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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상의 한뼘의 변화를 위하여, <세상의 끝에서 세상을 말하다>Book Review

 
                   
                      

다큐멘터리는 ‘기록의 예술’이라고 불리워진다. 하지만 우리는 reality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미학적 연출 시도를 하는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빠진다.

다큐멘터리pd는 세상의 끝이라는 그곳들, 굶주린 사자가 있는 정글로, 피비린내 나는 분쟁지역으로, 영하 89.6도의 남극으로,  소박한 일상을 뒤로 하고 순간순간의 위기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우리의 상식의 기준을 비웃으며 그들의  유일한 무기인 카메라를 들고 치열한 현장 속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세상의 끝에서 세상을 말하다>는 이러한 우리의 의문을 시원히 풀어주는 해답지가 된다.

또한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9인의 pd들의 모험담은 특정 직업의 애환을 담은 스토리를 넘어, 우리의 안주한 의식에  겨울의 강가를 맨발로 건너는 차가움을 선사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의 방법과 목적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에 감독의 의지가 개입되는 순간  현실은 왜곡되고 비허구에서 허구의 장르로 변형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어떠한 연출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학의 조미료가 작품에 뿌려졌을 때, 그 다큐는 더 이상  다큐멘터리의 범주에서 이탈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사실과 감독의 개입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보는 주장 또한 대두되고 있다. 진실을 전달하는 단계를 넘어서, 감독의 performance 또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의 performance를 뒤틀림으로 보기보다, 창의성의 표현으로 수용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현실에 대한 무감각의  기록으로 이해하기보다, 현실에 대한 무언가에 대한 웅변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논쟁과 관련하여  독립영화 최초로 300만 관객을 동원한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은 이러한  제작방법에 대해 reality보다 hyporealty를 강조한다.  그는 연출은 조작이 아니며, 다큐멘터리에 미학과 작법의 개입을 인정한다.

“워낭소리에 나오는 할머니의 화장한 모습이 진짜는 아니잖아요, 카메라가 있으니까 그런거지 원래는 안 그렇잖아요. 몰래 찍는다고 해도 찍고 있다는 걸 알면 말을 바꿔요. 그래서 진짜를 찍는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진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찍는 거예요. 그냥 그 현상을 찍는 거예요. 본질은 모르는 겁니다.”라며 그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실제가 되는 hyporeality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가의 논쟁은 중요하지 않다.”며 “다만 그 전체를 보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그대로의 질료를 단조롭거나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자료들을 배열하고 재배열하며 창조적으로 주조’하는 이 창조행위는 당연 보는 이에게 객관적이며 투명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사실과 개입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받아들여진다. 


# 다큐멘터리 pd들의 애환과 꿈

으르렁거리는  사자 앞에 다리가 후달거리고, 무게 20톤의 철 덩어리가 배 위에서 떨어져 죽음의 문 턱을 넘나들고, AK47의 총구를 입안에 집어 넣고 죽여봐라고 외칠 때,  퇴근 후 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걸치거나, 아내와 아이들과 저녁시간을 오손도손 즐기는 넉넉한 시간들의 기억이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가슴을 두드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과 정서적 소통과 공감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 한방울을 위하여  현장 속 으로 다시 돌아간다.  혹은 민중들의 삶을 기록하고 그들 편에 서는 강렬한 열망을 품는다. 세상은 놓아두어도 저절로 변하지만 세상을 한 뼘만큼 변화시켜보려는 소박한 꿈을 가진다.

그들의 치열한 세상의  변화에 대한  갈망들이 한방울씩 한방울씩 모아질 때, 세상은  절망에서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작은 변화를 카메라에 담아 이를 세상에 전달 할 때, 우리네 가슴도 젖고, 세상도 촉촉이 적셔지는 법이다.


# 다큐멘터리 pd들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

그들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은 연애편지를 쓰는 일이라 정의한다. 그들의 연애는 세상에 대한 구애이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미래가 그들 앞에 놓여 있어도, 그들은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그 현재의 느낌을 사랑한다. 그들에게 미래의 평탄한 길을 보여 준다면, 그들은 도리어 이를 거부하고 세상의 끝으로 다시 달려간다.

그래서 이충렬 감독은 우리들에게 도전과 열정을 역설한다.
 
“옛날처럼 깡다구 있게 버티는 힘이라도 길러졌으면 모르겠지만, 요즈음은 패스트푸드 세대라서 그것도 안돼요. 게임하듯이 바로 승패가 바로 안나면, 바로 그만둬 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실수한 걸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그냥 바로 때려 치워 버려요. (중략) 행복이라는 건 미래지향적인 게 될 수가 없거든요. 경험은 나중에 에너지원이 돼요. 그런데 행복이라는 건 그냥 그 자리에서 써야 할 것들이라는 거죠. (중략) 행복은 현장에서 써야 해요. 책을 읽거나, 술 먹고 싶을 때 먹고, 해보고 싶은 거 하는데 행복을 쓰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경험은 그게 똥이 돼도 해라! 그게 자기 에너지원이 되니까요. 열정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죠.”

다큐멘터리는 치열이고 꼿꼿함이다. 비록 죽음이 다큐멘터리 pd들을 굴복시키려해도, 그들은 죽음을 조롱한다. 미래는 그들에게는 사치이다. 그들은 세상의 작은  울림을 위해 세상의 끝에서 세상을 말한다. 그들의 작은 영상 하나는 비록 당장 세상의 폭풍을 가져오지 못할 지라도, 이러한 미동이 결국 큰 변혁의 밑거름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운명인 것이다.

“내가 만나 온, 앞으로 만날 지구 반대편 아이들에게 작은 변화의 씨앗을 전하고 싶다”(박정남pd)


        [이충렬외 8인공저 ,  21세기 북스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