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시파시즘(micro-fascism)의 동학
‘미시파시즘’의 개념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해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개념은 푸코(Foucault)의 통찰에 빚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들뢰즈와 가타리(Deleuze and Guattari)가 집필한 「Anti-Oedipus」의 서문에서 파시즘의 미시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략적인 주적은 파시즘, 즉 대중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활용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역사적인 파시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우리의 머릿속과 일상행위에 내재된 파시즘, 즉 권력을 사랑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욕망하게 하는 바로 그 파시즘이다”
이처럼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역사적 국가적 파시즘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푸코에 의하면, 우리 모두 안에 있고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떠나지 않는 파시즘이 존재하는데, 이 파시즘은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욕망을 가지게 하는 파시즘이며, 우리 안에 내재된 파시즘입니다.
미시파시즘, 즉 ‘우리 안의 파시즘’은 국가권력이 개인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개인이 권력과 폭력의 파시스트적 사고에 젖어들어 권력과 폭력의 담지자가 되고, 이 힘으로 공동체 밖의 적과 맞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폭력과 증오의 파시즘은 능동성과 연계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선 폭력성의 원류는 삶의 자발성과 능동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삶에 긍정되는 가치는 자발성과 능동성인데, 이 자발성과 능동성의 요체는 능동적 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능동적 힘은 공격적이고 파괴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괴적 힘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 관점에 설 때, 파괴와 폭력이 공동체에 봉사하고 기여한다면, 그 폭력은 용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파시스트적’이란 말은 긍정적인 삶의 능동성을 생산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인데, 공리주의적 관점에 따른 파시스트적 행위는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에 대한 실례가 북한 주민들의 호전적 반미민족주의의 내면화입니다.
주민들은 미국을 승냥이로 취급하며 미국에 호전적 적대와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국가에 의한 의식화와 자발적인 내면화에 의해 스며든 파시스트적 반미민족주의는 위기에 처한 북한의 체제를 버텨주는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 우리 안의 파시즘
능동성과 관계된 파시즘과 달리, 일상의 삶에서 폭력과 권위를 행사하는 파시스트적 행동도 광의의 개념에서 일상의 파시즘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국가차원의 파시즘과 비교되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개인의 파시스트적 행태는 도처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여성· 아동· 장애인· 빈민등에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행태, 학교폭력, 직장 상사에 의한 성희롱등이 미시파시즘의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집단이 있다면, 이들은 미시 파시즘을 행사하는 파시스트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미시파시즘은 최근 정치권의 좌파 진영에 아비투스로 정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 테면, 좌파 명망가들의 성추행, 당내 선거부정, 86세대 운동권 리더들의 대중에 대한 오만한 태도등, 좌파진영이 행해 온 일상에서의 폭력과 파괴는 좌파진영의 취향이 된 것입니다.
최근 민주당의 국회의원후보 공천과 관련하여 현역의원하위평가의 불공정성 논란도, 미시 파시즘과 관련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의정활동과 지역구관리가 우수했던 의원들이 하위 10%의 평가를 받은 것은 공천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반 페어게임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이러한 불공정성은 정당 엘리트들이 구사하는 미시파시즘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파시즘에 항거했던 좌파진영의 구성원들이 일상의 삶에서 다채로운 모습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자들의 미시파시즘의 습속이 좌파 진영의 독특한 취향으로 자리함으로써, 좌파진영의 순수성과 공동체의식이 단지 허위의식으로 판명된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민주당의 현 주류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해 북한이 체제를 유지시키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체제는 북한주민들의 파시스트적 반미민족주의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체제 유지 방식도 북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개딸이라 불리는 민주당의 근본주의 당원들이 파시스트적 행태로 민주당 주류체제를 지탱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권력과 폭력을 사랑하고 행사하는 파시스트의 전형이며, 민주당 주류의 권력유지에 기여하는 규율권력입니다.
결국 현 좌파 주류들이 권력유지를 위해 파시스트적 폭력과 권력을 행사 할지라도, 개딸· 근본주의 노조· 좌파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등 체제의 호전적 파시스트적 구성원들이 그 체제의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한,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현 좌파 체제는 –북한의 미시파시즘의 사례가 이 점을 입증하고 있듯이- 쉽사리 와해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총선도 우파정당에겐 험난한 도전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농후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