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올림픽의 470급 요트 경기에서 캐나다의 로렌스 르뮤 선수는 1위와 큰 격차 없이 2위로 순조롭게 레이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함께 경기에 나선 싱가포르 선수들의 요트가 전복이 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충분히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었던 로렌스 르뮤 선수는 전복사고를 발견한 즉시 코스를 이탈하면서 레이스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싱가포르 선수들을 구조하고 의무보트가 오기 전까지 싱가포르 선수들을 보호했습니다.
금메달 획득도 기대되었던 로렌스 르뮤 선수의 구조 활동은 유럽 중세의 騎士道(기사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곤경에 빠져 있는 약자를 보호하고 승리보다 동료들 간의 우정을 먼저 중요시한 르뮤선수는 분명 중세의 기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뚱딴지 같이 기사도 정신을 왜 말하느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올림픽의 표어인 ‘Citius/ Altius/ Fortius’, 즉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처럼, 선수들이 無限(무한)이라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이 올림픽의 본질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철학은 육체의 강인함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고귀함을 높이는 것에도 있다고 근대 올림픽경기의 창시자라 불리는 프랑스 출신 피에르 쿠베르탱은 강조하였습니다.
◆쿠베르탱의 올림픽 철학
쿠베르탱은 1935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독일에 초청되어, 올림피즘의 철학적 원리를 라디오 연설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올림피즘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고귀함이란 騎士性(기사성)을 말합니다. 이의 덕목엔 가난한 사람· 여성· 어린아이· 노인등 약자들을 보호하고, 동료들 간 우정을 나누는 것 등이 포함됩니다. 앞의 서울올림픽의 한 사례가 쿠베르탱이 강조한 올림피즘의 적절한 예가 됩니다.
또 쿠베르텡은 올림피즘의 특징으로 아름다움을 지적합니다. “올림픽 경기를 할 때 박수나 함성등의 응원은 국가적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기술에 대해서 행해져야 한다.”며 “편협한 국민감정에는 城內(성내)평화가 지배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단순한 국민감정에 일시 휴가의 여행을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보다 기사성과 경기의 아름다움을, 국민감정보다 세계평화를 우선 강조합니다. 선수들은 개인의 목표에 집착하기보다 약자를 보호하고 우정을 나누며, 올림픽을 관람하는 관중들은 편협한 민족주의보다 인류 보편적 아름다움과 평화를 먼저 고려할 것을 희망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올림픽이 평화를 위한 터전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한태준외)
◆올림피즘은 인류평화의 구현
올림픽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가 인류의 평화라는 쿠베르탱의 주장에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IOC위원장을 역임한 사마란치는 현대 올림피즘을 투쟁과는 반대의 것으로, 스포츠를 통해 건강한 생활과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계를 추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올림피즘의 본질을 세계 평화에 둔 지적입니다.
올림픽 헌장에 기록된 올림픽 운동의 목적, 즉 올림피즘도 세계평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경기의 기조를 이루는 정신적 신체적 자질의 발전을 도모한다. 둘째, 경기를 통하여 상호간 이해와 우의를 증진하도록 젊은이를 교육함으로서 보다 더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에 이바지 한다. 셋째, 전 세계에 올림픽 원칙을 보급하여 국제친선을 도모한다. 넷째, 4년 마다 거행되는 대제전인 올림픽 경기를 통하여 전 세계의 경기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올림픽 헌장은 이처럼 기사도 정신을 근본으로 하는 올바른 인간의 완성과 자유, 스포츠를 통한 국제평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올림피즘은 스포츠를 통해 인류의 평화· 화합· 사랑을 구현하는 스포츠 정신을 말합니다. 이는 공동체 의식과 화합정신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영환 2002)
◆올림픽의 승리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승리지상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방송등 언론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첫 메달을 누가 딸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국민들도 경기의 아름다움보다 한국의 금메달 순위에 더 높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선수들은 이러한 중압감로 인해 어쨌든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근본정신은 인류의 일원으로 화합의 마당에 참가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참가자들이 높은 기량을 발휘하여 국가로부터 물질적 혜택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결국 선수들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고 관중들은 인류의 평화에 관심을 둘 때 올림픽은 고귀하고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 스포츠의 정치화 논란
올림픽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어왔던 또 하나의 지점이 ‘정치를 위한 스포츠화’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입니다. 미국과 62개국 동맹국들이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항의하며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였습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구소련과 14개국 동맹국들이 미국에서 개최된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올림픽은 순수한 운동경기라기보다 정치적 이벤트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림픽의 정치화와 관련하여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스포츠의 정치화가 인류의 공동목표인 세계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실례가 중국의 핑퐁외교입니다. 당시 중국은 서구 접촉의 신호로 핑퐁을 택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핑퐁 스포츠교류를 통해 회복한 것입니다.
또한 동서독 통일의 마중물로 올림픽에서 동서독 단일팀을 들 수 있습니다.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에서 19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까지 동서독이 세 차례 동서독 단일팀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화합의 노력이 양국의 긴장을 완화하는데 기여하였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결국 스포츠의 정치화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순기능을 담당하였다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 평창 올림픽의 진정한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척도는?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의 목표를 열심히 추구하면 자원이 자연스럽게 최적 배분된다는 환상에 젖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공동체에 기여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도덕적 감정이 모두의 행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품고 있습니다.
올림픽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자신을 단련한다는 미시적 목표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올림피즘의 인류의 평화라는 거시적 목표에도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올림픽의 정치화를 일방적으로 매도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스포츠정책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국가가 엘리트를 선발하여 관리하는 사회주의 국가식의 엘리트 체육정책에서 탈피하여, 시민의 스포츠생활을 한층 지원하는 시스템의 구축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국가나 기업이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체육시설에 많은 투자를 하여 국민 전체의 건강과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순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인류의 평화와 화합의 마당을 어떻게 알차게 꾸려갈 것인가가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의 진정한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한태준, 황옥철(1996), “근대 Olympism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경성대 논문집
고영훈(2017), 「맹자의 철학사상에 근거한 올림피즘의 고찰」, 부산대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