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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말씀 QT ] [ 로고스의 정체성 ] 로고스의 정체성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요20:31)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의 하나가  생명을 회복하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영적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회복하고 늘 생명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20:31)
“But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NIV) 

이 구절을 달리 표현하면, 생명은 그의 정체성(Who he is)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입니다.  “you may have life through His name (through Who he is)”(AMPC)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믿는 것이며, 그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정체성과 이 땅에서의 사역의 목적은 로고스 송가(頌歌)라 불리는 요한복음 서언(1:1~18)의 구절들에서 함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철학의 로고스 개념

요한복음 저자인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하기 위해 당시 유대 세계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로고스’라는 용어를 차용하였습니다. 

그가 로고스라는 개념을 그의 복음서에 적용한 것은  헬라 이방인들과 헬라 유대인들에 익숙한 개념인 로고스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류영란)

헬라인들에게 알려진 로고스 개념으로 헬라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B.C.6세기)의 이론이 꼽힙니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지라도 이전 강물과 이후의 강물은 같지 않다며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있는 변화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라클리투스는 이러한 우주의 질서를 만드는 존재는 신적이성, 즉 로고스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우주 안에 형체를 창조하고 배열하고 운행하게 하는 질서가 로고스임을 주장한 겁니다. 

스토아 학파의 제노(Zeno)도, 헤라클리투스의 주장과 유사한 맥락에서, 로고스를 우주 안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 질서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로고스의 정체성

이러한 헬라철학의 로고스 개념에 대해, 요한복음의 저자는 로고스의 참된 로고스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이심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의 질서를 통제하는 존재인 로고스는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예수님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1:1~3에서 로고스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①로고스의 선재성 
요한복음1:1의 첫 문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In the beginning was the Word)는 로고스의 선재성(pre-existence)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선재성은, 로고스가 만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거나 무에서 유의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하지 않고,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서언의 선재성의 개념은 창세기1:1의 선재성과 의미상 비교됩니다. 

창세기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태초’는 창조의 시발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물과 함께 시간을 창조하셨는데,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 창조의 처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1의 ‘태초’는 로고스가 시간 창조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원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개념입니다. 로고스는 창조물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일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로고스의 선재성은 로고스가 만물보다 앞서서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②로고스의 역설: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구별 
요한복음 1:1의 두 번째 문장인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the Word was with God)는 로고스의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역설은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완전한 연합이면서 또한 구별되는 관계임을 드러내는 역설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는 로고스는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교제를 나누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의 존재는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 말하는 영지주의자들은 명백히 이단으로 규정됩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만 존재하였고 이후 하나님의 신적인 충만이  유출되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등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이시며 또한 구별되시는 존재인 예수그리드도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1:1의 “the Word was with God”은 로고스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별개의 실재를 갖고 세상의 창조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의 세 번째 문장인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다”(the Word was God)도 두 번째 문장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집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구절의 하나님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사가 있다면 ‘로고스가 그 하나님 자체이다’인데, 이는 로고스가 하나님과 일체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일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the Word was God”는, 요한복음 1:1의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의미하듯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신적인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결국 요한복음 1:1의 ““the Word was with God”와 “the Word was God”은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질성을 지니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끄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③로고스는 창조주 :구속사역 전 과정의 주체
요한복음 1: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는 로고스의 창조사역을 노래하는 구절입니다. 

‘만물이 로고스를 통하여 창조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은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한 주체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를 통하여”라는 문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하여”에서 ‘통하여’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로고스가 ‘참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사역을 ‘직접 담당’하셨다는 뜻입니다. 로고스가 창조의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주체임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로고스가 창조사역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것은 구속사역의 전 과정에 로고스가 개입하셨음을 말합니다. 로고스가 만물을 창조하시어 창조를 회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시어 죄인들의 구원에 몸소 개입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로고스는 구속사역 전과정을 친히 담당하신 주체이십니다. 인간에 생명을 주시고 이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모든 과정에 개입하셨다는 겁니다.  

④로고스 역설 :본질상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존재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본질상 하나님이 완전한 이간이 되셨다는 역설을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역설은 요한복음 1:1 “로고스는 하나님”이라는 역설과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둘의 역설의 내용이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로고스가 하나님’은 하나님과 연합하신 로고스가 하나님과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을 창조하는데 주체가 되시며 본질상 하나님과 동격이신 로고스가 하나님과 구별되어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을 덧입고 오셨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가현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假現設, Docetism은 헬라어에서 ‘보이다’라는 뜻인 ‘도케오’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시고 인간으로 보이는 환상을 걸쳤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겪은 십자가의 고통등은 구레네 시몬이 실제로 못 박혔기 때문에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단 종파가 그노시스파(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가현설을 신봉하는 것은 물질은 악하고 영적인 것은 선하다고 주장하는 사상과 관련 있습니다. 육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더러운 육체를 입으셨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의 육체 부정의 사상이 가현설을 수용하게 된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의 허상이 아닌 실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목말라하는 예수(요4:7), 십자가에 죽으신 후 피와 물을 흘리신 예수(요19:34)등이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 즉 하나님과 동격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해 영적 죽음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안겨주셨다는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달리말해 로고스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수단과 하나님의 영광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십자가에 인간을 대신하여 달리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영광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2서 1:7은 예수님이 인간되셨음을 부인하는 것들에 경고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복음 1:14의 성육신의 문장은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에 대한  공박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로고스의 사랑이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 

로고스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은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인 20:31은 그 이름을 믿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고 지적합니다. 

“you may have life through His name (through Who he is)”
(AMPC)

이 구절에서의 이름이란 자기를 지칭하는 말과 달리, 한 개인의 전 인격을 나타냅니다. 로고스 존재 전체, 인격 전체를 뜻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로고스의 인격과 정체성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you may have life through His name (through Who he is)”은 우리의 생명은 로고스의 정체성을 신뢰할 때 얻게 되는 선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로고스의 정체성은, 요한복음 1:1~3,14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선재(pre-existence)하시는 분 △하나님과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 △태초에 창조과정을 포함한 구속사역 전 과정을 담당하시는 주체 △본질상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존재   

이와 같은 예수님의 정체성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로고스 예수님의 구속사역 전 과정이 함축되기 때문입니다. 

종합하면, 영적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회복과 유지는, 시간 전부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 만물을 창조하신 분, 그리고 몸소 인간이 되시어 우리의 영적인 죽음을 생명으로 회복시키신 예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죽어있어 영적어둠에 놓여있거나 두려움· 우울· 불안등으로 인해 사탄의 지배하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 같은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되는 길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믿는 것입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격이신 로고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지신 예수님이 사탄의 어둠의 지배를 찢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체성의 역설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없이 믿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로고스가 인간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의 힘이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And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neither height nor dea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Romans 8:38,39)


● (참고)로고스 = the Word

요한복음 서언에 기록되어 있는 ‘the Word’ (말씀)는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로고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에서의 로고스가 어떤 근거로 ‘the Word’으로 번역된 걸까요?  

로고스 서언에 의하면 로고스는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주로 기능합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이 ‘다바르(dabar)’인데, 다바르 즉 말씀은 성경에서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기능합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의 기능은 구약성서의 다바르(말씀)의 기능과 비슷한 점들을 보입니다. 

실제로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고,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 만물이 로고스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1:1~3)라는 요한복음 서언의 진술은 시편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는 구절과 흡사합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곧 다바르(말씀)로 변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다바르(말씀)는 70인역 성서에서는 대부분 로고스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류영란)



<참고문헌>
류영한, 「요한 복음의 로고스 기독론 연구」, 호남신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