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련 방송보도를 보면, 미국 대중들이 ‘USA!’ ‘USA!’를 연호하는 장면을 간혹 목격하게 됩니다. 대중들의 자신감에 가득 찬 이러한 장면은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엿보게 합니다.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긍지는 강력한 국방력, 뛰어난 생산력등의 물리력과 아울러 공유관념에 의한 정당한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 새로운 현실의 창출은 행위자의 정체성에 의해 영향 받아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대규모 군사적 충돌 없이 종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체제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국제정치학의 이론은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에 따라 각각의 해답을 제시합니다.
우선 현실주의는 구조의 변화를 냉전종식의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구조적 압력과 물질적 격차등이 냉전의 최종 깃발을 꼽게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소련이 국제적 경쟁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구조적 압력과 물질적 압력에 직면하여, 정치적 경제적 자유라는 정책적 옵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체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이해합니다. 동유럽과 소련 국내에 시민권 인식이 높아지고 민중정치가 가동되면서 정치적 의제설정이 제도화되었고,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같은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면서 국제적 긴장이 완화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구성주의는 구조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사고, 정체성등이 변화되어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소련에 구조적 압력이 가해져도 고르바쵸프와 같은 정치지도자의 개혁적 사고가 없었다면 소련의 근본적인 변화는 지체되었다는 겁니다.
국제정치의 트리오 이론들을 결합한 절충이론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절충론은 새로운 국제체제 형성이 구조적 변화와 행위자의 사고 변화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구조적 변화와 행위자의 정체성은 각각 체제변화의 필요조건일 뿐, 이 두 가지 요소가 만나는 접점이 충분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소련붕괴가 시사하는 바는 새로운 현실의 창출은 구조적 압력이 존재하여도 행위자의 의도·정체성·관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 상대 행위자의 정체성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달라져
행위자의 관념과 정체성이 새로운 현실의 창출과 국제관계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변수라는 점은 미국의 프랑스 핵무기와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도 발견됩니다.
미국은 프랑스의 핵무기를 위협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반면 북한의 핵무기를 안보를 해치는 무기로 판단합니다.
미국이 이러한 인식차이를 보이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핵무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 미국의 프랑스와 북한에 대한 관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게 있어, 프랑스는 同盟國 정체성을 지니지만, 북한은 敵性國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리적 사실보다 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행위자의 관념·정체성이 국가의 안전과 위협에 더욱 주요한 영향력으로 위치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구성주의자 웬트(Alexander Wendt)는 “사회의 심층적인 구조는 물리력이 아니라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정진영)
이는 행위자의 관념이 현실을 추동하는 본질임을 새롭게 깨닫게 합니다.
◆ 한국, 정체성 변화 필요
이처럼 행위자의 정체성은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는데 기여합니다. 정체성이 국제관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나라의 새로운 현실을 개척하기 위해선 새로운 국가 정체성 확립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은 유형정체성과 역할 정체성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에 의한 한국의 기존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형정체성(type identity)성 면에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 자본주의 국가, 분쟁가능성이 높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역할 정체성(role identity) 면에선, 핵을 보유하고 있 북한과 맞닿아 있는 국가, 과거 일본과 식민·피식민의 관계에 놓였던 국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리나라는 식민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국가, 자존심이 회복되지 못한 국가라는 정체성을 여전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한 단계 도약하는 현실과 국제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기존의 정체성에서 새로운 정체성으로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우선 새로운 유형정체성 측면에서 △국민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정부형태와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 △공정하고 생산성이 높은 자본주의 국가 △타국과의 협력을 아끼지 않고 국제사회와 연대하는 국가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국가라는 정당한 정체성이 요구됩니다.
한국은 이러한 정체성과 가치를 지닌 국가라는 인식이 타국가들에 의해 공유되었을 때, 즉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의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였을 때, 국제 질서에 크게 기여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또한 역할 정체성 면에서, 식민과 피해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자긍과 자존을 지닌 당당한 국가라는 정체성이 요구됩니다.
프랑스는 20세기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에서 철군하여 국가적 자존심을 손상 받았습니다. 이에 국가적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사력 강화를 꼽았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상징이 핵무장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자존심 회복 노력은 자존심이 물리력에 의해서도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이 선진국 가치에 조응하는 유형정체성을 수립하고 자긍과 자존을 지니는 역할정체성을 수립할 때, 한국은 국제관계에서 당당한 국가로 인정받게 될 수 있습니다.
◆ 한국의 국제관계의 지향점
그런데 자긍심을 가진 국가이며 국제관계에 기여하는 국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웬트는 국제체제의 성격에서 무정부상태의 구조가 홉스적 문화, 로크적 문화, 그리고 칸트적 문화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홉스적 문화란 국가들은 서로를 적으로 보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상태를 말합니다.
로크적 문화는 나와 이웃이 함께 사는 경쟁적 문화로, 전쟁도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칸트적 문화는 상대방을 친구로 보고, 그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대신 합의와 협력을 우선 고려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국제관계에서의 지향점은 칸트적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당당한 ‘대~한민국’을 연호하길 꿈꾸며
한국인들도 미국인들이 ‘USA!’를 외치듯이, ‘대~한민국’을 외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는 국제 대항 축구경기에서 한국선수를 응원하는 의도로 외치는 함성일 뿐입니다.
한국인들이 국제관계에서 당당한 정체성을 지닌 대한민국을 가슴 벅차게 느끼며 ‘대한민국’을 연호하기 위해선, 미래지향적 공유관념의 정체성 확립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됩니다.
유형정체성을 국제 가치에 부합하도록 공유관념에 따라 향상시키며 관계정체성을 피해의 관념에서 자긍의 관념으로 전환시킬 때, 칸트적 문화가 정립되어 한국은 국제관계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최종건, “안보학과 구성주의”
정진영,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현황과 전망”
양기웅, “한일관계의 역사갈등의 구성주의적 이해”
반길주, “냉전과 신냉전 역학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