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2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

[생산적 사랑 :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리뷰] 꽃을 사랑한다면 꽃에 물을 주자

그림을 그릴 때, 기술을  먼저 배워야 할까? 그릴 대상을 먼저 찾아야 할까?
마찬가지로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우선 골라야 할까? 사랑에 대한 태도를 익히는 것이 우선일까?  

그림(사랑)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채, 대상만을 구하게 된다면, 그 사랑은 결국 실패로 끝날 위험이 있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러한 질문은 사랑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성격과 사랑에 대한 태도라는 지적과 이어진다.   

두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정에서, 그 판단 기준에 영향을 미치는 힘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젊은 여자로 하여금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중년 남자와  미래의 잠재력만을 지니고 있는 젊은 청년 중 한 사람을 선택하도록 할 때, 어떠한 힘이 젊은 여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까?  

판단은 실제로 성격의 결과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지적이다. 논리적 치밀한 추론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태도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우디 앨런의 <카페 소사이어티>는 한 여자에 두 남자가 얽히는 관계를 통해 이러한 선택의 문제를 관객에게 질문한다. 

영화엔 스토리를 이끄는 세 남녀가 등장한다. 1930년 대,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꿈꾸는 뉴욕출신 청년 남자 바비(제시 아이젠버그),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에이전시 대표 중년 남자 필(스티브 카렐), 그리고 필의 비서인 매혹적인 젊은 여자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의 관계에서, 보니와 바비와의 낭만적 사랑과 보니와 필 사이의 합류적 사랑이 교차되면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세 사람들의 사랑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하는지 물음을 던진다.





◆ 낭만적 사랑

바비의 보니에 대한 사랑은 열정과 숭고함이 담긴 낭만적 사랑이다.  보니를 대하는 바비의 사랑은 찰나적인 매혹이라기보다  거짓 없는 진실과 뜨거운 진심이 담긴  사랑으로 부족함이 없다. 이들은 이렇게 하나뿐이며 유일한 사랑의 서사를 써내려 간다. 

하지만 이 사랑도 완전할 순 없다. 낭만적 사랑은 한 사람에게 빠지는 사랑, 즉 이기적인 사랑에 놓일 위험이 있다. 대상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또 다른 관계들을 소홀히 할 수 있다. 두 사람만의 낭만은 주변을  향한 애정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고 에리히 프롬은 지적한다. 


◆合流적 사랑 (confluent love)

보니와 필의 사랑은 우발성이라는 재료에 관능이라는 기술이 덧붙여진 합류적 사랑인데,  이들의 사랑을 조직하는 힘과 기운을 놓칠 수 없다. 우발성을 남성중심과 시장의 세력이 감싸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와 부를 겸비한 중년 남자 필과  세련된 매력에 도도한 아름다움을 갖춘 보니 간의 불륜의 로맨스는 프롬이 지적한 착취 지향적이고  매매지향적 성격을 드리우고 있다.

먼저 이 관계는 착취 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다. 프롬에 의하면 착취 지향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는다는 것으로, 젊은 여자가 풋풋한 매력을 무기로 하여 중년남자가 20여년을 함께 한 조강지처를 내치도록 한다.   
 
또한 두 사람의 관계엔  시장 지향적 성격을 지닌다.  일탈의 에로티시즘은 각자가  상대에게 내놓을 수 있는 자산과  원하는 요구를 맞교환 결과이다. 

마치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일치에 의해 균형량과 가격이 결정되듯이, 힘 있는 남자의 사회적 지위 및 자본과 여자의 매력이 시장에서 맞교환된 것이다. 이렇게 교환가치에 결정된 거래는 헌신을 요구하는 숭고함보다 상황에 의해 흔들리는 유동성과 그 위에  얹혀진  에로티시즘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쉽게 어긋나게 된다. 상대의 가치와 매력은 하락할 수 있어,  대상에 대한 싫증이 날 수 있다. 따라서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나타나듯이, 이 관계는 균형점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균형점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주고 받음으로 얻어진 효용이 떨어지거나 혹은 새로운 매력적인 상황이 돌출하면  두 사람은 미련 없이 시원하게  굿바이하며 이별의 손을 흔드는 것이다.  

특히 일탈의 로맨스를 만드는 힘은 힘센 쪽이다.  약자의 결정은 강자의 움직임에 달려있다. 여자는 자신의 자산인 매력을 이 남자에게 내어 놓지만, 이를 거두어들일지 여부는 힘센 남자의 결정에 의존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진심으로 포장되지만,  실상 소유에 의해 버무려져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도덕(moral)보다 윤리(ethics)라는 명제 하에, 그 윤리의 이면에는 상호 이익의 일치를 요구하는 시장의 원리가 숨어있다.
 
또한 짧고 한시적인 사랑인 합류적 사랑은 에로티시즘이 당당히 공개된 장소로 나타난다고  합류적 사랑을 지지하는 앤서니 기든스는 말한다. 과거 수줍은 에로티시즘이 전면으로 등장하여, 육체적인 성적 매력이 덕목으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은 성적 매력의 성취를 가치 측정의 제일의 강점으로 꼽는다.  뇌쇄적인 눈빛과 에로틱함이 교환가치를 드높이게 된다.  

결국 합류적 사랑을 지향한다는 것은  성격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시장 지향적이고 착취 지향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 생산적 사랑

그렇다면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그는 이를  생산적 사랑이라 칭한다.    

생산적이란 의미가 뜻하듯이,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성장에 적극적 관심을 두고 있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지 않는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프롬은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대상을 위한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이어 생산적 사랑은 상대의 존경을 포함한다. 상대의 성장과 개발에 관심을 갖고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개성을 존경하는 것이 생산적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존경은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한 사람을 존경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개성을 섣불리 예단하지 않고 깊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잘 알지 않고서는 존경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기보다 사랑받는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수용 지향적 사랑은  비생산적 사랑이다. 

또한 생산적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확대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프롬은 지적한다. 

이처럼 사랑은 자신을 사랑해 줄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능력을 우선 요구한다. 백마 탄 남자를 만나거나 잠든 공주를 찾기보다, 생산적으로 사랑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좋은 피사체만 고른다고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올바른 대상을 먼저 찾아내기보다 사랑의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태도, 사회적 환경 그리고 양성평등 

그렇다면 선택을 결정하게 하는 힘인 태도와 성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프롬은 인간 역사를 통해 인간의 생산적 성향을 가로막은 것은 사회적 환경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을 실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용 지향적이고 시장지향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 탓이 크다는 것이다. 

젊은 여성이 미래의 불확실성을 보장받기 위해 힘 있는 남자를 찾는 것은 자신의 안전이 사회에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또 다른 설명이 된다. 
 
남성의 이익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이는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에 안착하기란 지난한 몸부림을 요구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기업과 사회에서의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기울어질 때, 비로소 여성들의 태도와 성격도 바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여성이 이 땅에 안전하게 발을 붙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자료>
에리히 프롬, 홍미숙 옮김 (2003), 「사랑의 기술」
박찬국 (2013), 「에리히 프롬 읽기」
송재용(2010), 「에리히 프롬의 자기사랑에 관한 윤리적 고찰」, 협성대학교 신대원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