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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독한 군중] 영화 <베스트 오퍼> 리뷰: 고독과 소외, 그리고 그 꿈꾸는 소통에 관한 哀歌 :

우리들의 가슴에  아름다움, 선 그리고 감동을 안겨준 <시네마 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는 다소 낯선 색감의 미스테리 로맨스로 관객들을 찾아왔다. 

다양한 메타포들 속에  분절된 플롯들의 결합으로  부조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구성에 관객들은 다소 당혹함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심리 로맨스의 애잔함과 슬픔에서 따뜻한 위로를 느끼는 도중에  영화 종료 15분을 남기고 등장하는  반전은 관객들에게는 낯설다.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 속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시네마 천국>의  따뜻함과 순수함이  훼손되었다는 생각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친 질감의 연출 속에서, 감독은   우리들의 고독과 소외, 그리고 그 꿈꾸는 소통에 관한 哀歌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 고독과 결합

우리의 관계성은  자동로봇의 흩어져있는 부품처럼 결합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지 모른다. 

타인들에 둘러싸여 소통하고 교류하고 있지만, 정작  그 이면에는 고립과 소외로 자신을 외부와 격리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으로, 분산되어있는 부품들이 조립되어 완성된 자동로봇의 재결합을 애타게 갈망한다.  시계태엽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품이 결합되어 자동로봇이 작동할 때 우린 마음의 안식과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면 이것으로 족할까? 

이제는 자동 로봇이 문제다. 타인 지향으로 동료집단과 함께 고민하고 식사하며 안식을 즐기는 동안, 그 결합이 다시 자신을 옥죈다.  자신의 자율과 개성은 상실되고  조직의 힘에 작동되는 자동로봇으로 전락된다.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버질 올드만은  경매회사를 운영하는 미술품 경매인이며, 위작을 판별해 내는 탁월한 안목의 감정인이다. 또한 그의 친구를 경매입찰자로 위장시킨 후,  걸작을 평가절하하여 자신의 소유로 하는 술수도 저지른다. 
 
그는 고독하다. 타인들과의 접촉은  사업상의 일로만 제한될 뿐, 마음의  교류는 없다. 그는 염색으로 그의 흰색 머리카락을  숨긴다. 

또한 그는 괴짜이다. 늘 장갑을 끼고 있으며, 그의 아파트의 한 선반에는 층층이 각종의 장갑들이 놓여있다. 그는 타인을, 특히 여자를  신뢰하지 않고,  장갑으로 타인과의 접촉을 절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타인으로부터의 애정을 꿈꾼다.  장갑 선반 뒤쪽에는 자신만의 비밀의 방이 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의 초상화가 방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 속에서 그는 그 초상화 속의 여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클레어는 대저택의 젊은 상속녀이다. 그녀는 저택의 고가구를 평가하고 처분하기 위해 올드만을 감정인으로 고용한다. 

그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다. 그녀에게서의 ‘잠’은  광장공포증이다. 그래서 외부와 단절하고 자신을 격리시킨다. 클레어는 버질과  접촉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벽을 두고 대화를 한다. 그의 외부와의 유일한 대화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버질과 클레어의 고독과 외로움에 동조하며, 함께   슬픔과 우울을 나눈다. 

우리들은  타인들에게서 받는 마음의 상처를 두려워하지만, 또 마음 한켠에 타인과의 소통을 애타게  갈망한다. 그래서 비록 30년의 나이 차이지만  버질과 클레어의 깊어지는 사랑에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클레어가 버질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 그 ‘성’에서 마침내 나오게 되었을 때, 우리도 우리의 닫혀 진 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체험하는 해방을 느낀다.  

◆ 위조 그리고 자동로봇 
 
(※ 이하 강력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리얼리즘은  냉혹한 현실이 숨어있다. 

 리얼리즘에는 위조가 있고, 허위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그의 친구 Billy는 말한다. “모든 것은 가짜 일 수 있다. 기쁨, 고통, 증오, 병, 회복, 심지어 사랑마저도..”

또한 자신의 속내를  누군가에게 드러내었을 때, 상대는 이를 역이용하는 합리성을 자연히 발휘할지 모른다.

하지만 감정의 늪 속에서 빠져버린 상태에서  위조와 진품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그가 위작을 구별해내는 혜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음의 눈은 둔감해진다. 긴장과 민감함에서 비판의 날이 무뎌지고,  속절없이 감정이 이성을 압도한다.  그 거품 낀 감정은 곧 터져버리는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영화 마지막 15분을 남겨두고 결국 그 거품은 터져 버린다. 클레어의 사랑은 가짜였고 음흉한 책략이 숨어 있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사랑의 유혹의 덫에 걸린 버질은 그 달콤함에 젖어 그의 특유의 예리함과 분별력을 상실하였다.  버질은 클레어가 흩어 놓은 부품을 수습하여 재조립한 자동로봇처럼, 클레어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진품 감정인조차도 조작된 사랑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했을까?

버질은 아름다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동화속의 사랑에서 빠져, 그 사랑을 동경한 것이다. 가슴에 품었던 초상화의 여인을 클레어의 모습으로 현실화 시킨 이는 다름 아닌 버질이었다. 

활활 타올랐던 사랑의 불꽃이   어느 한 순간 점화된 것이다. 눌러진  사랑의 휴화산이 마침내 그 유혹 앞에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이 된 것이다. 

이러한 차가운 리얼리즘에서,   동화 속의 사랑을 품고 있던 버질은 결국 욕망의 화신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욕망의 세력에  작동되는  자동로봇이 된 것이다. 

 
◆ 고독한 군중

버질은 이제 ‘고독한 군중’이다. 그는 타인들과 어울리며 동료집단에 의지하며 불안을 극복한다. 그는 이제  이 고독을 참지 못한다. 그 고독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 버질은 시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군중들로 가득찬  카페에 앉아있다.  그는 환상 속에서 과잉 동조의 집단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는 이제 ‘고독한 군중’이다. 


◆ 자율 

리스먼은  ‘고독한 군중’에서 인간을 내부 지향적 인간과 타인 지향적 인간으로 구분한다. 

내부지향적 인간은 내부적인 힘의 조정에 의해  구속당한 채 살아간다. 이 내부의 힘은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과 자신의 내적인 의지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타인과의 사교를 멀리한다. 하지만 그는 강력한 독립성을 유지한다. 그는 타인에 대해 무감각하며,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불편해 한다. 늘 긴장되고 통제된 자신을 발견한다. 

반면 타인 지향적 인간은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타인으로부터 지도를 받고자 한다. 즉 외부의 힘과 신호에 민감하다. 누구와도 매우 빨리 가까워 질 수 있고 어느 곳에서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타인 지향적 인간은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는 집단사고에 빠진다. 군중 속의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 속에서  타인 지향적 인간들은 역설적으로 사교성을 박탈당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는 타인 지향적이 아닌 부분을 모두 잃어버린다. 그 집단에서  자기의 이미지와 타인에 관한 이미지는 동일시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생활이 타인들의 그것과 다르며 나름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둔감하다. 개개인은 그 내부에 무한한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이를 부인하고 집단사고에 빠진다.

이러한 몰개성과 자율의 상실에 대해 존 스튜어트밀은 말한다.

 “오늘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연의 놀라운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그 인간은 자동인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본성이란 모델에 따라 조립되는 기계가 아니며, 또한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이란 그로 하여금 생명체로 만들고 있는 내적인 힘의 경향에 따라서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육성하고 발전시키기를 요구하는 나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