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간의 공무원연금 개혁 대립의 불씨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갈등으로 옮겨 붙고 있다.
지난 2일 여야 대표는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인한 재정 절감분의 20%를 공적연금 강화에 사용하고, 국민연금의 명목소득대체율을 50%까지 인상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공무원연금개혁안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청와대와 보건복지부는 여야 합의의 공적연금강화는 “명백한 월권”이라면 강력한 항의를 표시함에 따라, 공무원연금개혁안 합의가 물거품이 되었다.
이어,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10일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린다면 향후 65년간 미래세대가 추가로 져야 할 세금부담만 1702조원, 연평균 26조원에 달한다.”며 이럴 경우 “국민 연금 가입자 1인당 255만원의 보험료을 더 내야 한다.” 고 재차 국민연금 강화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세금 폭탄론’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같은 날, 이는 전형적인 공포마케팅이라면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 상향한 경우에도 보험료를 1.01%만 올리면 2060년 까지 세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보건복지부 자료에 나와 있다.”며 왜곡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괴담으로 국민혼란을 야기하는 당국자를 처벌하라고 반박했다.
이날 청와대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으로 증가하는 구체적인 보험료 금액까지 제시하면서, 국민연금강화에 강력한 반대 입장을 재차 표명한 점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청와대와 의회의 갈등의 핵심은?
이러한 청와대의 강력한 의사표시는 표면상으로 국민연금 강화로 인한 재정부담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해석 될 수 있다. 즉 소득 대체율을 50%로 인상한다면 보험료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를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
지금까지 청와대, 복지부, 그리고 야당도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수치만을 주장하고 있을 뿐, 인상보험료에 대한 진실값은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 수치값이 무엇이든 간에, 청와대와 의회간의 마찰의 실질은 행정부가 의회의 합의에 제동을 걸었다는 부분이다.
공무원연금개혁에 부수된 국민연금 강화부분은 다소 시간이 지체될 지라도 다시 여야의 협상으로 결론이 내려질 부분이다. 국가의 미래와 관련된 중차대한 공무원연금개혁이 국민연금이라는 변수로 좌초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청와대, 여야가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등의 본령은 행정부의 의회 합의에 대한 간섭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권력분립의 기초를 흔들어 놓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 행정의 영역 vs 정치적 영역
권력분립, 즉 행정의 영역과 정치적 영역의 구분의 중요성을 학자들은 핵 정책의 예로 설명한다.
행정의 영역은 객관적 정보의 수집· 정리와 관련되어 있다.예컨대 현존하는 핵무기의 양이 지구를 몇 번 파괴할 수 있는지, 핵으로부터 유출된 방사능에 어느 정도 노출되어야 암이 유발되는 지, 어느 정도의 피폭에 의해 기형아가 출산 되는지등에 대한 객관적인 전문가의 분석은 행정의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가치판단을 내리는 부분은 정치의 역할이다. 핵폐기물 처리에 대해 지역 주민과 합의를 끌어내는 문제, 전쟁에서 핵 사용의 금지, 핵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문제등, 규범을 정하고 합의를 이루는 부분은 정치적 차원의 문제에 속한다.
따라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정확한 정보를 생산하는 역할은 행정부의 몫이다. 그리고 이 정보를 이용하여 규범의 설정과 구체적 정보의 적용은 정치적 판단의 부분이다. 이러한 판단은 전문가에게 맡겨질 부분이 아니고, 공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공적영역의 장에서 토론되고 결정되어야 하고, 이러한 공적 토론과 의사소통의 광장 즉 ‘아고라’는 다름 아닌 의회이다. 이곳에서 다양한 엇갈리는 주장들 중에서 국민들의 후생을 대표하는 해답을 도출하여, 이를 합의안로 정하는 정치적 역할은 의회의 몫이다.
왜냐면 여러 이해관계와 가치들은 행정부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 즉 정치적 영역에서 합의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각과 의견차를 상호 조율하는 대화의 장은 의회라는 것이다.
한편 조율로 이루어진 대표성 있는 의견은 4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한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참여자들간의 합의 형성을 위해서는 우선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고(이해가능성) △참명제를 전달한 의도를 가져야 하고(진리성) △믿을 수 있고 진실되게 표현해야 하고(성실성) △의도를 공동체의 맥락에서 규범적으로 올바르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행정부의 역할
전문가들은 행정부는 이제 과거의 전통적인 관료제체제에서 새로운 행정으로 전환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즉 행정부의 역할은 노를 젓는 것(rowing)이 아니라 방향을 잡아주는 것(steering)이다. 직접 노를 젓는 등의 행정부의 독주는 권력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퇴색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해줌 대신 권한을 위임해주는 것, 소비지향 대신 수입지향, 사후치료 대신 예측과 예방, 집권적 계층제 대신 참여와 팀워크, 관료 중심 대신 국민중심으로의 전환을 이루는 것등이 전통적인 관료제에서 새로운 행정의 체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의회가 국민을 대표해서 최종적인 조율을 내린다.
이러한 관료제에서 새로운 행정으로의 전환은 행정부 독주의 정치에서 다수가 참여하는 생활정치, 삶의 정치로의 정착에 대한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소수의 엘리트가 국민을 상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참여에 의해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활동이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권력정치가 아니라 생활정치, 삶의 정치라는 것이다.
◆의회의 역할
그렇다면 의회의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의회는 탁자의 역할로 설명될 수 있다. 탁자가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듯이, 탁자는 둘레에 앉은 사람들을 맺어 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관계를 맺어주는 탁자의 역할을 의회가 담당하는 것이다.
갈등과 분열을 소통으로 연결하는 일은 의회의 권한이며 의무가 된다.
이제 소수 엘리트의 선지자적인 지도가 아닌, 시민의 삶과 함께 나아가는 진정한 정치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기능을 명확히 구분 할 필요가 있다.
행정부가 전문가의 입장에서 정보를 수집, 정리, 데이터화 한다면, 이 데이터를 현실에 적용하여 규범정립, 가치판단, 갈등조율을 담당하는 것은 의회의 몫이다. 이러한 권력분립이 이루어 질 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질은 높아진다.
‘정치는 남에게 권력을 행사하거나 남을 지배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존재이유를 상호탐색하게 하는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