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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 무엇이 존재를 바꾸나?

-관계의 앙상블

동아리 방에서 2학년 여자선배와 1학년 남자 후배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구조가 바뀌면 세상이 좋아질까? 

“누나, 그게 무슨 뜻인가요?”

“M(맑스)선생 말처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나도 믿는데 정말 그럴까라는 거지?”

후배는 그 명제가 듣기에 참 멋있는 말인 것 같았지만, 선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 말뜻을 넘겨짚고 이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유약한 말씀을 하시나요?”

“솔직히 말해보자. 돌 던진다고 그 짱돌이 어떻게  존재를 깰 수 있단 말이야? 우리는 존재를 바꿀 '그 무엇'이 없다는 거지. 또한 사회적 구조가 변화된다고 세상이 바뀔까?”

“누나 말씀은 구조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일전에 구조결정론에 대한  예를 어떤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부르주아의 경제적 기반을 갖춘 자가 보수적인 의식을 가지게 된다.’면서 그 실례가 늑대소년이었어요.

소설 '정글북'의 모글리 같은 인간 소년이 늑대 무리의 일원으로 길러지면, 그 소년은 인간이 아닌 늑대의 습성과 의식을  지니게 된다고 말이죠.  늑대의 의식은 늑대라는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결국 누나 말씀은 구조결정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무엇이 구조를 바꾸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 힘이 구조를 바꾸나

“그렇지. 이게 사실 핵심이라 할 수 있지. 무엇이 구조를 바꾸지? 짱돌이? 지금 우리가 나누는 사변적인 대화가? 쉽게 생각하면 힘이 구조를 변혁시킨다고 말할 수 있지. 이를 테면 노조가 만들어지고 노동자의 힘이 세지면 노동자세상이 된다고? 노조는 귀족 노동자들의 판이 되고 있는데 무슨 노동자세상. 정규직들이 자기들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거지. 비정규직들의 삶을 돌아보기나 한데? ”

“여전히 사람들은 힘이 존재를 바꾼다는 신화를 믿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힘께 나 쓰는 이들은 지식 권력 총으로 공간과 환경을 바꾸고자 하지. 그리고 공간과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고 하지. ‘규정’이라고 말하지도 않아. 그냥 대놓고  ‘지배’라고 단언하지. 그리고 새로운 공간만이 새로운 소통을 낳는다고 말하지. 

그러면서 파레토최적, 효율최적이라고 주장하지. 파레토최적으로 요소의 분배가 줄어드는 상대는 어떻게 되는데. 효율이라는게 '나는  분배를 많이 받아야 하니 넌 좀 구석에 웅크리고 있어. 그래야 모두에게 좋은거야. '라는 뜻이야. 근데 그건 구성의 오류이지.  나도 개선되고 너도 개선되는 파레토 개선이 공동체에선 당연히 바람직한 분배아닌가?   

문제는 존재를 바꾸는 동력이 시대착오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는 거지. 그들에게는 아래에서 위로 상승하는 참여민주주의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야. 왜냐면 그들이 보기에 국민은 愚民이거든. 여론조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그릇된 판단의 결과이지.  엘리트 선민인 자들이 우민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된다는 목자의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착각하지.  권력이 공간을 바꾼다면 그건 시대착오라고 말하는 이유이지. ”


◆관계의 앙상블

“정말 우울하네요. 그럼 존재를 바꾸는 힘은 진정 우리에겐 없는 건가요? 

“있다고 말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구조라는 외피보다 구조 속의 관계이지. 인간이 늑대의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과 늑대무리들과의 관계 때문이지. 곧 ‘관계의 앙상블’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지.”

“관계의 앙상블요?”

“응,  맑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에서 사회적 존재를 생산관계의 총체라고 불렀지. 결국 사회적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라 말할 수 있지.”

“그렇다면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구조를 바꾸는 것, 공간을 바꾸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바꾸기 위한 것이지. 물론 맑스가 주장하는 관계는 물질적 토대속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를 변화시킨다는 유물론적 입장에서의 관계이지.   

여하튼, 중요한 점은 관계의 본질적인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사람들은 관계의 변화는 상대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지.”

“아! 자기는 안 바뀌면서 상대의 변화만을 바라는 나르시시스트 말씀이죠?  

“맞아. 관계의 앙상블 속에 있는 나를 거울처럼 바라보지 않고 남의 변화, 세상의 변화만을 외치지. 사회적 정의만을 말하고 자신의 정의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거지.” 


◆ 자기로부터의 변혁

그래서 박노해는  '序· 그 여자 앞에 무너져 내리다'에서 이렇게 목 놓아 말했지. 길지만 좀 읽어볼까. 

「‘난 지금까지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노조에도 참여하고, 가진 자들 욕도 하고, 잘못된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고 원망도 많았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다 도둑놈 마음이었어요.  (중략) 제 자신이 먼저 참되고 선하고 정의롭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 평화와 정의를 바랄 수 있겠어요. 도둑 마음이지요. (중략) 왜 네 탓이오 네 탓이오만 외치고 제 탓이오가 없었을까요. (중략)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인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어요. 좋은 세상은 어찌 보면 우리 안에 이미 와 자라고 있는 건데. 지금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착실히 힘 모아나가면 사실 저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데.」 ’(序· 그 여자 앞에 무너져 내리다)

“그럼 존재의 변화는 나의 변화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거네요.”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어. 사회적 관계는 나를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거지. 그 때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맺어지는 거지. 따라서 공간의 변화보다 나의 변화가 급선무라는 거지. 그리고 상대를 어리석다 깔보지 말고 그들의 잠재력과 참여를 존중할 때 소통이 가능해지고 관계가 변화되는 것이지. 소통의 목적은 경청도 아니고 상대의 변화도 아니야. 경청만 하고 상대가 바뀌기만을 바란다면, 그건 오만이고 편견이지. 관계와 소통의 본질은 나의 변화라는 점 잊지 말아야 할 거야.”

“결국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나의 변혁이 새로운 존재를 규정하고, 그것이 다시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할 수 있네요. ”

“맞아. 이제 나도 내려놓고 너도 내려놓을 때, 너와 우리는 참된 관계 속에 놓여있게 되는 거지.”

이후 두 사람은 마침내 관계의 최고봉인 동지적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동아리를 떠나기 전 까지...... 그리고 그도 그곳을 떠났다. 새로운 관계를 찾아서....




<참고문헌>
박정호, “유토피아로서의 마르크스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