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 박수근과 이중섭, 근대 산수화의 쌍벽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 청각장애인으로 좌절의 유혹을 이긴 운보 김기창과 한국화단의 걸출한 여성작가인 운보의 아내 우향 박래현.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과 김환기.
한국 근현대 회화의 이들 천재 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원본으로 한곳에서 감상할 수 없을까? 고궁의 古色과 단풍의 秋色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덕수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교과서나 각종 책들을 통해 친숙한 우리 근현대(1920년대~1970년대) 회화의 대표작가 57명의 명작 100점을 한자리에서 진품으로 만나 볼 수 있는 <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展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 근현대 회화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하는데 도움을 준다. 작품을 근대적 표현의 구현 (1920~1930), 새로운 표현의 모색 (1940~1950), 수목채색화, 추상미술의전개 (1960~1980)등으로 시대별, 주제별로 구분하여, 네 곳의 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다.
제1부 근대적 표현의 구현 (1920년대 ~ 1930년대)
일본등에서 미술을 공부한 화가들이 귀국함으로 기법과 양식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대상의 재현에 충실한 사실주의 양식과 빛에 초점을 둔 인상주의가 시도되었다.
대표작가와 작품은 오지호 ‘남향집’, 김인승 ‘화실’, 이종우 ‘모부인의 초상’, 구본웅‘친구의 초상’, 배운성 ‘가족도’, 도상봉 ‘정물’등이다.
▶오지호의 ‘남향집’
오지호는 서구인상주의 이론을 한국적인 풍취로 묘사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도입한 그는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라며 빛과 이를 통해 나타난 색채를 중시하였다.
‘남향집’은 인상주의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나무의 그늘을 어둠대신 보라색으로 묘사했고, 보라색이 땅의 노랑과 보색으로 잘 조화를 이룬다. 작가의 개성집을 그린 그림으로, 아이는 작가의 둘째 딸이며 흰 개는 그의 애견 ‘삽살이’라고 한다. 따뜻한 햇볕을 느낄 수 있는 오후의 넉넉한 일상을 그렸다.
제2부 새로운 표현의 모색 (1940~1950년대)
해방과 참혹한 한국전쟁, 이념대립을 거치면서 한국 화단은 사실주의양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성찰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1950년대부터 구상과 추상의 개념이 구체화된다.
대표작가와 작품으로는 장옥진 ‘가로수’, 이중섭 ‘소’, 박고석의 ‘가족’, 김흥수의 ‘군상’, 류경채의 ‘양지’, 박수근의 ‘빨래터’, ‘골목안’, 유영국의 ‘산’등이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54년)
중섭은 전 일본창고주식회사 사장딸이며 동창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와 결혼하여 한국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방도가 없자 두아들과 아내를 일본으로 돌려보낸다.
이 작품은 아버지가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어디로 떠나는 장면이다. 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그린 고독의 조각이다.
▶박수근의 ‘빨래터’ (54년)
박수근은 한국적인 풍토성을 잘 드러낸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수근의 그림에는 노인, 아이, 아낙네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들을 자주 그리고 있는 것에 대해 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수근은 노인이나 아이,여인네들의 이미지에 내포되어 있는 수동성과 소극성에 남다른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그의 외로운 심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빨래터’는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뒷 모습을 그려 가사노동의 힘겨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3부 수묵채색화
실경산수화,사군자,서예등의 전통적인 수묵채색화에 일본화의 영향으로 인물화, 풍속화,역사화등의 새로운 주제가 접목된다. 해방후에는 입체파등의 모더니즘등 서양의 추상미술을 전통채색화에 융합하였다.
천경자의 ‘길례언니’, 박래현‘노점’, 김기창‘아악의 리듬’, 허건‘삼송도’, 김은호 ‘의기논개’, 변관식‘외금강삼선암’, 김형기 ‘향가일취’, 이상범‘추경산수’등을 만나 볼 수 있다.
▶변관식의 ‘외금강삼선암’ (59년)
小亭 변관식은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외금강삼선암’은 치솟는 암봉의 날카로운 기운으로 화면을 긴장감으로 조여주고 있고, 이축을 중심으로 왼편에 두 개의 암봉이 서로 잇닿아, 三仙岩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중심바위 너머로 산간의 휴게소가 보인다. 이 휴게소는 가파른 산세의 긴장감을 잠깐 누그러뜨려주는 여유를 마련해 주는 공간이다.
▶이상범 추경산수 (54년)
청전은 화단진출을 같이 했던 소정과 더불어 한국산수화의 거봉을 이루었다. 청전의 산수화의 특징은 심산유곡대신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야산과 시냇물 그리고 평화로운 농가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들을 수묵담채로 은은히 묘사한다. 그의 작품에는 소를 몰고가는 농부등 소탈하면서도 향토적인 서민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낮은 야산이 길게 펼쳐져 있고 먹의 농담으로 근경과 원경을 구분하고 있다. 이슬맺힌 아침에 펄럭이는 옷자락의 촌부를 묘사하여 서민들의 애환을 낙천적이고 소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경자의 ‘길례언니’ (73년)
천경자는 일곱 살 때 동생들 공부를 돌봐주던 ‘순결한 눈망울,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인 길례언니’를 만난다. 실제로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길례언니는 어린시절 어느 여름의 축제 날,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그녀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결국 ‘길례’는 그녀 회상 속에 아름다운 처녀를 의미한다. 따뜻한 노란색이 주색으로 사용된 이 작품에서 모자위의 꽃 장식은 환상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는 상징과 은유를 나타낸다.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 (67년)
만원지폐의 ‘세종대왕’과 ‘바보산수’로 유명한 운보는 7세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은 후 침묵의 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 작품은 운보가 전통음악 아악의 소리를 청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사진촬영하듯 연주자 모습이 흔들리는 역동적 동선이 인상적이다.
제4부 추상미술의 전개 (1960~1970년대)
1970년대에 비구상, 추상의 양식이 화단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한다. 추상미술은 작가의 의식과 상상을 다양한 기법과 소재를 이용하여 표현하고자 힘썼다.
유영국‘무제’, 김환기‘아침의 메아리’,‘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다’, 한묵‘푸른나선’, 이응로 ‘수’, 최욱경‘어린이의 천국’등을 감상 할 수 있다.
▶이응로의 ‘壽’ (72년)
고암 이응로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파리로 돌아가 문자추상에 심취한다. 한자나 한글의 해체와 재조직으로 문자추상을 전개하고 동양적 정신이 깔려있는 구륵법을 이용해 여백을 적절히 활용한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70년)
김환기는 서양의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욌다.
뉴욕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 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점하나에 선을 다시 둘러싸서 수많은 점들을 그려내었다. 한점한점 찍어내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하여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런 면에서 서양화의 추상양식에 동양의 문인화의 정신이 가미되어 있는 작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