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필론은 賢者(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이문열 <필론의 돼지>)
돼지의 관심은 잠자고 여물 먹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필론도 그렇습니다. 폭풍우로 배가 뒤집어 지든 말든, 다른 여행자들이 죽든 말든, 그는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방관자입니다.
필론이 이와 같은 행동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현자 필론은 상황을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상황에 개입해보았자 현실은 바뀔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한다고 해서 세상이 고쳐질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를 품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필론의 방관자적 행동은 공감의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로 우정, 사랑, 동료의식등이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의 형성은 감정적 떨림보다 평가적 감정에 빚져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은 순간적 감정의 비약이라기보다, 상대의 감정을 지속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에 공감한 결과라는 겁니다.
결국 필론의 방관도 이러한 평가적 감정의 부족, 즉 공감의 결여와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공감이 형성되기 위한 요건
그렇다면 공감이 형성되기 위한 요건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민의 정의를 바탕으로 상대의 고통스런 감정에 공감하는 인지적 세 가지 요소를 검토합니다.
우선의 인지적 요소는 심각성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사소하지 않고 심각하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공감의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영화 <원더>는 이러한 공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들과 다른 외모의 ‘어기’는 헬멧으로 얼굴을 숨깁니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어기를 학교 친구들은 따돌리고 괴롭힙니다. 이때 용기 있는 몇몇 친구들은 어기의 아픔에 동감하며 말벗이 됩니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라’는 공감의 자세를 몸소 실천한 겁니다.
둘째로 공감은 부당성을 인지하였을 때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을 만큼 비난받을 일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주위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면, 이러한 부당성이 공감을 초래합니다.
역으로, 그 곤경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 때문에 벌어졌다고 판단된다면, 공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스바움은 부유한 미국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주목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못 사는 이유를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간주합니다. 이 때문에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곤경에 공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려움은 사회적 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합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문제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인권이 부당하게 짓밟혔다는 인지와 공감이 일본 내에 확산되었다면, 성노예제 피해자의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진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조선인 성노예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군에 강제 동원되었다는 진실을 거부하고, 심지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매춘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부당하게 학대받았다는 공감이 일본 내에 형성되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는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일본정부의 강제동원으로 인해 잔혹한 대우와 성적 착취를 당했다는 사실을 일본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일본은 편협한 애국심의 굴레에서 벗어나 국가 사이의 공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존경받는 국가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접근은 일본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여성 인권이라는 글로벌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인지한다는 인권적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고통에 국가적 차원에서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도 성노예제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자료를 발굴하고 일본에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감은 행복에 대한 판단과 연관됩니다.
고통 받는 상대가 자신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감은 불행을 당한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목적에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아픔이 자신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이를 아담 스미스는 ‘공평한 관찰자’라고 칭하였습니다.
◆공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나?
그렇다면 공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담 스미스는 이에 대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먼저 ‘감정이입의 시뮬레이션’입니다. 만일 ‘내가 너라면’이라는 전환 방식으로, 자신을 행위자로 시뮬레이션해 보는 겁니다. 이를 위해선 상대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상상력의 투사’입니다. 이는 ‘너의 신념을 고려할 때 나라면’이라는 방식으로 상대의 곤경에 접근합니다. 이는 내가 실제로 행위자의 상황 속에 들어가 감정적인 반응을 체험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상대의 행위에 공감하거나 부인하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도 힘들 경우, 공감을 위한 조건부 동감이 있습니다. 이는 행위자와의 정보부족으로 심리적 거리가 있거나 상상적 투사가 힘들 경우, 실제로 동감하지 않더라도 시인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침통한 얼굴로 자신의 곁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동감은 하지 못해도 그 비통함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조건부 동감이라 합니다.
◆ 필론의 돼지가 사라지기 위해
사람들은 공감이 없는 방관자의 삶에 익숙해 있곤 합니다. 필론의 돼지가 세상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도 공감의 부족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난받는 이들의 시선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맞추고자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상대의 입장을 시뮬레이션해보거나, 그의 상황에 내가 놓여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보거나, 혹은 간접적 공감에 의해 상대의 상황을 체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공감이 세상은 로빈슨 크루소의 외딴 섬이 아닌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지는 곳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글로벌 휴머니즘에 의해 맺어지는 곳이라는 믿음의 형성도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