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크의 인간관 – 추상적 이성의 배격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1729~1797)는 보수주의의 鼻祖로 알려져 있는 영국출신의 정치사상가입니다.
그의 사상적 기초는 그의 인간관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적 본능적 본성에 충실한 인간관을 옹호하고, 추상적 이성에 의해 지배받는 추상적 인간관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버크는 이성을 적용범위가 제약된 불안정하고 불확신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성을 추상적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간주한 까닭에, 이성 곧 사변에 의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여러 세기를 이어 내려온 전통과 경험을 폐기하고 인간의 추상적인 이성에 호소한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회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복잡한 것인데도, 프랑스대혁명은 제한된 이성에 기댄 추상적 원칙과 가설을 내세우고 이에 따라 연역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 버크가 이상적 추상적 이론을 배격한 이유
버크가 개인의 이성적 추상적 이론을 배격한 것은 제한된 능력만을 보유한 인간 개인이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 관계하는 복잡한 사회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개인의 이성과 집단적 역사적 지혜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이라는 각 개인의 재산만으로 생활하고 교섭하게 될까 우려한다. 각 사람의 재산은 빈약한 것이어서 역사라는 보편적 금융과 자본의 혜택을 활용하면 형편이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flections on the revolutions in France)
결국 개인이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도록 한다면, 장구한 기간에 걸쳐 탁월하고 존경할 만하다고 여기는 의견은 무위로 돌아간다고 보았습니다.
◆ 버크의 편견의 옹호
이러한 추상적 이성에 대항하는 버크의 사상적 입장은 편견의 옹호입니다.
편견이란 어휘는 라틴어 ‘prae-judicium’인데, 전에 행한 결정과 경험에 기초한 판단 또는 선례를 의미합니다.
즉 편견은 개인의 이성적 사고에 회의를 품고 경험주의에 동조하여 전통의 지혜에 근거하여 합당한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버크는 편견이 이성보다 더욱 확실한 도덕적 정치적 지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편견이 지혜를 가져오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본능적 공감에 의한 모방을 통해 의견과 태도가 형성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 공감을 통하여 타인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감에 의한 모방을 통해 형성된 편견은 오랜 세월의 경험과 전통으로 축적되어, 인류가 자연적으로 형성한 집단적 지혜로 자리잡습니다.
집단적 지혜는 인류의 현명함으로 연결됩니다.
버크는 전통에 녹아있는 인류의 지혜를 강조하기 위해, 개인, 다중, 그리고 인류를 현명함의 측면에서 비교합니다.
버크는 개인은 어리석으며 그리고 다중은 신중히 행동하지 않을 경우 얼마 동안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현명하며 충분한 시간이 주어 질 경우 거의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한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편견은 본능적이고 의식적인 ‘집단적 인간지성’(collective human intellect)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편견이란 단어는 ‘인종적 편견’등에서 보이듯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편견이라는 단어를 인용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이 편견으로 매도해 버린, 많은 사람들의 의견 속에 들어 있는 잠재적 지혜에 주의를 환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편견은 정당한 편견을 말합니다. 편견이 현명하고 정당한 경우에만 인류는 그것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렇듯 편견은 이성, 이론, 추상적 사고보다 더 확실한 인류의 삶의 길잡이가 됩니다.
◆ 추성적 이성의 속박을 끊으며
“ 눈을 떴을 때 막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려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누워 있었는데, 내 사지가 각각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내 머리카락, 길고 숱이 많은 내 머리카락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묶여 있었다. 겨드랑이에서 허벅지까지 내 몸뚱이까지 가느다란 띠 몇 가닥에 묶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선을 오로지 위로만 향할 수 있었다.” (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소인국 난쟁이들이 가느다란 띠들로 자신의 몸 전체를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을 바라볼 수 없고 오로지 위만 응시할 뿐입니다.
이 풍자의 초점은 걸리버를 묶어 놓아 한 방향만 바라볼 수 밖에 없게 한 속박의 사슬이 무엇인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버크의 보수주의 사상을 이 우화에 대입해 본다면, 그 사슬은 추상적 이성이라는 굴레입니다. 추상적 이성이라는 끈이 걸리버를 묶어 놓아, 한 방향만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걸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를 둘러 볼 수 없게 됩니다. 추상적 이상이라는 끈이 자신을 묶어 놓아, 유연한 판단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재단을 연상하게 합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해 사람의 키와 침대 길이를 맞추기 위해, 침대 길이보다 큰 사람은 다리를 잘라냅니다. (제시 노먼)
그런데 이러한 프로크루스테스의 방식이 현실 문제 해결에 실제 동원된다면, 이는 혼돈과 오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오히려 맥락지향적이며 상황지향적이기 때문에, 추상적 이성에 의한 간결한 식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앞의 글은 추상적 이성에 기대어 법칙을 만들고 이를 현실의 삶에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은 오류나 논리적 실수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주어진 추상적 이성이 상황과 맥락이 얽혀져 있는 문제에 변용없이 적용되는 것은 모두를 움직이지 못하는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버크는 절대적인 추상적 이성, 원칙, 절대적 일관성등을 인간사에 응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추상적 이성은 맥락 지향적이고 상황 지향적인 삶의 문제에 접근 할 때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이러한 일관성과 추상적 이성으로 재단하려는 의지는 합리성을 벗어나게 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례가 과거 좌파정부가 추진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폐해입니다.
좌파진영의 철학은 프랑스대혁명의 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추상적 이성이 혁명과 유사한 개혁에 의해 현실의 문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실천이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추상적 이성이 명쾌하게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그 효과는 긍정적인 결과보다 국민의 고통만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좌파의 소득주도성장정책은 추상적 이성이 연역적으로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하다는 교훈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득주도성장정책의 결과를 별론으로 하고 ‘좌파가 좌파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일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좌파들은 여한이 없을 겁니다. )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보수주의 정부를 표방하는 윤석열정부가 이러한 프랑스대혁명의 이론과 유사한 방식을 현실문제 해결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버크의 보수주의를 추종한다면, 보수정부는 전통과 경험에 기반하여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여 올바른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보수주의자가 선택해야 할 적용가능한 기준은 추상적 이성이 아니라 과거부터 내려온 축적된 전통과 경험, 즉 집단적 지혜인 ‘편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수정부는 ‘보수가 보수했다’가 아니라, ‘보수가 좌파했다’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련의 사건해법에 좌파진영의 해결방식인 추상적 이성을 동원하는 모습들을 보였고, 경험, 전통, 맥락지향, 상황지향이라는 보수주의의 사상을 배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는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윤석열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6일 기준으로 4주 연속 30%대 초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버크의 사상을 윤석열 정부의 정치에 비추어 본다면, 윤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의 원인은 보수주의의 정부가 보수주의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은 점과 깊은 관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수 세력은 있으나 보수 이념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수주의의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은 보수진영이 보수주의 이념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그저 한국의 보수주의는 1980~90년대 미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와 개입주의의 외교를 지향한 신보수주의의의 아류로 이해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의 보수진영은 무엇을 保守해야 할지에 대해 천착할 때입니다. 이러한 보수의 사상이 현실문제에 적용될 때, 보수진영 더 나아가 한국의 공동체의 안정은 담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박상익, “버크의 보수주의의 사상적 기초”
제시 노먼, 홍지수 옮김,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