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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카트>리뷰: 감성에 복종하는 접근, 아쉬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나? 의문.

지난 대선 기간에  야당의 한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내걸어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적이 있다. 다소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표현은 사실 우리 서민들의 희망이며 꿈꾸는 이상이다. 

무엇보다 기간제 근로자, 단시간 근로자, 비전형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비정규직근로자에게 이러한 ‘저녁이 있는 삶’은 한낱 신기루일 뿐이다. 

그들은  노동유연화라는 사용자측의 정책에 따라, 언제 해고당할지 모를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들어오는 비정규직 직원, 협력업체직원이 원청업체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직원, 심지어 파견업체를 거쳐 협력업체에 소속된 후 다시 원청업체에 근무하는 비정규직등은 감원대상의 일순위로, 정규직 직원들의 무시와 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이들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여도 계약기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기간의 정함이 형식에 불과하다는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 계약서의 문언에도 불구하고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맺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용주의 일방적 계약해지 및 해고와 비인간적인 차별이  원청업체에 근무하는 파견업체나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비정규직원들의 부당해고를 소재로 만든 영화 <카트>는 마트에서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 직원들이 부당해고를 당한 후,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과정을 극영화의 형식으로 묘사해  간다. 

이 영화는 두 가지 관점에 포커스가 맞추어져있다. 우선 마트에서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 직원들이 계약기간을 남겨 둔 상태에서  해고당한 후,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 과정을 그리고 있는 점이다. 일종의 비정규직의 실상을 묘사한 것이다.

 또 하나의 관점은 이 영화의 목표인, 무의식의 노동자가 어떻게 계급의식을 형성해 가는가라는 드라마적 관점이다.  

비정규직의 가장 가슴 아픈 실상은 원청업체에서 무시당하고 해고당하는 비정규직근로자 문제이나, 이 영화는 파견업체의 비정규직을 고용하려는 사측의 정책에 의해 마트에서 직접 고용한 후 해고당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려, 비정규직의 실상을 제대로 그려내었다고 보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지향점은 침묵의 삶에서 투쟁의 실천으로 변모해 가는 한 여성노동자의 계급의식의 형성을 그리고 있다. 

잔업도 마다않고 묵묵히 회사의 지시에 순종하며 성실히 회사 생활을 해온,  곧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 선희가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한 후, 그녀가 어떻게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후 투쟁의 전위로 나서게 되었는가를 극적인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과거 운동권의 대표적 의식화 소설이었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연상하게 한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이 영화는 굴종의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온 두 아이의 엄마 선희가 어떠한 과정으로 무의식상태에서 계급 의식화된 노동자로 성장하는가를 추적해 간다.  부당해고에 맞서는 경제투쟁을 내걸고,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하며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지도자의 위치로 발돋움하는 강철 같은 투사로의 발전을 그리고 있다. 

이는 자기 개인만을 위한 삶에서 인간 전체를 위한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각성과 깨달음을 묘사한다.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이 해고는 부당해고라며 목소리를 높이며 노조결성을 주도한  싱글맘 혜미의 독촉에도  노동자의 빨간 티셔츠을 입는 것조차 거북해 하던 선희는 마지못해 파업에 동참한다. 

이 와중에 아들이 학급에서 자신의 아들정도 만이 폴더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아들이 급식비를 내지 못해 점심을 굶는 현실, 그리고  아들의 수학 여행비를 주지 못하는 자신의 답답한 처지에, 그녀의 가슴은 무너져 간다. 

또한 선희는 아들 태영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였으나, 점주로부터 아르바이트비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는 사실에 점주를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선희는 서서히 계급의식에 무장되어간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계급관계를  이야기하고 계급의 대립을 묘사한다. 

계급관계란  대립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생산수단을 둘러싼 대립관계일 수도 있고,  정치권력을 포함한 법제도를 둘러싼 대립관계일 수도 있다. 특정세력이 자신과 대립하는 어떤 세력의 생사여탈권을 좌우하고 있다면, 이 관계는 계급적 관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계급의식은 이러한  계급정의에 의거하여 이 대립관계에 대한 의식으로 이해되어진다. 

선희가 그렇다. 무의식속에서 부당함 앞에 부당하다 말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하게 설움과 분노의 눈물을 훔쳐야 했던 어두운 과거를 묻고 첨예한 의식의  노동자로 거듭난다. 

그렇게 선희는 강철로  단련되어간다. 

반면에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주도했던 혜미는 용역깡패의 폭력으로  아들이 다치자, 파업대열에서 이탈하여 회사에 복귀하는 배신을 범한다. 계급의식으로 무장되었다고 보이던 혜미의 계급의식은 순식간에 내팽개쳐지고  자신의 길을 찾아 도망간다. 

이처럼 이 영화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혹은  와해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비정규직의 차별에 대한 사실을  객관적인 카메라고 조명하기보다, 이러한 한 인간의 의식의 변천에 집중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더욱 강하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그 계급의식의 변천과정이 석연치 않다. 선희가 노동자의 선두에 서서 의식화 되어 가는 과정이 그렇고, 특히 혜미가 아들이 폭력을 당하여 순식간에 배신을 하는 묘사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파업을 주도한 자라면, 억압과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오히려 굴종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또한 이 영화의  드라마적 성격인 노동자의 계급형성과정이 지금 시점에 그렇게 부각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이렇게 사용주와 노동자와의 계급대립을 고양시켜 관객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비정규직 문제는  신자유주의 지배하에 있는 이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에 대한 이슈이다. 이러한  비정규직의 문제해결은  우선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계급의식의 성장은 노동자이므로 지니게 되는 숙명과 같은 것이라는 관점은 왠지 구태연한 과거 민주화시대의 부산물로 느껴진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드라마적인 계급의식의 불타는 가슴보다 지금은  사실을 드러내고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책을 찾는가라는 얼음 같은 이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감성은 이성에 종속되어야지 그 역은 오히려 본질을 오도하게 된다. 

게다가  계급 대 계급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묘사는 비정규직의 본질접근을 더욱 힘들게 한다. 선희와 혜미가 카트를 밀면서  공권력과 대립하는 영화의 마지막 묘사는  오히려 비정규직의 본질을 훼손하기 십상이다. 차분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마치 노사의 대립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전근대적인 접근 방식이다. 

왜 이러한 감성에 복종하는 작위적인 묘사가 나타났을까? 아마도 이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차분히 풀기보다  오히려 비정규직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먼저 앞선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계급대립이란 선정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겠다는 방식은 고답적이고 작위적이다. 

차라리 담담히 팩트 중심으로 독립영화의 다큐멘터리형식으로 비정규직문제에 접근했다면, 장식적이고 감성적인 영화대신 진정성 있는 작품이 탄생했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