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횃불을 든 팔을 높이 치켜든 자유의 여신상과 먼 발치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남자의 뒷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 남자가 그 간의 삶의 괘적을 묵묵히 회상하는 듯한 장면이다.
이 프롤로그는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치켜든 횃불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이민 온 폴란드 여성의 아메리칸 드림이며, 이를 바라보는 남성이 그녀가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적지 않은 관여를 하였다는 암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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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는 깨끗하고 우아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들어오는 배에서 남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살아남아 자신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치고 몸을 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라면 한 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할 것이며, 그녀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녀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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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장르는 멜로이다. 하지만 단순한 낭만적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아픔의 궤적에 등장하는 치열함이다.
세 남녀, 에바(마리옹 꼬띠아르)· 브루노(호아킨 피닉스)· 올란도(제레미 레너)의 삼각 연애담은 단순한 사랑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 생존에 대한 욕망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그래서 이들이 얽히는 장면들과 대화는 섬뜩하고 소름 돋는다. 이야기는 미스테리 스릴러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개연성의 씨줄과 날줄이 촘촘하여, 인물들의 갈등은 날 것 그대로 펄펄 끓어 오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이민자의 아픔에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또 다른 ‘이방인’들의 분노와 눈물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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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살아남기 이야기는 에바의 착근을 위한 여정으로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에바는 사랑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두 남자, 브루노와 올란드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브루노의 그녀에 대한 애정 표현은 투박하고 거칠다. 그는 그녀를 돈 벌이 수단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그러니 그가 위로의 포옹을 하여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밀친다. 하지만 그에게 기대면 생존은 유지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또 다른 남자, 마술사 올란도는 예의바르고 로맨틱하다. 에바와의 첫 만남에서 장미꽃으로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을 열고 그와 사랑이 담긴 입맞춤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공기같이 가벼워 언제든지 날라 갈지도 모른다.
에바의 선택은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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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얼룩을 남긴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이 땅에서 살아남기 단계를 넘어 성스러운 구원을 이야기한다. 마치 도스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구원의 방식을 연상하게 한다.
이 영화에서 죄의 깨달음이란 자신의 도덕과 선의 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의지, 노력 그리고 삶의 성찰로 영혼의 정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와 벌’에서 순수한 여성 소냐의 감화와 사랑이 라스콜리니코프를 깨달음으로 이끌듯이, 에바의 죄의식의 발견은 브루노의 서툴지만 진심어린 사랑의 힘이다.
구원은 누군가가 자신에 둔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에 대한 발견에 달려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나의 신음이 곧 그의 아픔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더 이상 망망대해같은 세상에서 홀로가 아니다.
그녀가 이 거친 세상에서 횃불을 높이 치켜 올리고자 할 때, 그는 소리 없이 곁에서 그녀를 감싸주고 상처를 싸매준다.
우리들 곁에는 늘 ‘브루노’가 있다.
(9월3일 개봉, 드라마 미스테리 멜로, 117분, 감독: 제임스 그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