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의 시대
멜랑콜리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우울· 침울· 비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게다가 비애가 기쁨으로 바뀌는 구원의 빛도 찾기 힘듭니다.
멜랑콜리의 시대엔, 멜랑콜리에서 탈출하겠노라 맹세해도 그 다짐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비애를 벗어나게 하는 자유와 기회의 밧줄은 내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상실과 기회의 부족이 발생하게 된 것은 집단 속의 절대평등의 추구과 그 주장의 이면에 숨겨진 개별집단들의 사적욕망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허위의식이 구체제의 질서를 형성하고 이러한 질서의 반복에 의해 단단해진 껍데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유와 조화를 통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고히 한다’(헌법전문)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은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만 남아있게 합니다.
◆ 기적과 예외상태
그렇다고 우리가 멜랑콜리의 노예로만 살아 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동체에 자유와 조화를 불어넣는 기적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부단히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진정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힘은 없단 말인가요?
독일의 법학자인 칼 슈미트(1888~1985)는 그의 저서 「정치신학」에서 말합니다.
“예외는 정상적 경우보다 더욱 흥미롭다. 정상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며, 예외는 모든 것을 입증한다. 예외가 규칙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규칙전체가 오로지 예외를 통해서만 존립가능하다. 예외 속에서 현실적 생명의 힘은 반복 속에 굳어진 기제의 껍질을 부숴버린다.”
슈미트에게 기적은 예외상태와 유사한 의미를 가집니다. 굳어진 질서와 원리의 껍데기를 부수고 새로운 활력을 되찾는 것을 기적이라 한다면, 이러한 기적의 힘은 정상상태가 아닌 공동체의 위기 상황을 의미하는 예외상태를 통해 얻어질 수 있습니다. 예외상태의 힘이 단단한 껍데기를 부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힘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체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예외상태는 더 이상 위급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취급될 수 없고,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외상태를 결정하고 타개하는 조건
우울의 시대에도 기적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복을 낙관할 수 있는 것은 자연상태를 넘어서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적의 창조는, 예외상태를 결단하고 타개하는 주권자의 존재와 그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주권자의 결단은 굳어버린 구질서의 껍질을 깨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권자가 예외상태를 결정하고 타개하는 자라면, 이러한 주권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요?
우선 주권자는 갈등하고 있는 나약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외상태를 두려워하여 과거의 질서를 방기해버리는 자가 아니라, 온 힘을 동원해 껍데기를 깨고자 하는 자입니다.
또한 운명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멜랑콜리에 좌절하는 자가 아니라, 멜랑콜리와 맞서는 자입니다.
특히 공동체의 약자들이 품고 있는 멜랑콜리를 자신에 투사하여 그 우울을 가슴 깊이 공감하는 자입니다.
결국 공동체의 약자들의 멜랑콜리에 대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운명의 질서와 맞설 수 없고 주권자의 자리에 올라설 수 없습니다.
◆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향하여
우울의 시대에 자유와 기회의 평등은 희망을 붙잡게 하는 동아줄입니다.
자유와 기회대신, 집단내의 절대적 평등 추구와 그 속에 숨어있는 리더들의 사익추구라는 위선의 메카니즘이 다시 구축되는 비극은 방지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약자의 슬픔을 진정으로 동감하는 대신 종이냄새 나는 공감만을 실천의 명분으로 자랑하는 구질서는 새로운 질서로 변혁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체제가 구축한 단단한 껍질을 부수기 위해선, 예외상태에서 어쩔 수 없다는 우울의 주술을 씻겨내고자 하는 주권자의 결단과 이러한 결단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지가 요구됩니다.
결국 공동체의 성원들이 지루하게 색이 바랄 때까지 반복되어 온 과거의 질서에 체념하기보다 이를 혐오하고, 주권자가 ‘예외상태가 규칙을 결정한다’는 키케로의 명제를 실천할 때, 단단하고 굳어진 구체제의 껍데기는 파괴되어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라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희망이 샘솟게 될 것입니다.
(이번 수능 문항 선별 논쟁이 대통령의 절차의 거칠음으로 모아지고 있는데, 윤대통령이 수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가 공동체 약자들의 우울을 공감했기 때문으로 이해되어집니다. 또한 그가 과거 만5세 입학의 정책을 제기한 것도 약자들에게 기회를 평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능 문항 본질은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논의에 앞서 기회평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낙관적인 것은 우파인 국민의 힘이 제대로 정체성의 균형을 잡았다는 점입니다. 저울의 오른쪽의 접시위에 자유를, 그리고 왼쪽의 접시위에 기회의 평등을 놓음으로써, 정체성 저울의 균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이번 수능논쟁은 국민의 힘이 중도보수의 정체성을 지닌 정당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