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이래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추진되어 온 한국의 남북 통합정책이 실효성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50여년간의 남북통합정책은 전쟁위험감소와 평화유지에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북핵위기를 조장했다는 겁니다.
과거 한국의 남북통합정책은 대체로 ‘기능주의’에 기반하였습니다. 따라서 한국이 추진한 남북통합정책들의 좌초는 곧 한반도에서의 기능주의의 중지 또는 좌초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기능주의가 한반도에 효과적으로 적용되지 못한 이유가 한국과 북한간의 이념정향의 대립에 기인한다고 지적합니다.
◆기능주의란?
기능주의 통합논리의 핵심은 국가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습니다. 그 방식은 비정치적 분야들의 spill-over effect와 관련됩니다.
기능주의(Functionalism)를 처음 소개한 미트라니(David Mitrany)는 주요 비정치적 요소들의 교류가 먼저 이루어지면, 이러한 비정치적 파급효과가 정치분야의 평화와 안정을 촉발하고, 그 결과 두 체체 간 정치적 통합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 간 통합을 추진함에 있어 양측의 기능적 협력이 발생할 경우, 협력적 성공 모델이 타 분야로 전파·확산(ramification)하여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미트라니가 기능주의를 주장한 근거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상호교류가 우선 이루어져야 하고, 이러한 비정치적 분야의 긍정적 효과가 다루기 어려운 정치적 통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기능주의의 핵심은 ‘정치 분야에서의 통합 기능, 즉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 기술협력 등이 확산효과(spill-over)를 창출하여 정치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전쟁과 갈등을 방지하고 궁극적으로는 평화적 공동체 통합에 이르게 된다는 관점’입니다.
◆ 한국 역대정부들의 기능주의 통합정책
한국의 대북정책은 오래전부터 기능주의에 입각한 정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민족적 대단결에 의한 평화통일을 천명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이는 1973년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통해 남북연합의 공존을 통한 공동체 형성을 제안하였고, 1991년 남북교류협력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기능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영삼정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도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을 상정하였고, 이 방안도 기능주의에 기반하였습니다.
대북정책의 기능주의는 7.4남북공동성명을 모태로 한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에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적극적인 교류와 접촉확대로 북한을 변화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도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하여 남북관계개선, 한반도 평화정착을 추구하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여 평화적 대화 협력과 남북 경제협력을 통한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역대 정부들의 대북정책은 정치 군사영역이 아닌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협력에 출발하는 기능주의의 통합이론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데 북한과의 비정치적 이슈에서의 협력(통합)이 정치적 협력(통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감에 따라 기능주의의 적용의 현실성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북한은 비핵화 대신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2017년 6번째 핵실험을 감행하여, 핵무기 완성에 박차를 가한 것입니다. 북한의 이러한 행위는 민족 대단결과 평화에 대한 염원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비판을 초래하였고, 기능주의에 기반한 통합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야기하였습니다.
현재 북한은 미국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의 완성에 근접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을 만큼 북한의 핵고도화는 한국과 서방의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치적 갈등이 비정치적 분야의 협력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실효성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 기능주의 좌초 원인
그렇다면 기능주의가 좌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주요 요인으로 한국과 북한간의 정체성의 대립이 꼽히고 있습니다.
① 북한의 한반도통합에 대한 최종목표(이념정향)
우선 북한의 한반도에 대한 최종목표는 무력에 의한 한반도의 적화통일입니다.
이러한 전략목표는 노동당 규약 서문에 북한 노동당의 당면 목적이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있다며, 북한의 대남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김일성 김정일주의화’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9조도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과 북한의 정치적 갈등의 근원인 북한의 핵 문제는 애시당초 남북한 평화 협상의 테이블에 오를 수 없는 항목이 됩니다.
이유는 북한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실효적이며 사활적인 수단이 재래식 전력의 질적 열세를 극복하는데 기여하는 핵과 미사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핵억지력은 정권에 군사적 자신감을 심어주어, 체제의 생존을 지탱해 줄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반도공산화의 디딤돌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서입니다.
결국 북한과 남한의 평화적 통합은, 북한의 이념적 정향이 전한반도 인민민주주의인 한, 아무리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가 이루어질 지라도 궁극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②한국의 한반도통합에 대한 최종목표 (이념정향)
북한의 대남 최종목표가 한반도 전체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면, 한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한반도 전체의 통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목표는 헌법 제3조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이는 우리헌법의 법적 규범력 또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공간적 범위를 규정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주권이 북한지역에도 적용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조문의 해석에 따르면, 북한지역은 대한민국의 영토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헌법 제4조는 북한 체제의 기반인 사회주의혁명을 부정합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이처럼 한국의 이념지향은 전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 실현입니다.
이런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의 전한반도의 공산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대남정책과 한국의 자유민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정책은 한 공간에서의 병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한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 역도 참입니다.
진실은 북한의 정체성인 인민민주주의와 한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간에, 어떠한 정체성이 한반도에 살아남는가라는 치열한 사상의 전투만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최근 북한이 내세운 한반도 ‘2개 국가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북한이 최근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민족’의 개념으로부터 ‘2개 국가론’으로 전환한 것은 대한민국을 같은 민족이 아닌 교전중이 적대국가로 규정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한국에 대한 핵사용은 민족이 아닌 적대국 한국에 허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러한 북한의 새로운 대남 스탠스는 한국의 긴장감있는 대처를 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한국과 북한 사이의 정체성 우위와 관련한 대립이 Zero-Sum Game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비정치적교류의 성공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안정으로 확산된다는 기능주의는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좌파진영이 추진하고 있는 대통령탄핵 사유의 하나로 윤대통령의 ‘전쟁위기조장, 평화통일 위반’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 항목은 자칫하면 한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한에 동조하는 주장이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전쟁위기가 현정부의 공격적 현실주의에 촉발된 것이라는 좌파진영의 추측은 진실에서 이탈된 북한동조적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고래로부터 한반도 전체의 인민민주주의화를 대남목표로 내걸어 왔고 한국도 한국헌법의 원리가 한반도 전체에 적용되는 것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양측의 이념적 정향성을 둘러싼 충돌은 불가피하고 양측의 병존은 이론적으로 불가하다는 현 상황에 기초해 볼 때, 일방의 전쟁의 위기조장 주장은 또 다른 일방을 편드는 태도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이는 국가보안법위반의 소지도 다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능주의의 한계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기능주의는 과연 폐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기능주의는 정치적 갈등이 협력(통합)에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내재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정치적 분야의 협력(통합)이 반드시 정치적 협력(통합)으로 파급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기능주의자들은 장기적 통합관점으로 대립관계를 바라볼 때, 기능주의적 실효성은 높다고 주장합니다. 독일의 통합과정도 약 40여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대립하는 국가간의 공동활동(coactivity)이 긴 호흡으로 추진되어 간다면, 통합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공동활동은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국가와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리며 일하는 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활동을 말합니다.
예컨대 ‘분권형 대북정책’이 공동활동을 실현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중심의 대북정책이 교착상태에 놓여 있을 때, 지방자치단체가 남북한 교류협력에 참여하여 공동활동을 마련해주는 것은 한국과 북한 간의 협력의 중단을 해소 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통합의 물꼬는 원론적으로 일방이 타방의 생산력을 압도할 때 가능합니다.
맑스의 지적대로, 생산관계의 변화는 생산력의 변화에 의해 가능하듯이, 한 공동체의 생산력이 압도적이라면, 그 생산력이 타방의 생산관계를 변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방안이 경쟁에 기초한, 점진적이며 가장 현실적인 통합정책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간 협력을 위해선 신기능주의의 도입도 필수적입니다.
신기능주의(Neo-Functionalism)의 대표학자인 하스(Ernst B. Hass)는 협력(통합)이 비정치적·비군사적 차원의 공동의 관심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수요와 필요가 반드시 협력(통합)으로 이어지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하스는 한 분야에서의 협력이 다른 분야의 협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치가등의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기능주의에서 제시된 자연스러운 확산효과는 정치행위자들의 의도와 결정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겁니다. 즉 기능적 교류·협력과 정치적 통합은 정치인등 정책결정자들의 의지에 의해 기능적·정치적 파급효과(spill-over effect)가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하스는 기능적 협력을 주도하는 정책행위자가 자신감을 갖고 실천의지와 능력을 발휘하여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 통합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이론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평화통일은 신기능주의적 접근방식에 근거하여 정책결정자가 자신감을 갖고 인내심있게 교류협력을 추진해 갈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책결정자의 자신감은 공동체의 압도적 생산력에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통합은 생산력의 제고라는 과제로 수렴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생산력의 제고는 저출산극복에도, 한반도의 통합에도,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만능 열쇠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참고문헌>
이종엽, 정주호, “한국정부의 기능주의 대북정책 한계성 및 대안모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