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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부산 아미동 ① ]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아미동 ,죽음의 경계를 넘어 -아미동 판자집 소년, 장정구. 세계챔피언 되다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부산대학병원 앞에서 출발하여 가파른 감천고갯길을 올라가면 상산교회를 만나게 된다. 교회를 시작으로 한 일대는 아미동 산의 19번지라 불린다.

 

아미동(峨眉)의 지명은 애막(움집)이라는 옛말이 변하여 아미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옛 지명인 아미골(蛾眉)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미동에 반달형의 土城이 있었는데, 이 토성이 미인의 눈썹을 뜻하는 蛾眉(누에나방의 더듬이 같은 눈썹)를 닮았다는 것이다.

 

 

다니마치주민들의 근성 : 맞아도 다니마치

 

아미동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행정구역 조정으로 곡정(谷町 다니마치)으로 개편되었다. 골짜기를 뜻하는 골로 간다는 말처럼 죽음을 의미하는데, 곡정에는 화장장과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었다.

 

일본순사들은 다니마치 주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유승훈) 순사들은 길가는 아이들에게 어디고라고 묻고, 다니마찌라 답하는 아이들을 무조건 때렸다고 한다. 다니마치 주민들을 다른 동네에 비해 일본순사에 거칠게 저항하는, 골치 아픈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미동 사람들의 고집은 남달랐다. 순사가 다음에 어디고라고 다시 물으면, 아미동 아이들은 또 다니마치라 답했다고 한다. 맞아도 다니마치인 것이다.

 

아미동에는 안병섭이라는 깡패가 있었다.(유승훈) 순사들이 안씨에 걸리는 날은 골로 가는 날이었다. 안씨는 순사의 칼을 빼앗고 모자를 하수구에 집어넣고, 순사들을 마구 때렸다고 한다. 안씨는 순사들에겐 야쿠자이지만 아미동 사람들에겐 항일투사였다.

 

 

아미동 19번지가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된 배경

 

아미동은 해발 100~150m이상의 고지대로, 아미동 산동네에서 부산항구와 용두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터가 있었던 곳이다.

 

아미동 19번지가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1876년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은 강제로 일본에 개항되었다. 부산의 광복동등지는 일본의 專管거류지(외국영토에 어느 한 나라의 행정권과 경찰권이 행사되는 지역)가 되었다.

 

부산의 강제개항으로 일본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부산에서 사망하는 일본인도 늘었다. 이에 1892년 복병산이 일본인의 공동묘지로 租借되었다.

 

이후 1906년 일본인 공동묘지는 복병산에서 谷町으로 이전되었다. 일본인의 급속한 부산의 유입으로 이에 따른 시가지 확장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부산은 산이 70%정도로 많아 평지가 부족하였다.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하여 토지를 늘렸다. 복병산을 깎아 바다를 메웠던 것이다.

 

아미동이 일본인을 위한 공동묘지로 변화되는 가운데, 공동묘지 인근에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전관거류지 서쪽 조선인 거주지를 침탈하여 신시가지를 건설하자 조선인들은 곡정 초장정 남부민정 대신정 영주정등의 산동네로 이동하였다.

 

이렇게 아미동은 묘지와 조선인들이 공존하는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아미동


 

아미동의 인구가 늘어난 것은 부산으로 몰려온 피난민과 농촌 유랑민 때문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피난민들이 거주지로 돌아갔지만, 1952년 흉년등 자연재해로 농촌에서 몰락한 유랑민과 경남지역과 거제도에 수용되었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은 아미동등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일본인 공동묘지에 집을 지었다. 묘지라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몸 누일 공간이 필요하였다. 묘지 또한 그들에겐 사치스러웠다. 게다가 일본인들의 무덤은 집짓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인의 묘지는 파낸 땅 속에 납골함을 안치하고 그 위에 지대석으로 덮는다. 그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차례대로 올리고 상대석 위에 가문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운다.

 

그리고 묘지 주위에 묘지를 둘러싸는 울타리 즉 외책(外柵)을 세운다. 외책은 인접하는 묘와의 경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외책은 일본어인데, 일본묘지를 설명할 때 불가피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술용어의 상당수는 일본어를 차용한 것인데, ‘외책도 예외가 아니다.)

 

평평하게 만들어진 지대석은 집 터 역할을 하게 되고, 외책은 집의 기단으로 사용되었다. 기단위에 천막을 씌우고 기름종이인 루핑이 올라가면, 곧 집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3대 재벌의 하나인 곡물왕 오오이케(大池家)의 묘역도 아미동19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역 중 가장 넓어, 피난민들이 묘지의 외책 위에 큰 천막을 치고 10여 가구가 나누어 집으로 사용하였다. 이후엔 목재를 구해 서까래를 걸치고 위에 군용기름 지붕재인 루핑을 얹어 집 모양을 갖추었다.

 

이처럼 무덤에 천막만 치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온전한 주택의 예가 감천고갯길을 올라가는 좌측에 위치에 있는 주택이다. 2014년 도로 확장공사를 진행하던 중 묘지의 기단위에 집이 온전히 서 있는 건물이 발견되었다. 묘지의 석축은 옆 건물의 기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묘석도 건축의 재료가 되었다. 비석이나 상석으로 석축을 쌓아 주택의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이 들어섰다. 또 묘지의 옹벽을 벽의 일부로 이용하여 주택을 세운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정회영)

 

그후 1970년대 새마을 운동등의 영향으로 루핑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공간은 협소하였다. 기존공간을 유지하면서 건축자재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미동 사람들은 여름이면 방이 좁아 골목에 나가 자기도 하였다. (공윤경)

 

 

죽음의 경계를 넘어


 

하지만 아미동 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에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아미동이 상징하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 희망을 일구어 갔다. 대표적으로 아미동 산233번지에서 태어나 70년대 유년기를 보낸 전 WBC 세계권투챔피언 장정구 선수는 판잣집에서 삶의 희망을 꿈꾸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 나는 파이터다!에서 아미동을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전쟁에 터전을 잃고 땅 끝까지 밀려온 난민들, 낯설고 척박한 산비탈에 상처난 뿌리를 내리고 살아보려 아등바등 하던 사람들. 주먹 잘 쓰고 큰 사람들이 행세하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던 동네로 술회하고 있다.

 

겨울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는 장정구는 루핑으로 덮은 집에서 생활한 기억을 더듬는다. “루핑이나 함석으로 하늘만 가린 집들은 바람이 불면 통째로 날아갈 듯 들썩거렸고 비가 오면 빗소리가 함석지붕을 두드렸다. 여름이면 볕에 달궈진 지붕이 고기를 구워먹게 지글거렸고 얇은 벽은 옆집 사람의 기침소리 방귀소리까지 다 들렸다.”

 

어린 장정구의 장난감은 또래 아이들과 달리 쥐였다. “골목을 다니면 쥐들이 발길에 차였다. 아미동 아이들에게 쥐는 하나의 장난감이었다. 쥐꼬리를 잡아 빙빙 돌리다 누가 멀리 던지나 시합을 하고 쥐꼬리에 불을 붙이고 놀다가 불을 낼 뻔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라고 기억한다.

 

하지만 장정구의 꿈만은 원대하였다.

 

장정구는 당시 국민스포츠였던 권투에 매료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TV가 있는 만화방등에서 모여 권투경기를 함께 관람하곤 하였는데, 장정구는 김현치, 유제두, 홍수환의 경기를 보며 온통 권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는 경기를 보며 앞으로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할지를 발견한 것이다.

 

목표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난 장정구는 부산의 한 체육관에 입관하여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어떻게 하라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그저 선배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 흉내를 내며 혼자 터득해야 했다. 그래도 마냥 신이 났다. 나는 종일 체육관에서 살았다. 먹는 것보다는 자는 것보다도 권투가 좋았다. 줄넘기 줄이 마룻바닥을 치는 소리도 좋았고 샌드백을 두드리는 소리도 좋았고, 체육관에 꽉 찬 땀 냄새도 좋았다.”

 

이렇게 그는 권투가 좋아 운동을 하였고 자연스레 세계챔피언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고 강해지고 싶었고 상대가 누구든 이기고 싶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정말 15차 방어를 한 WBC세계챔피언이 되었고, 슈거레이 레너드 · 알리 ·조 프레이저도 하지 못한 자신의 스위치 복싱을 만들어냈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공간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죽음위에 집을 짓고 죽음의 경계를 넘어 삶과 희망을 꿈꿔 온 아미동 사람들. 미인의 눈썹을 뜻하는 아미동은 고통이 잉태한 결과로 의연하고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다.

 

<참고문헌>

정회영(2015),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주거공간 발생 및 변화과정,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차철욱외(2010), “아미동 산동네의 형성과 문화변화”, 문화역사지리 제22권 제1

공윤경(2011), “아미동 마을의 공간과 구조”, 이향과 경계의 땅 부산의 아미동 아미동사람들

유승훈(2011), “이만석 살아있는 아미동의 역사”, 이향과 경계의 땅 부산의 아미동 아미동사람들

유승훈(2011), “이향과 경계의 땅 아미동 아미동 사람을 말하다”, 이향과 경계의 땅 부산의 아미동 아미동사람들

장정구(2008), 나는 파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