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영화

[노예제] not to survive, but to live : 영화 <노예 12년>리뷰

 

우리가 지금   두 사회로 갈리는 갈림길에 놓여있다고  가정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는 경제적인 절대적 결핍은 없다.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이 영원히 보장되어 있고, 하루 세끼도 영원히 주어진다. 단 자유는 없다. 주인의 재산이 되어, 평생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  거주나 여행의 자유도 없다. 운 좋으면 인간적인 주인을 만나 애완견처럼 대우 받을 수 있다.

 

그 반대 쪽에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다. 신분이 자유로운 것이다.  단 언제든지 해고 될 수 있고 자칫하다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든  경제적 어려움에 몰릴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들에게 한 쪽을 선택하라면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까?

 

남북전쟁 발발 전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노예 12년>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물론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노예의 인권과 주인들의 폭력에 초점을 두고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질문을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다. 더 나아가 감독의 말처럼 살아남기(survive)와 살기(live)의 선택에 대해 질문한다.

 

 

◆ 노예제와 자유주의

 

우리에게 갈림길에 놓여진 두 사회는 노예제와 자유주의다.


노예사회는 노예가 생산수단으로 역할을 한다. 생산의 도구인 셈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잘 보이면 애완견이 될 수도 있다.


지만 철저하게 주인들로부터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 그들은  주인들이 다니는 식당에 들어 갈 수 없고,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저 열심히 주인들의 명령에 순종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지속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또 다른 사회는 자유주의다. 임노동이 존재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한다. 하지만 그는 자유이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며, 자신이 모든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이다. 하지만 삶의 곤궁이라는 리스크가 따라 다닌다.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두 사회를 두고 각 사회에 속하는 자들이 치열하게 자신의 진영을 옹호하는 논리를 펼쳤다. 다름 아니라 1800년대의 신생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각 진영들이 위의 논리로 자신들을 옹호하고 상대 진영을 공격하였다.


남부는 면화등 대농장의 농업에 근거한 산업구조로 노예의 노동력에 기초한 사회였고, 북부는 공업중심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자본주의가 정착된 산업구조였다. 양 진영들은 서로의 약점을 서로 공격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  남부 : 노예제 찬성론자 – 적극적 선

 

노예제도를 수호하려는 자들의 논리는 성경이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노예제도의 발생이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명백히 기록되어있다고 주장한다.

 

노예 찬성론자들이 대표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이론이 ‘함이 받은 저주’이다.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을 때, 노아의 아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두 형제는 노아가 누워있는 장막에 뒷걸음칠 하여 들어가, 옷으로 노아의 벗은 몸을 덮어주었다. 노아는 잠이 깬 뒤 이 사실을 알고,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며 가나안의 함 족속들이 셈 족속의 종이 되도록 명하게 된다.  이 성경구절들에 근거하여 성경이 노예제도를 정식으로 용인하였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대농장의 주인 엡스는 노예를 착취하는 논리로 성경의 누가복음 12장 47절을 인용한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노예들 앞에서 이 구절을 읽은 후 그는 성경을  휘두르며 “이것이 성경이다.”라며  이후 성경의 이 자구 그대로 그의 노예들을  사정없이 때린다. 

 

남부인들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또 다른 논리가  적극적 선 (positive good)이다.

 

그들은  노예제 찬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이론을 내세운다.  

 

우선 정치적으로 군주제에 대립되는 민주적인 공화제에도 노예제도는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에는  대표가 국민들로부터 선출되는 공화정임에도 노예제도는 존재하였다는 점을 언급한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남부의 노예제도가 북부의 자유노동제 보다 더 좋은 제도라고 강조한다. 자유노동은 노예제도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작은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하고 해고에 무방비상태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 앞에  자유란 공허하고 기만적인 헛된 장난이라며 노예반대론자들을 비난한다.

 

또한 종교적으로 그들은 노예주인들이 진정으로 기독교 정신을 받아들인다면, 더 좋은 주인으로 노예들을 가족처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논리는  ‘적극적 선‘이론이다. 주인과 노예는 인정으로 얽혀진 인간관계를 맺고, 가부장적 보살핌 속에서 노예들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부 노예들의 생활여건이 프롤레탈리아의 상황보다 낫다면서, 자본주의를 공격한다.  이 이론은 그 당시 논리적 설득력을 얻어 유럽의 역사가들에게 영향력을 주었다. 


 

북부 : 노예반대론자  - 황금률 ( the  Golden Rule )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논리를 마태복음의 황금률에서 찾는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또한 성경을 협의로 자구에 매달리는 오류를 포기하고, 성경전체의 맥락에서 광의로 그 핵심을 간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핵심은 타인에 대한   폭력과 지배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유의지라고  강조한다. 

 

이들은 자유는 생명에 버금가는 소중한 것이기에 아무도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하나의 혈통’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흑인들도 다 같은 자손이었으나, 지리적 환경으로 백인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제 옹호론자들을 역사적 의식이 없고 근본적으로 인륜에 위배되며, 비도덕적으로  타락한 군상으로 인지한다.


◆ not survive, but live

 

여기서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노예옹호론자들은 생물학적인 접근인 다윈의 진화론에 힘입어 백인우월주의를 논리의 기초로 둔다. 이 우월주의는 다인종설에 근거하여, 인간은 모두 아담 의 자손이라는  내용을 부인하고, 종교적 인종주의에 기대고 있다.

 

백인은  우월한 존재이므로 그들이 미개한 흑인들을 계몽하여 그들을 문명과 종교의 곁으로 인도해야한다고 강변한다. 노예제도가 없다면 그들을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혜로운 존재이며, 따라서 흑인들은  영원히 백인을 섬겨야한다고 주장한다.  지배자인 백인이야말로 개량된 인종으로써 정당히 흑인을 지배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노예제도야말로 노예들에게 온정이 가득한 제도이다.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애정을 주는데,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노예들에게는 그릇된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위선이며 기만이다.

 

여기서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위의 주장처럼  가치를 각자의 만족과 효용에 근거한   주관적 판단으로 평가해야 할까?

 

모든 인간은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주장이 성립된다면, 흑인도 백인에게는 동족인 셈이다. 여기서 우월과 열위라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왜곡과 편견이 된다.

 

또한 가치를 협의에 근거한 선택적인 접근이 아닌 전체의 흐름과 문맥에 의존하여 삶의 가치를 판단한다면, 다인종주의와 더 나아가 다문화주의가 뿌리내리는 사회가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우리의 삶의 본령이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자유는 위선과 기만이 아니라 소중한 가치로 위치 매김한다.

 

이렇게 되면 ‘살아남기’의 문제 대신 ‘살기’의 문제로 핵심이 전환된다.

 

그래서  자유의지와 동등함이란 가치가 종속의 사슬을 끊게 한다. 노예의 발에 묶인 사슬로부터의  해방이 인간 본연의 타고난 형상이라는 진실에 접근하게된다. 우리가  누구의 재산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소유자임을 깨닫는다. 굴종의 만족은  고귀한 자유의지에 자리를 양보한다. 

 

현대의  노예제는  계층 사이에, 지역사이에,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군림하여, 차별과 우월주의의 그림자로 존재한다.

 

이러한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남기’에 만족한다면 영원히 그 그림자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그 그림자를 거두는 일, 현대판 노예제의 장막을  찢는 일, 그래서 ‘살아남기’가 아닌 ‘살기’에 충실히 봉사하는 일이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단일 인종주의에 근거하여 자유의지를 고수한다면, 이에 대한 우생학적 다윈주의는 철폐되어야한다. 모두가 동포이므로 서로의 현대판 인종주의 대신, 흑백이 어우러지는 조화와 평등이 구현되어야한다. 누가 누구의 위에 군림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함이 아니라 살기위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