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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체주의의 독재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나? ; 영화 <에너미>리뷰

이 영화는 일견 chaos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영화 시작부에 ‘해독되지 않은(undeciphered) 질서는 곧 혼돈이다.’라는  문구를 관객들에게 던지며, 관객들의 지적인 수준을 시험한다. 이 영화의 질서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감독의 우월감이(?) 엿보인다.

 

그런데 영화의 진행이  전개 단계라고 느끼고 있는 중에,  돌연 공포스러운 오브제가 프레임 전체를 채우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충격과  굴욕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의 우월감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아무리 스릴러장르 중 미스터리물일지라도 영화 후반부에는 ‘what’, 즉 사건의 실체와 감독의 의중이 파악되도록 구성되는 영화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에너미>는  전통적인 영화의 서사인 발단, 전개, 결말이라는 문법을 무시한 듯한  영화 같았다.  이야기를 펼쳐 놓기만 하고 수습하려 들지 않은 듯 했다.

 

영화를 함께 관람한  관객들도 그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그 자리는 평론가와 기자들을 초대해 연 시사회였다. 

 

 

◆ 머리만 아픈 미스테리물?

 

혹자는 말한다. 스릴러장르를 구분하면서 머리가 아프면 미스테리, 가슴이 놀라면 서스펜스라고. 이 영화는 그저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또한 이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각 흩어져있는 단서를 연결해도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렵다. 심오한 논리가 무엇인가는 둘째치고,   이 영화의 수수께끼조차 모른다는게 문제였다.

 

하지만 차분히 다시 영화를 복기해 본다. 두 대립되는 인물간의 차이점이  발견되면서,  이 영화가 서서히 독해되어간다. 이 영화의 order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혼돈에서 질서의 세계로의 진입은 휘발적인 유쾌함과 차원을 달리하는  착상되는 즐거움이다. <에너미>는 또한 관객들에게  수확의 기쁨을 선사한다. 이 수확은 미래 닥쳐올 의문에 대한 해답의 원재료가 된다. 그래서 <에너미>는 mustsee movie이다.


 

◆ 이데올로기
  (※이후의 글에는  스포일러 듬뿍.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영화는 일반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감독의 판단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편향성을 포함한다. 특정한 행위, 모티브를 불쾌한 것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구이며, 왜 이것을 했는가라는 미스테리물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감독이 배격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에 집중한다.  이러한 감독의 편향은 이 사회의 지배강령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감독의 일련의 특정한 가치관을 나타낸다.

 

영화의 톤은 회색이며 어둡다. 도시는  잿빛이다.  첼로의 음울한 음률이  울려 퍼진다. 이 잿빛의 미장센은 감독이 묘사하려는 이데올로기의 일면을 가늠하게 한다. 

 

영화의 발단에 주인공인  역사학과 교수 아담이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강의하는 내용을   반복 보여줌으로써 , 이 영화가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현대판 전체주의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일부 언론을 통해  지배이데올로기가  전파되어지는 사회,  독점기업이 경제를 지배하는 시장,  관료들의 공고화된 힘으로 의사결정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보다 효율성에 기초한 경제 제일주의등, 현대판 시장 전체주의의  이론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라는 가치를 압도하고 있는  현실을 압축된 묘사로 그려나간다. 


 

◆ 전체주의의 폭력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나?

 

이 영화의 전체 전개는  전체주의의 묘사보다 어떻게 현대판 전체주의가 만들어졌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감독은 이는  각 개인에 내면화, 잠재화되어있는  폭력성에 기인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감독은 인간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독재성이 어느 누구에게도 잠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실증하기 위해   겉모습은 똑같으나,  가치관은  다른  두 인물을 대비시킨 후,  사회에  전향적인 의식을 보유한 자도 결국 독재성에 종착함을 묘사한다.

 

즉 감독은  이 영화에서  쌍둥이 같은 두 인물(아담과 앤소니)의 만남을 스토리의 기둥으로 세운다.   이 둘은 목소리, 외관, 심지어 가슴의 흉터까지 동일하다. 그래서 그들의 아내와 여자친구조차 이 둘 중 자신의 남편, 남자친구를 구별해 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다르다. 우선 직업이 다르다. 아담은 역사학과 부교수이다. 평소 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는다. 그리고 특별한 취미활동도 없다.  그는 전체주의를 강의하고,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통제됨을 비판한다.

 

반면 앤소니는 자유로운 가치관을 지닌 배우다.  점퍼를 입고 이동수단으로 바이크를 탄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배반하고 다른 여자를 만난 경험도 있다.  영화 도입부에 앤소니가  섹스쇼 업소에서 쇼를 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아담도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범한다. 실제 아담과 앤소니는 대립되는 가치체계를 보이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아담의 독재성은 앤소니와 거의 흡사해진다. 그의 위선과 허위가 폭로되면서, 아담은 앤소니에 동화되어간다.

 

앤소니가 아담에게 자신의 여자 친구인 메리와 하루를 즐길 수 있도록 옷과 자동차열쇠를 넘겨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에 아담은 선선히 응한다. 그리고 앤소니의 집을 무단 침입해 앤소니의 아내 헬렌과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 앤소니가 다니는 업소의 키를 받고 앤소니와 똑같은 행위를 하려든다.  아담이 앤소니고 앤소니가 아담이 되어 버린다. 아담은  야비함, 탐욕, 불충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존엄과 자유에 옹호하는 자가 아닌, 폭력·위선·독재 이데올로기에 순응한다. 그는 이제 외관뿐만 아니라 내면도  앤소니의 그것을 복제한다.

 

감독은 이러한 개인의 폭력성과 독재성이 현대판 전체주의가 등장한 배경인 점을 강조한다.

 

 

◆ 거미

 

이 영화의 상징 오브제는 거미이다. 전체주의의 사회는  국가라는 미명하에 개인과 국민위에서 군림하는 사회이다. 국가의 경제성과 효율이라는 슬로건 하에 개인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비용이 무시당한다. 그리고 국가는 거미의 거미줄처럼 자신에 충성하는 언론과의 네트워크, 대기업과의 공생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또한 정치인들은 선거 댓글 실명제등을 여전히 유지하며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누른다.

 

이러한 공생네트 워크, 그리고 통제의 네트워크를 거미의 거미줄로 비유 할 수 있다. 

 

아담 앞에 이 영화의  오브제인  거미가 거대하게 등장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명시성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불친절함이 존재하나,  이러한 묘사방법은 그 혼돈에서 질서가 파악되었을 때 여타의  노골적인 선전영화보다 더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그 미망으로부터 탈출할 때, 도덕적 설득력은  우회적으로 강력해진다.


유사한 플롯에 식상한 관객들이나 영화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기르고자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머리를 쥐어짜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5월2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