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코로나 방역의 실패와 흑인들의 격렬한 시위로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사회는 갈등과 반목의 사회로 쪼개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코로나 19 사망과 미국 공공의료보험의 부재
지난 31일 기준으로 미국의 코로나 19 사망자는 10만6000여명을 기록하였습니다.
미국이 이처럼 다수의 사망자를 낳은 것은 전국민 공공의료보험을 갖추고 있지 않아, 흑인과 유색인종등 취약계층에 속한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호흡곤란이나 발열증상이 있다면 즉각 병원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흑인이나 유색인종들은 의료보험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 치료를 거부당하여 코로나19로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 미국 공공의료보험제도의 부재와 소극적 자유주의
미국의 공공의료보험제도의 불비는 미국사회의 주류가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미국주류 사회는 행복을 로크식 자유주의, 즉 방해를 제거하는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극적 자유주의는 미국의 제도가 공공적 지향성을 심각하게 퇴화시키는 배경이 됩니다. (이재승)
실제로 연방헌법은 행복추구권을 수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독립선언에 포함되어 있던 행복추구권이 헌법에 배제되어, 인권으로 구성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국주류사회는 헌법의 사회권(사회권을 포함한 행복추구권)을 인권으로 파악하기보다 빨갱이 권리(red rights)로 폄하하고, 사회권규약을 사회주의 선언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재승)
그렇다보니 미국은 공공의료보험 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방헌법에 행복추구권이 적시되고 있지 않아, 개인은 정부에 대해 의료보장등 사회적 권리를 요구할 수 없게 되고, 정부도 의료보장을 공급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미국주류사회의 ‘소극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적 헌법을 구성하게 되어, 헌법의 공공의료 제도화를 거부하는 원인이 됩니다.
◆ 미국 흑인시위의 배경과 해법
이번 미국의 격렬한 흑인시위도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소극적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이해됩니다. 흑인들의 그간 누적된 좌절이 이번 경찰의 과잉진압을 계기로 폭발되었다는 지적입니다.
흑인들은 코로나19사태에서 치료로부터 배제되어 사망하는 수많은 동료 흑인들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진행된 자신들의 권리투쟁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흑인들의 좌절은 행동의 자유만을 강조하여 승자독식사회를 방관한 미국사회의 소극적 자유주의(negative liberty)가 내포한 어두운 단면으로 이해되어 집니다.
미국 주류 사회가 자유주의 여신상이 추구하는 기회와 행동의 자유만을 신봉한 결과, 경쟁에서 소외된 자들을 보듬는 넓은 사회적 품을 열어두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이 인종 간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방안은 미국 사회의 행복 개념이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서 공화주의적 접근으로 이동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연방헌법에 루스벨트식 사회권을 명시할 때 구체화 될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 안정과 자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면서 새로운 안녕과 번영의 기초를 낳을 “제2의 권리장전”(a second Bill of Rights)을 제안하였습니다.
[제2의 권리장전에는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권리, 적절한 의복 식사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의 임금에 대한 권리, 농민에게 품위 있는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농산품 판로에 관한 권리, 국내외적으로 불공정 경쟁과 독점적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공인의 권리, 품위 있는 주거 환경에 대한 권리, 건강과 의료보장에 관한 권리, 고령· 질병· 재해· 실업의 경제적 두려움으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을 권리,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등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권리장전의 내용이 연방헌법에 사회권으로 반영되어, 미국사회에도 공적 사회적 차원의 행복이 자리하게 된다면, 흑인들과 유색인종들도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미국인들은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당당히 주장하고, 국가도 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소극적 사회권
한국은 미국과 달리 헌법 10조에 행복추구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34조에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사회보장권, 재해 위험으로부터의 국민 보호등의 조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항들은 모호하고 불명확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이한태) 34조의 대부분의 조항들이 국가의 노력 의무만을 명시하고 있어서 입니다.
(예컨대 제34조 ②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⑥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소극적 권리표시는 사회권이 헌법상 권리가 아닌 법률상 권리에 해당한다는 시각을 가지도록 합니다.(이한태)
만약 사회권을 법률상의 권리로만 본다면, 안전권 실현을 위한 입법을 할 것이냐의 여부는 오로지 입법자의 자유재량에 맡겨지는 것이므로, 시민의 안전권에 대한 적극적 능동적 행사는 제약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즉 시민은 국가에게 안전보호조치를 적극적으로 구할 수 없고, 주관적 보호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헌법의 사회권 보장의 미비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안전보장의 부작위를 낳게 되고, 이는 시민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시민이 정치의 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강한 민주주의’는 포기되고, 정치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한 정치 의사결정을 내리는 ‘최소주의 민주주의’가 횡행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안전의 확보는 정부와 입법자의 정책 의사결정에만 의존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 시민이 능동적으로 행사할 때 확보되는 권리입니다. 엘리트 입법자의 처분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입법자는 최소주의 민주주의에 근거하여 정책 의사결정을 내립니다. 정치라는 시장에서 입법이 자신들에게 주는 편익과 입법이 요구하는 비용을 비교 계량하여, 편익이 비용보다 클 때 비로소 입법에 나서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7년 헌법 개정 이래 2020년 현재까지 개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개헌의 주체는 엄연히 시민임에도 입법자들은 자신들이 개헌의 주체라는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이 같은 엘리트주의 시각은 개헌을 막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입법자들은 자신들의 편익과 비용을 계량하여 개헌으로 인한 비용이 편익을 압도한다고 판단한 결과, 개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헌이 시민의 행복권을 보장한다면, 당연히 헌법은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입법자들이 자신들의 당리당략에만 집착한 결과 헌법 개정은 33년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헌법에는 명시하고 있음에도, 주권은 국민이 승인한 입법자에게 머물러 있는 기막힌 현실이 시민의 행복권의 보장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 시민이 나서야 합니다. 시민의 행복추구를 美辭麗句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엘리트들에게 시민이 주권자임을 명백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이 정치의 장에 적극 참여하여 ‘강한 민주주의’를 세워야 합니다.
이는 시민이 우리의 기본권을 확보하는 개헌에 직접 나설 때 비로소 획득될 것입니다.
「서기 1세기, 예루살렘에 간헐천인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가끔 솟구치는 이 온천수는 특정 질병을 고칠 수 있는 특수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물이 분출한 후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라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불치병 병자가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의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넣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다가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요한복음 5:2~9)
<참고문헌>
이재승, “행복추구권의 기원과 본질”
이한태, 전우석, “한국 헌법상 기본권으로서의 안전권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