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Max Weber)는 그의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비교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신념과 행위의 일관성만을 강조하는 신념 근본주의에 빠져, 행위와 결과의 일치를 주장하는 책임윤리를 배격하고 있지 않은지 우려스럽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념윤리
현실 초월적이고 근본적인 이념과 행위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존경받을 만한 행위입니다. 루터의 신념에 찬 행위는, 베버의 언급처럼,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터는 교황청이 판매하는 면죄부가 구원에 대한 성경적 원리(칭의,稱義)에서 벗어난 것이며, 독일시민에 대한 착취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521년, 면죄부를 판매하는 로마교황 레오 10세는 당시 독일의 통치자 찰스5세에게 루터의 복종 또는 사형을 부탁합니다. 찰스 5세는 루터에게 자신의 신념을 굽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신념이 성서와 양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그 요구에 굴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단호히 밝혔습니다.
이후 그는 친구 프레더릭의 보호를 받으며 라틴어로 쓰인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라틴어를 모르는 평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념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노력은 소중한 가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 신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
하지만 신념윤리의 장점을 넘어 신념의 극단을 지향하는 신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결과에 대한 무책임으로 공동체의 선을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념 근본주의자들은 이상 속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다 현실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막막한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는 신념의 고수와 행위의 일치는 곧 공동체의 후생과 안정을 가져온다는 안일한 사고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쁜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자인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위정자들을 탓합니다. 부정적인 결과가 우리 탓인가 라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신념과 행위의 일관성만이 주된 관심일 뿐입니다.
◆ 책임윤리
이념 근본주의자들은 신념의 고수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도구를 택하는 과정을 신념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신념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의도된 결과의 성취를 위해 행위의 요소들을 설정하고자 하는 이들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공동체의 행복과 안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달리 말해 신념 근본주의자들이 신념과 행위사이의 일관성에 젖어 있는 동안,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일관성으로 방향 전환을 시도합니다.
베버는 이들을 책임윤리에 민감한 자들이라 칭하면서, 책임윤리의 대표적 사례를 제시합니다.
1375년, 교황청이 피렌체에 파견한 최고 행정관이 학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급기야 피렌체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카톨릭 교도들인 피렌체 시민들은 교황의 전제정치에 반기를 들고, 교황과 교황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마침내 전투를 주도한 8명의 시민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피렌체의 평화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교황에 대해 충성해야 한다는 신념보다 자신의 공동체와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믿음을 더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8인의 피렌체 시민의 사례는 책임윤리를 언급한 것으로, 책임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환경적 요인과 상황을 고려하여, 선한 결과(목적)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위를 결정합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교황에 대한 신뢰를 내려놓고 교황의 폭압에 맞서 싸우며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교황과 맞선 것은 기존의 신념을 포기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이들은 공동체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책임윤리를 지지하는 자들은 현실초월의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대신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하고, 그 목적에 가장 부응하는 도구를 선택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공동체의 후생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책임윤리에 대한 신념론자들의 비판, 공리주의 vs 책임윤리
그런데 객관적인 결과주의는 신념주의자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합니다.
무엇보다 신념극단주의자들은 베버의 책임윤리를 결과주의를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아류가 아닌가라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낙연 총리의 후임으로 김진표의원이 총리후보로 물망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 그리고 노조가 보수성향의 김의원을 반개혁적 인물로 낙인찍고, 그가 총리후보로 부적격하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습니다. 결국 김의원은 이러한 진보좌파진영의 저항에 부딪혀 후보직을 고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김의원을 반대하는 배경에는 결과주의에 집착하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혁신성장을 위해 경제통의 의원을 총리 후보로 선정하는 것은 결과만을 위해 행위의 부당함을 수용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는 공리주의와 다른 결과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책임윤리의 초점은 행위가 정당한가에 모아집니다.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결과간의 관계입니다.
진보좌파의 신념은 공동체의 상대적 평등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파진영이 강조하는 공급중심의 혁신성장이 생산, 소득의 증가, 이에 따른 세수증가를 촉진하여 원활한 소득재분배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면, 진보좌파의 신념은 결과와 상응하게 됩니다.
때문에 신념과 결과 사이에 위치하는 행위는 비난받기보다 둘의 관계를 촉진하는 긍정적인 도구로 인정받게 됩니다.
특히 정치적 이성이 공동체 성원들에게 결과의 선을 보장해주는 이성작용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책임윤리를 지지하는 자들을 ‘냉혈한 현실주의자’로 비난하기보다 객관적인 포용론자로 평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김의원은 혁신성장의 요체가 중소기업의 혁신성장이며, 이는 기술금융등의 혁신금융에 있다고 간파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없는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에 자금을 어떻게 공급하는가가 혁신성장의 토대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김의원이 신념과 결과 사이의 매개물로 제대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일부 신념 진보좌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물거품이 된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국가의 미래를 바라볼 때 한숨이 나올 지경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념 근본주의자들이 향후 혁신성장을 추구하는 정책마다 건건이 발목잡고 걸고 넘어 갈 공산이 크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념과 행위의 일치만을 주장하며 그 결과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행태는 무책임의 극단을 달리는 행위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최장집, 「막스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김성호, “주객의 저편: 막스베버에게 있어서 신념과 책임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