  ‘다시 아는 자’가 됩니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약한 아크라테스의 잘못된 행동을 완전히 악한 것이 아니라 ‘반만 악한’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실천은 잘못됐지만 그의 결정 선택은 욕구 이전에 올바르게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아크라테스는 ‘반만 악한’ 사람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거는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 ‘아크라테스는 자제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욕구하는 것을 얻으면서 기뻐하지만 기대되는 고통을 또한 괴로워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쁜 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성에 반해 행위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느끼며 단지 욕구의 쾌락에 기뻐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아크라테스를 일방적으로 악한 자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유약한 아크라테스를 비난하는  두 부류


유약한 아크라테스를 비난하는 이들은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류가 강한 내재주의( strong internalism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실한 사람들로 행위 주체의 진실한 도덕 판단과 도덕적 행위 실천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최선의 행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안다면 그에 반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부류가 외재주의(externalism)들입니다. 이들은 규범적 근거에 따라 내린 도덕 판단과 행위사이에는 관련이 없고 욕구나 도구적 이성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처럼 이들에게 동기화의 힘은  자기 이익, 욕구 등과 같은 이성적 근거 이외의 요소입니다.


외재주의자들은 표리부동해 보이는 유약한 아크라테스를 비난합니다. 자신들은 적어도 앎과 행위의 일치를 보인다는 겁니다. 그럴 것이 공공복리보다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우선 내세우는 앎과 이에 근거한 행위가 일치하여 자기모순의 비판에서 비껴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크라테스는 자기모순을 보이지만 외재주의자들은 올곧게 한길로 사유와 실천의 일관성을 보이는 장점을 보입니다.  가치중립, 다른 성원의 이익, 공공복리보다,  자신의 집단의 안위를 의사결정의 우선 기준으로  내세웁니다. 



◆한국당의 개헌과 추경에 대한 오판





자유한국당의 최근 정치행태와 전략이 이와 같은 외재주의자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당은 지방선거와 개헌 동시 투표를 위한 국민투표법 개정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정 데드라인인 23일이 임박했지만, 국회는 정상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당은 국회정상화의 조건으로 민주당원의 댓글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 도입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개헌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의 실천입니다. 이번 개헌은 일인 혹은 한 집단에게 집중된 권한을 완화하고, 견제와 균형의 정치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개헌을 통한 시스템의 구축은  정치인과 그 소속 집단의 앎과 실천의 불일치를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헌은 집행부가 중장기의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국민발안 국민소환제등으로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마당을 조성해 줍니다.

이처럼 개헌은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이러한 시스템이 공공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한국당의 반대로 국민투표법이 개정되지 않을 경우 6월 개헌투표는 물거품이 됩니다. 그렇다고 개헌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선거 이후에 다시 살아날지도 미지수입니다.


게다가 한국당은 약 4조원 규모의 일자리 추가 경정예산 편성안 처리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추경은 특히 1조원의 예산을 편성해 고용위기지역에 대한 지원을 할 계획입니다. 구체적으로 실직자를 위한 직접 지원과 지역기업 협력업체 지원, 소상공인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쓰일 예정입니다.


이와 같이 긴급히 투입되어야 할 재정인데도, 한국당은 일자리 추경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4월 국회에서 한국당의 반대로 추경안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9월 정기국회에서야 심의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이 실업에 직면해 있는 국민과 경영난에 빠져 있는 협력업체와 소상공인의 고통은 한층 심화될 것입니다.


한국당의 6월 개헌과 추경에 대한 거부감은 한국당의 지방선거 전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개헌과 추경통과가 한국당의 표 전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한국당의 판단은 오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헌과 추경의 실패로 인한 손실은 한국당이 아니라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게 됩니다. 한국당의 반대로 인해 개헌과 추경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국민이 지방선거에서 한국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리  만무합니다. 이러한 손실로 인한 국민의 분노는 표심에 그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당은 정권쟁취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목표 달성은 유권자들의 기대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충족시킬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국민의 공공복리에 거스르는 전략을 내세우는 정당은 외려 유권자로부터 외면 받을 수 있습니다. 


국민의 공공복리에 대한 관심보다 정당의 이익과 생존을 우선 내세우는 한국당의 모양새가 아크라시아를 비난하는 외재주의자를 꼭 닮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