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노동가치이론은 현대의 자동화와 디지털 경제의 심화로 인해 이론적 유효성이 부정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이 유효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노동의 범주를 육체노동에서 지식노동으로 확장 하여 노동가치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치
가치는 힘이라고 합니다. (홍병선)
예컨대 꽃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꽃이 사람에게 위안과 활력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상품이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이 상품이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무엇이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힘, 즉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됩니다.
그런데 가치, 곧 힘은 힘의 원천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심미적 가치(intrinsic value, 내재가치)입니다. 이는 정신적 욕구와 관련된 상부구조에서 발생하는 가치입니다. 앞의 사례에서 꽃을 보았을 때 느끼는 안정감등은 심미적 가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경제적 가치(effective value, 효용가치)입니다. 이는 물질적 욕구와 연계된 하부구조에서 나타나는 가치를 말합니다. 상품을 소비하여 결핍이 해소되었다면, 그 만족은 경제적 가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그 힘이 상부구조에서 발생하든, 하부구조에서 비롯되든 간에, 가치는 생명력을 공급하는 힘이 됩니다.
◆노동가치 이론
가치의 개념을 경제적 가치로 좁혀본다면, 가치개념에 천착한 사상가는 맑스입니다. 그의 가치 개념은 노동가치 이론으로 정리됩니다.
그에게 상품의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물질화, 또는 구체화입니다. 그리고 가치의 크기는 노동의 양, 즉 상품을 생산하는 데 있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socially necessary labor time)에 의해 규정됩니다.
노동이 투입되어 상품이 만들어 질 때, 상품은 사용가치라는 그릇에 담깁니다. 그리고 상품들이 교환되면서, 상품은 사용가치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교환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결국 가치의 현상형태는 교환가치로 나타납니다.
또한 교환을 통해서 교환을 매개할 보편적 등가물이 형성되고, 이 등가물이 다시 화폐로 변모합니다. 따라서 한 상품의 가치는 가치의 보편적 등가물인 화폐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맑스에게 상품의 가치 창출의 출발은 노동력의 지출입니다.
◆ 노동력의 범위와 노동가치설의 유효성
상품의 가치가 노동의 구체화로 규정된다면, 노동력은 무엇을 의미할 까요?
노동력의 범위가 중요한 것은 그 범위가 맑스의 노동가치설의 유효성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맑스의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노동력을 빼면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자동화는 맑스의 노동가치설을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는 맑스는 노동의 범위를 육체노동으로 한정하는 듯합니다.
맑스는 기초과학 같은 작업을 “가치도 생산물도 창조하지 않는 생산성의 空費(비생산적 비용)”로 파악합니다.
맑스가 언급하는 공비의 개념은 경영학의 생산관리에서 낭비활동을 의미하는 비부가가치 활동과 유사합니다.
비부가가치 활동이란 도요타 생산방식에서의 JIT(Just-In-Time)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비자가 지불하는 비용에 어떤 기여를 하지 않는 활동을 말합니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이러한 비부가치활동에는 과잉생산, 기다림, 운반, 가공, 재고, 동작, 불량품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유형에서 발생하는 활동을 잘 관리하면, 직접적으로 비용을 감소시키고 부가가치(새로운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맑스는 기초과학 같은 지식노동을 잉여가치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부가가치 활동 정도로 파악한 것 같습니다.
결국 육체노동이 소멸되어가고, 대신 인공지능등이 등장하는 요즈음에, 맑스의 노동가치설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노동의 범주에 육체노동 뿐만 아니라 지식노동을 포함하면 노동가치설은 성립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스티글러는 “노동력은 근육노동이나 인력이 아니라 두뇌노동이라는 용어로 불려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류동민 교수도 연구개발노동을 노동가치론의 체계에 편입시킬 것을 주장합니다.
지식노동이 노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개발노동이나 과학기술이 생산과정에 직접 포섭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업의 생산과정 내부에서 직접 지식이 생산 관리되고 상품 생산에 기여합니다. 또한 연구기관이 회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기업의 이윤활동에 직접 참여합니다.
이런 점에서 연구소의 연구활동은 공비를 축내는 노동이 아니라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강경덕)
따라서 연구활동등 지식노동이 생산적 노동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맑스의 노동가치설의 유효성은 계속 성립되게 됩니다.
◆가치는 지식노동의 산물
자동화가 주도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가치 또는 부가가치의 창출은 지식노동에 빚지게 됩니다.
이제 앞으로 노동력은 지식노동의 세계에 접근이 가능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되고, 지식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이는 주변부로 밀려나는 노동의 양극화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강경덕)
이는 지식노동이 개발되지 않으면 개인과 국가경제의 존재가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향후 지식노동으로 집약되는 노동시장에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개인은 노동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힘들게 됩니다. 또한 과학기술과 기초과학의 육성을 등한시한 국가는 글로벌 경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됩니다.
◆ 합리적 진보세력을 꿈꾸며
그런데도 급진 좌파진영은 기초과학, 과학기술에 기초하는 첨단기술제조업과 지식집약서비스(Knowledge-Intensive Service)의 육성을 등한시하고, 그저 단기에, 주어진 생산물을 어떻게 쪼개 부가가치를 늘릴 것인가에 우선적으로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기적 사고에 기초한 나머지, 지식교육과 지식을 갖춘 인력의 육성을 소홀히 하고, 교육의 평준화등 이 세상에 에덴 동산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러한 몽상은 개인과 국가의 불투명한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지식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맑스의 이해처럼 지식교육을 空費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례가 이렇습니다.
19대 국회의원 시절, 기자는 민주당 국회 대표연설 작성에 관여한 한 의원에게 질문한 적 있습니다.
“의원님, 민주당은 단기 성장만 생각하고 장기 성장은 고려하지 않습니까? 교육개혁은 왜 하지 않죠?”
의원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케인즈주의자입니다.”
기자는 더 이상 질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 이론의 도그마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첨단기술제조업(High-Technology Manufacturing)과 지식집약서비스업의 육성과 인력양성이 향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길이라는 인식은 급진좌파진영의 사고에는 여전히 와 닿지 않는 개념인 듯 합니다.
지난 5년간 여당이었던 민주당이 검찰 개혁, 노동소득분배율 조정등을 차선으로 돌리고 지식교육에 매진하였다면, 한국은 지금 더욱 활성화된 경제를 맞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그릇된 판단일까요?
이러한 정태적 사고와 정파적 이익은 민주당을 법인세 인하가 기업의 연구개발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고려하지 않게 하고, 그저 재벌의 유보 축적으로만 끝날 것이라는 낡은 사고 속에 빠져 있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애써 외면하는 이들을 대체하는 합리적 진보세력은 과연 나타나지 못하는 걸까요?
<참고문헌>
강경덕, “노동가치이론의 근본 전제에 대한 고찰- 자동화와 노동가치이론”
홍병선, “고유가치와 효용가치의 양립가능성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