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
“we also boast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reconciliation.”(NIV)
“So now we can rejoice in our wonderful new relationship with God because our Lord Jesus Christ made us friends of God.”(NLT)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화해에 이를 때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찾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이 화해가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그리고 앞날의 희망을 다시 품게 합니다.
◆ 바울이 말하는 화해의 의미
바울이 말하는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적인 관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죄는 악한 행동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악한 행동을 ‘어두움의 일’과 ‘육체의 일’로 표현합니다.
어두움의 일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고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13:12~13)
“12.The night is nearly over; the day is almost here. So let us put aside the deeds of darkness and put on the armor of light. 13. Let us behave decently, as in the daytime, not in carousing and drunkenness, not in sexual immorality and debauchery, not in dissension and jealousy. ”(NIV)
그리고 육체의 일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20.idolatry and witchcraft; hatred, discord, jealousy, fits of rage, selfish ambition, dessensions, factions”
결국 인간의 죄란 악한 행동, 곧 부도덕한 행동들과 우상숭배로 요약됩니다. 인간은 부도덕한 행위와 우상숭배를 범함으로 인간의 악행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주도한다는 인간의 오만함이 대표적인 악행이 됩니다.
이 같은 악한 행동, 곧 인간의 죄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하게 합니다.
(참고: 그런데 화해란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바울서신 외에 나타나지 않는 용어입니다.
화해라는 의미의 동사 ‘카탈라소’(καταλλάσσω)는 로마서 5장10절에서 두 번, 고린도전서7장11절에서 한번, 고린도후서 18~20절에서 세 번, 총 여섯 번 나옵니다. 화해의 명사 ‘카탈라게’(καταλλαϒή)는 로마서 5장11절,11장15절에서 각1회, 고린도후서 5장18~19절에서 두 번 나옵니다.
이처럼 화해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표현된 바울만의 독특한 용어입니다.)
◆ 인간과 신 사이의 화해 행위는 일방의 행위
하나님이 이루시는 화해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시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화해의 과정에 참여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남습니다.
이 점은 인간과 신 사이의 화해가 일상에서의 화해에 대비될 때 명확히 드러납니다. 즉 일상에서의 화해는 당사자 쌍방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인간과 신 사이의 화해는 일방의 행위로 귀결됩니다.
일상의 화해란 사전적으로 ‘갈등하는 두 당사자들이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서로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을 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갈등의 해소는 두 당사자들의 상호 양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헬라문헌에선 화해라는 단어는 물건의 교환을 의미했습니다. 교환을 통해 갈등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있는 적대관계가 제거되고 우호 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처럼 일상에서의 화해는 대립하는 당사자들 간의 상호적 행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인간과 신 사이의 화해의 시도는 일방의 행위에 속합니다.
인간이 신의 진노를 달래어 인간과 신이 화해하는 것입니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인간과 신이라는 두 당사자 간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의 시도도 일방의 행위에 속합니다. 예컨대 헬라어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선 인간의 제물바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화해, 곧 바울이 말하는 화해도 하나님 일방의 행위에 속합니다.
이처럼 인간과 신 사이의 화해, 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는 화해 당사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일방의 행위에 의해 달성됩니다.
◆ 우상숭배의 화해등 vs 복음이 말하는 화해
그런데 복음이 말하는 화해(reconciliation), 곧 바울이 말하는 화해는, 우상숭배의 화해 또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과의 화해방식과 정반대의 회복흐름을 보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화해의 주체와 대상의 차이에서 발견됩니다.
①우상숭배의 화해 및 유대인들의 하나님 사이의 화해 (김철홍)
이 화해의 주체는 인간이며, 화해의 대상과 목적어는 하나님이 됩니다.
이를테면,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죄인들의 회개, 기도, 화목제물 바침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속죄제물의 바침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화해의 주도권을 인간이 쥐고 있고 하나님은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됩니다.
이러한 화해의 신학은 우리나라의 전통 이야기인 ‘심청전’의 구원의 논리를 연상하게 합니다. 심청전에서 뱃사공들이 심청등 처녀를 바닷물에 던져 넣어 용왕에게 바치고, 이 같은 죄물바침에 의해 용왕의 진노를 풀어 바다를 잔잔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 경우에도 화해의 주체는 인간이며 용왕은 그 대상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상숭배의 신학에선 인간이 더 좋은 일을 얻기 위해, 신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인간이 바치는 제물로 인해 신의 기분이 좋아지면, 인간은 신으로부터 복을 받고 목표하는 일을 이루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영화촬영을 시작할 때, 영화인들이 돼지머리를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상숭배의 화해관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이 주장은 인간이 얼마든지 자신의 의도대로 신을 조정할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함을 품고 있습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신에게 기도함으로 자신의 ‘흉’을 피하고 ‘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신이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 깔려있습니다.
이런 신관은 인간이 신의 머리 위에 올라 있고, 신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② 복음이 말하는 화해
반면, 복음이 말하는 화해는 우상숭배에서의 화해와 정반대의 회복 과정을 보입니다.
우상숭배의 화해에선 화해의 주체가 죄인 된 인간이지만, 복음이 말하는 화해는 화해의 주체가 피해를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God reconciled a sinner to himself.)
이로 인해 인간은 화해에 있어 수동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화해되는 것입니다.(A sinner is reconciled by God)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화해에선 하나님이 제물을 마련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이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스스로 심청같은 여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러한 화해에는 인간의 교만과 오만이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인간이 제물 바침을 통해 신을 조정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는 오만이 복음의 화해 관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신을 아래로 굽어보고 화해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우상숭배의 시각과 달리, 복음의 화해관은 땅에 있는 인간이 천상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이 화해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과의 화해를 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 화해의 본질적 의미
복음의 화해관은 하나님이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시는 하나님 중심의 화해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임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18a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All this is from God.”(NIV)
이는 인간의 삶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의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궁긍적 의미가 됩니다.
◆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과 화해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 해답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에 있습니다.
화해는 속죄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속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진정한 징표가 됩니다.
속죄와 화해의 관계는 고린도후서 5장19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a)
“that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in Christ, not counting people’s sins against them”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죄가 되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힘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속죄가 화해를 낳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당신의 아들을 소외시키심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킨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자신과 단절시킴으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과 연합시키시고 화해시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단절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버리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변화시키십니다. 구세주 예수의 뜨거우신 속죄의 사랑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전폭적으로 의탁하는 화해를 낳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의탁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b)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NIV)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얻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심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리스도가 경험하신 소외가 죄인과 하나님사이의 연합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화해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명백한 사랑의 징표는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속죄의 사랑이 인간이 하나님으로 향하게 하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 인해 고난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고 이를 딛고 일어설 수 있으며,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35절은 이를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
또한 로마서 5장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롬5:11)
“So now we can rejoice in our wonderful new relationship with God because our Lord Jesus Christ made us friends of God.”(NLT)
우리는 이제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고난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자녀로 얻으신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미래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참고문헌>
김철홍,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화해”
조경철, “화해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