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이끈 모택동은 중국내에서 양가적 평가를 받고 있다. 빛이 그림자에 의해 감추어지듯이, ‘혁명의 영웅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지도자 모택동'의해 가려지고 있다는 평이다.
모택동도 자신의 업적에 대한 양면적 평가를 인정하였다. 1977년 중공중앙공작회의 폐막식에서 “내 일생에 두 가지 일을 했다”며, “하나는 장개석을 몇 개의 섬으로 내쫓고, 일본을 집으로 보낸 일이다. 다른 한 가지 일은 당신들이 잘 알고 있듯이 바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 일은 옹호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1981년 6월 2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건국 이래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建國以來黨的若幹歷史問題的決議)〉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문화대혁명의 좌편향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무에게 있다'라고 발표했다.
이처럼 모택동은 중국본토에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극좌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대혁명(문혁)을 주동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 10년 동란, 문혁
10년 動亂이라 불리는 문혁의 상처는 깊었다. 전국적 혼돈 및 경기침체를 일으킨 문혁으로 수정주의자로 몰린 사람은 폭행, 감금, 강간,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국가주석 자리를 내어 놓은 모택동은 유소기, 등소평등 수정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들이 경제를 어느 정도 회복시키자, 인민들의 그들에 대한 신망은 높아갔다.
이에 정치적 불안을 느낀 모택동은 그들을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走資파라며 공격하였다.
이러한 권력투쟁에서 모택동과 사인방은 홍위병등을 선동하여 유소기, 등소평을 실각시킨다. 모택동주의자가 아닌 수많은 지도자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비판, 타도, 감금했으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문혁을 주동한 4인방 재판에서 중국 법원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72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3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 전제주의 방식의 낙인찍기
문혁 주동자들의 반대파에 대한 공격 전력은 전제주의 방식의 낙인찍기였다.
낙인은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을 의미한다.
문혁기간에 모택동의 통치철학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반동의 무리로 낙인찍혀 단죄되었다.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파괴분자, 우파등 黑五類는 배척의 대상으로 낙인이 찍혔다. 혁명간부, 혁명군인, 혁명열사, 노동자, 농민등 紅五類는 흑오류에 대한 혁명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문혁의 낙인행위는 극우내셔널리즘, 인종주의 나치즘의 행위와 유사하였다. 찍는 자들의 행위는 집단적 종교적 행위가 되어, 반대파를 숙청한 것이다.
◆문혁의 낙인 행위, ‘모자 씌우기’
무엇보다 문혁 기간에 문화적 전제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다양한 사고의 싹들이 잘려나갔다.
문혁의 주동자들은 계층 간의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늙은이와 젊은이로 구분하여 대립을 이끈 것이다.
이로 인해 전자에 속한 인물들은 철저히 욕보임을 당했다. 특히 지식인층은 집단공격을 받았다.
모택동은 “담장위의 갈대, 머리는 무거우나 다리는 허약하고 뿌리가 얕으며”라는 시구로 지식인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계급성이 허약하고 동요 가능성이 크고 실용적인 면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식인을 쁘띠부르주아 계층으로 분류하고, 철저하게 불신하였다.
문혁의 낙인 행위는 ‘모자 씌우기’에서 정점을 이룬다. 낙인이 찍힌 지식인들은 비판투쟁에서 불려나가 종이로 만든 갖가지 고깔모자를 쓰는 치욕을 면할 수 없었다. 고깔모자 안에는 압정이 들어 있어서 손으로 누르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람들 앞을 지날 때면 사람들은 수시로 그들을 때리고 모욕을 주었다.
모자씌우기는 지식인에 대한 공적인 모욕이었고, 이러한 낙인행위는 피해를 비인간화시키는 마녀사냥이었다. 대중들은 지식인들을 개똥보다 더러운 냄새가 나는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혼혈아로 낙인찍었다. 이는 집단몰이적 낙인찍기였다.
◆ 정치에 무관심하고 전문분야에 몰두한 과학자들, 백전으로 낙인찍혀
문혁기간은 근대판 분서갱유가 벌어진 시기였다.
당시 문화과학기술 연구는 정치적 공포등으로 마비상태에 빠졌다. 대학은 학생이 없었고 작가는 출판을 할 수 없었다. 예술가의 창작은 중단되었다.
등소평은 1975년 “과학원에 일하는 15만명의 과학기술 간부 가운데 누구도 감히 실험실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白專 (정치에 무관심하고 전문 분야에만 파고듬)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붙을까 두려워한다. 연구인력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며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쓸고 간 자리를 한탄하였다.
한 사회의 진보는 지식인의 자기분야의 몰두에 비롯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각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지식인들에게 각종의 모자를 씌운 것이다.
결국 문혁 10년간은 지식의 봉쇄로 사회의 작동을 멈추게 하였다. 사회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진공상태였다는 것이다.
◆ 강청등 사인방, 정치적 죽음 당해
지식인에게 모자를 씌운 이도 모택동이며 벗긴 이도 모택동 본인이었다.
문혁을 이끈 모택동은 1974년 중앙정치국회의에서 “두 개의 공장을 설립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강철공장이고 하나는 모자공장으로, 걸핏하면 사람들에게 모자를 씌운다.” 라고 문혁을 이끈 강청을 면전에서 비판했다.
강청은 1976년 저녁 체포되어 격리심사를 받았다. 이는 공산당에 대한 반당행위등을 한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추궁하기 위해 구속상태에서 조사하는 것으로 당원에게 정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黑猫白猫, 좋은 고양이란?
문혁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국을 탈진으로 몰고 갔다. 대중들은 지식인들에게 각종의 모자를 씌우거나 딱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낙인을 찍어 수치심을 안겼다.
이러한 집단몰이의 광기는 등소평의 등장으로 잦아들었다.
모택동에 의해 走資파로 몰려 실각된 등소평은 1978년 복권되며 예의 실용수정주의를 내걸고 중국경제의 회복을 시도한다.
그는 黑猫白猫론을 내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고양이 빛깔이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는 정책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은 중국을 부활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여 미국이 현재 경제와 군사면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국가로 성장시켰다.
결국 고양이의 털 색깔을 문제 삼을게 아니라, 고양이가 쥐를 얼마나 잘 잡느냐가 좋은 고양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생각의 다소간의 차이를 수정주의 반동으로 낙인찍는 ‘모자 씌우기’ 광풍은 문화적 전제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제주의 환경에서 어떠한 지식인도 자신의 분야에 몰두 할 수 없게 된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한국사공부를 열심히 하여 한국사 능력시험에 합격해야 실험실에 들어 갈 자격을 얻는 날이 머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