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이는 한때 대구에서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하는 최고의 칭찬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조선 미술계에서 천재화가로 불렸다.
그는 18살 때 <그늘>로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입선하면서 미술계에 데뷔하였다. 19살에는 특선을 차지하여,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1931년에 유학을 떠난다. 이인성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시기에 유럽에서 공부했던 일본인 화가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화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은 인상파,후기인상파,야수파등을 수용하였고, 이인성은 모네, 세잔, 고갱등의 각 유파들을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녹여 우리 체질에 맞게 토착화 시켰다.
4년간의 공부 후 귀국한 그는 우리의 땅과 문화에 젖게 된다. 1934년 <가을 어느 날>은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鮮展) 13회 특선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이전의 도회적 분위기 대신, 향토적인 정서를 불어넣었다. 파란가을 하늘에 누렇게 익은 벼와 해바라기 풍경에, 그을린 얼굴을 한 반라의 처녀를 그렸다.
하지만 관전화가라는 수식어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선전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하늘의 별따기라는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인성은 천재화가이지만 일본의 인프라에서 인정받은 작가라는 비난을 받아 이중섭과 박수근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관전은 미술계에 등용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단지 이인성은 닥치는 대로 관전에 출품했다는 옹호론자들도 있다. <가을 어느 날>의 반라의 처녀는 수탈당한 조선을 상징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이인성은 귀가 길에 사소한 시비로 경찰의 오발로 38세에 요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