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한 신애는 교도소에서 유괴범을 만난다. 그런데 유괴범은 신애에게 사죄하기는커녕, 평온한 얼굴로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신애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를 위로하러 온 교회신자들에게 신애는 이렇게 외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신애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신에게 보복하듯 교회의 집회를 방해하고 물건을 훔치는등, 죄악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
위의 내용은 이창동감독이 찍은 영화 <밀양>(2007)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다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등을 수상할 만큼 영화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밀양>은 관객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실 수 있어, 감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기독교의 구원관, 곧 칭의에 대한 확증편향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아무리 감독의 주관적 예술이라 해도 적어도 공적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음에도, <밀양>은 감독의 주관적 사고를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포장하여 관객의 사고를 조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이 꿈꾸는 피상적 이상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좌파진영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칭의, 곧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기독교 구원론에 대한 감독의 편향적 사고는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이 기독교교리에 다가가는 발걸음을 끊어 놓는데 충분히 기여할 수 있습니다.
◆칭의 개념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에 대항하는 구원의 핵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터는 선행의 공로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로마 카톨릭 교리에 의문을 품고 이신칭의 교리에 기초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의 정신적 이론적 지주인 칼빈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관을 전체 구원교리의 중심점으로 삼았습니다.
칭의, 곧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는 행위로 말미암는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전자는 사람이 성품으로 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후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고 선언되는 것입니다. 즉 죄인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롭다 인정하고 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Justification i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an.)
◆칭의의 성격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에 의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해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화해, 화목, 화평의 관계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로,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신을 속죄제물로 삼으시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심으로(롬8:3-4)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죄인들에게 돌리는 대신(고후5:19)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돌리셨습니다.(고후5:21),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성취된 의를 죄인들에게 전가함으로 그들이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둘째로, 칭의는 죄용서로 비롯됩니다.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선 화목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물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롬3:25) 이로써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용납하시고 의롭다 선포하십니다.
셋째로, 칭의는 화해, 화목, 화평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적대관계에 있게 합니다(사59:1-2).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propitiation), 화목(reconciliation), 화평(peace)을 얻게 됩니다. (고후 5:19; 롬3:25; 5:10;골1:20-22)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고(고후5:17) 죄인이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의의 나라로 옮겨지게 됩니다.
넷째로, 칭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권과 영생권이 주어집니다.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여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칭의의 근거
①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칭의의 근거와 관련하여, 칼빈은 로마서 3장 25절을 주해하면서 칭의의 동력인(efficient cause)으로 하나님의 은혜(mercy of God)를, 질료인(material cause)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인 또는 방도인(formal or instrumental cause)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그리고 목적인(final cause)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의 영광을 각각 기술하였습니다.
즉, 동력인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저 베푸시는 인애(mercy)이며, 질료인은 십자가상에서 속죄 제물이 되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속량(redemption)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이시며, 형상인 또는 방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게 하는 믿음이고, 목적인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하심과 의로움의 영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기독교강요)
이는 삼위의 하나님의 사역으로 칭의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② 칭의의 근거 :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입니다. 이는 그의 순종을 통해 얻게 되는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형벌적 수동적 순종(penal and passive obedience)과 계율적 적극적 순종(preceptive and active obedience)으로 구분됩니다.
전자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속적 배상(satisfaction)을 드리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저주와 형벌을 죄인들을 대신하여 받아 죽기까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신 순종을 말합니다. 후자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적극적 순종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형벌적 순종과 계율적 순종, 두 측면을 다 겸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의 순종이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함을 얻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롬 5:19).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믿음으로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 칭의의 또다른 근거: 전가(imputation)
칼빈은 칭의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중재로”(by the intercess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by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라는 말을 언급 하고 있습니다. (since God justifies us by the intercession of Christ, he absolves us not by the confirmation of our own innocence but by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즉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가(imputation)란 무엇일까요?
imputation은 사전적으로 ‘다른 이의 속성이 나의 것에 속한다고 간주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신학에서의 전가는 ‘구속의 객관적 완성이 개인의 주관적 구원의 체험으로 옮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객관적 구속사역이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redemption)과 관계된 개념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가 되셨다’(고전 1:30)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의가 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시어 그 죽음을 통해 죄가 죽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부활하시어 생명이 얻어지는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죽음으로 죄가 죽고 부활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의 객관적 완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기 위해선, 그리스도의 객관적 의가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 칭의의 주요 근거: 전가의 가능성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렇다면, 이 전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부활을 통해 부여하신 구원의 완성(redemption accomplished)이 어떻게 우리의 것(redemption applied)이 되는 것일까요?
칼빈이 말하는 전가의 가능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이 연합을 통해 구속의 객관적 완성이 개인의 주관적 구원의 체험으로 옮아가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처럼 칭의의 또 다른 근거는 의의 전가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mystical union with Christ)입니다.
칼빈은 죄인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유익들, 곧 그의 의의 전가, 죄 용서함의 칭의, 하나님의 자녀권과 영생권 및 성화와 영화 등을 전혀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은혜 언약의 모든 복들이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유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대표적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첫 번째 복인 칭의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외부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덧입고 그의 몸에 접붙여짐을 통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에베소서5:31(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 two will become one flesh.)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As Eve was formed out of the substance of her husband, and thus was a part of himself; so, if we are the true members of Christ, we share his substance, and by this intercourse unite into one”
이처럼 칼빈에 의하면, 머리와 지체가 함께 연합하는 것, 즉 우리 가슴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것이 신비적 연합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made ours)이 되심으로써, 그가 받으신 선물들을 우리가 공유하게 됩니다.
특히 칼빈이 연합을 통해서 강조하는 의미는 연합 속에서 교통(communio)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러한 교통을 “놀라운 교통”이라고 하였는데, 연합이 전제될 때, 그 안에서 칭의의 교통이 가능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이 되심을 믿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가 우리와 하나가 될 때,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가 될 때(엡 5:30), 우리가 그와 더불어 한 생명과 한 몸(본체)으로 일체 될 때(incorporated with him into one life and substance),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접붙이는 순간, 그의 의가 나의 것이 되어, 나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상속자, 의에 참여자, 생명의 소유자가 됩니다.
◆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칼빈은 칭의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의 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연합에 의해 의의 전가가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답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믿음에 있습니다.
칼빈은 ‘그[그리스도]는오직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연합하신다’며, 이 연합이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이루시는 연합임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고, 이로써 의롭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칼빈의 언급처럼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신다면, 이같은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역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칼빈은 성령이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주는 띠(bond)이신 성령은 칭의와 성화를 얻게 하시는데(고전6:11), 칼빈은 이를 위하여 성령은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령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이 연합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3:17a은 이를 증거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칭의의 방도로서의 믿음
①믿음이란?
이신칭의, 곧 성령의 사역에 의한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를 통해 의를 얻게 된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의 요소들을 언급하면서, 믿음에 대해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한 경건으로부터 믿음이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칼빈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맹신(blind faith)을 경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인애하신(merciful) 아버지로, 구속주로 아는 것이다.
즉, 인애하신 아버지를 아는 것은 그의 섭리를 통하여 다스리시되 그의 선하심과 모든 복으로 우리를 양육하시고 보살피시는 그의 부성애(fatherly care)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구속주로 아는 것은 그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구속(redemption)으로 주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이심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사랑하고 경외하며, 또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알고 그의 구속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에 순종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1장 5절b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so that they will believe and obey him, bringing glory to his name.”(NLT)
② 오직믿음=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믿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이해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믿음 자체가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 된다는 것은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믿음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동작으로 바라봅니다.
칼빈에게 있어, 믿음의 역할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우리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부어진 일종의 덕목이나 질로써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내면적 성질의 것으로 투입(infusion)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결함이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그의로 말미암아 성부 앞에서 의롭다 여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오직 믿음”이라는 말은“오직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칭의의 효과
칼빈은 칭의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1)죄가 사해지고 (2)의롭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justification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스위스 개혁신학자인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1623~1687)은 칭의의 유익을 사함(absolution)과 양자(adoption)됨으로 설명하였습니다.
“ From this imputation of his most perfect righteousness flow two benefits – both remission of sins and the bestowal of a right to life or adoption. Thus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is the foundation and the meritorious cause of justification, while adoption and absolution are two parts of justification and effects of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which are inseparable from each other.”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 의인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인애하심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얻게 되는 칭의의 효과는 죄사함 뿐만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를 죄사함에 이르게 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의인되게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죽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살아나셔서 우리를 위해 의가 되시고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음으로 인해 의인이 된 것, 이 두가지가 모두 칭의의 유익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된 것과 관련하여, 주의할 점은 의인이 된 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의인임을 입증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에서 벗어나고 부활로 의인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공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결국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죄사함과 의인됨을 함께 누릴 때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은 곧 죄사함이며 이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의인임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은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의인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누리면서, 그 죄에 통회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자가 의인입니다.
의인의 삶이 제외된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며,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도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밀양>의 반기독교적 정서는 감독이 칭의를 확증편향적으로 이해한 결과로 이해되어집니다.
유괴범이 신애에게 눈물의 사죄없이 죄사함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뻔뻔한 발언을 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즉 유괴범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죄를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도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가 연합하여 우리가 그의 의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구원은 곧 죄사함과 의인이 동시에 나아가는 이중적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을 생략하고 죄사함만을 강조하는 확증편향적 구원관은 구원의 본질을 왜곡하는 사이비 구원관이라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합의에 있어 평행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양측이 각각 편향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정부는 의대증원을 의료복지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을 뿐, 의대증원의 부정적 효과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의대증원은 트레이오프로 우수한 공학 인적자원의 감소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한국은 잠재성장률이 장래 0%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저출산의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우수한 인적자원의 확충으로 총요소생산성을 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수한 인적자원들이 의료업에 몰리게 된다면, 도대체 낮은 잠재성장률을 어떻게 높일 수 있나요? 천재 1명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린다는 이건희 회장의 지적은 지금 시점에 타당한 논변이 됩니다.
또한 의료계는 자유만을 강조하여 공익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의료업은 자유와 공익이 함께 강조되는 독특한 업종인데, 편향적으로 자유만을 강조하고 공동체의 안정을 외면하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때문에 정부와 의료계는 확증편향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전체 숲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의료계는 2025년 의대증원과 관련한 정부결정을 수용하고, 정부는 2026년 의대증원과 관련하여 공학분야의 인적자원 확보를 주요 변수로 하여 의료계와 새롭게 합의하는 것도 의정 갈등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참고문헌>
김은수, “칼빈의 구원론의 이해”
강웅산,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나용화,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