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로운 행위, 배분적 정의
헌법 제11조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합니다.
여기서 평등은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 모두를 포함합니다.
전자의 평등은 인간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을 말합니다. 예컨대 투표권은 부의 크기, 지위의 고하,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하는데, 차별없는 투표권의 부여는 절대적 평등의 실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평등은 배분적 평등을 의미합니다. 이는 동등한 사람이 똑같은 배당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받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상대적 평등, 곧 배분적 평등이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익과 부담은 가치, 능력, 처지에 걸맞게 배분되는 것이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달리 표현다면 모두 똑같게 배분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배분적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좌파진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보편적 복지는 정의로운 복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국가 상위 1%부자와 최소수혜자에게 동일하게 25만원을 지급한다면, 이러한 이전지출은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 됩니다.
이같은 좌파진영의 보편주의는 자기모순의 한 실례입니다.
좌파진영은 정의와 공정을 모토로 내세웁니다. 그런데 같지 않은 범주들에게 같은 이익을 제공하는 보편주의 복지는 배분적 정의와 평등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들의 스탠스라 주장하는 좌파진영이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모순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겁니다.
( 생각건대 좌파진영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선거 전략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보편적 복지는 정파적 이익과 관련된 전략입니다. 그 실례가 스웨덴에서 발견됩니다.
보편적 복지의 원조는 스웨덴입니다. 스웨덴의 복지정책은 애초 취약계층을 타깃으로 하였는데, 중산층의 약자복지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중산층으로 확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좌파진영의 보편적 복지는 선거에 유리한 전략으로 이해됩니다. )
◆ 우파공동체에서 정의로운 배분이 되지 못하는 이유
우파진영도 배분적 정의와 어긋나는 행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좌파진영과 오십보백배입니다. 이러한 실망스러운 모습은 국민의 힘의 최근 전당대회 준비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익과 부담은 공적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하는 배분적 정의입니다. 선거에도 이와 같은 논리가 적용되어야 정의로운 선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후보의 능력과 가치를 척도로 하여 표를 배분하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데도 유권자들이 후보의 공적과 가치 대신 파벌을 쪼개어 자신의 정파의 후보에 표를 몰아주는 부정의를 범한다면, 이는 정의롭지 못한 배분적 행위에 해당됩니다.
유권자들의 정의롭지 못한 선거행태는 나름 이해되기도 합니다. 자신을 낮추어 국민과 공감하는 후보가 보이지 않고, ‘공감적 보수주의’를 이끌기 위한 토대인 공감적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구비하고 있는 후보도 발견되지 않아서입니다.
후보들은 하나 같이 서울대 출신에, 소년 소녀 급제를 한 엘리트들로, 선민의식에 젖어, 형식과 기표는 겸손이나 실질과 기의는 오만인 모습을 보이는 듯합니다. 이들이 여름과 사투하는 쪽방촌 어르신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지, 하루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지, 심히 의문시 됩니다.
후보들이 공감적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나경원후보는 다소 극우적인 성향을 보여왔습니다. 윤상현후보는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원희룡후보는 리더의 태도에 어울리지 않게 주위의 의지에 갈대처럼 휘둘리면서 자신만의 컬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동훈후보는 보수주의의 대척점에 위치한 서구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인사들과 교류가 있거나 이들을 참모로 두고 있는등으로, 본인도 자신이 무슨 색깔인지 잘 모른 채, 흑묘든 백묘든 쥐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이처럼 보수공동체를 이끌 매력적인 후보가 부재하다보니 투표 의사결정 기준은 파벌의 오더가 됩니다. 정의로운 배분이 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체득하고 이를 지키며, 국가의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보이며,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보이며, 특히 부하의 곤경보다 국민의 아픔에 뼈 속 깊이 더 공감할 수 있는 등, 이러한 가치를 장착한 새로운 보수의 리더를, 보수공동체는 갈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습한 날씨처럼 보수공동체의 앞날이 축축하고 쳐질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면, 기존의 리더후보들이 각성하든지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새로운 리더를 찾아야 하는건 아닌가라는 물음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