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난지원금 지급과 맞물려,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미래 기술실업(technological unemployment)에 대한 우려, 총수요 부족, 프레케리아트(precariat, 안정된 일자리 취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사회계층)를 위한 사회보장책의 필요성 등으로 인해, 적어도 단계적으로 무조건적, 보편적, 정기적, 현금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기본소득의 주요 정체성을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기본소득의 주요 정체성은 탈 노동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며, 저녁 시간에는 비판’을 하는 삶,
이러한 삶이 내뿜는 기운은 곧 자유입니다. 소득을 위해, 매력적이지 않고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노동으로부터 탈출하여 스스로 자유로운 시간을 통제하는 자유 말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왕국’은 ‘각자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삶이 영위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왕국은 안정된 물질적 기반에 의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이고 충분하며 정기적인 현금을 제공함에 따라 건설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본소득의 정체성은 돈을 벌기위해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노동(labor)으로부터 탈주하여 자유 시간을 확보하는 삶에 있습니다.
◆소명으로서의 노동
그런데 탈 노동 지향의 이 왕국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등장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자리매김하는 방법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탈 노동이 아닌, 노동(일,work)에 따른 생산이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성장시키는 길이라는 직업노동의 소명 론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의 소명의식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The one who is unwilling to work shall not eat)’(데살로니가후서 3:10)라는 바울이 제시한 노동의 규칙과 일치합니다.
혹자는 자본가들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논리로 이러한 노동윤리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체제의 유지 또는 이보다 더 나은 체제를 위해선 혁신을 통한 확대재생산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노동을 통한 생산은 사회적 기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소비는 총수요의 극대가 경제의 소득순환을 지탱한다는 주장은 일면적입니다.
일반균형적인 시각에 의하면, 이 이론은 단기 또는 중기(예컨대 코로나19사태의 기간)에는 적용되지만, 장기에는 적합한 논리가 아닙니다.
인적자본의 혁신을 통한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경제체제의 장기 지속성을 담보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은 주류경제학이든 코뮌사회를 지향하는 경제학이든 수용되는 논리입니다. 마르크스조차 생산력이 기존 생산양식을 변경하여 공산주의로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소득을 위한 노동이 단지 먹고 살기위한 도구라는,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노동관으로부터 가치있는 노동윤리로의 전환이 사람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하는 길이 됩니다.
◆공짜점심과 불공정성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소명이라는 원리에 기댄다면, 자유의 왕국을 지탱하는 물질적 기반, 즉 인간다운 삶을 지향한다는 기본소득은 정의에 위배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필요에 따른 분배만을 선호해서입니다. 즉 사람들이 합리적 선택에 근거하여, 아침에 사냥하고, 오후에 그림 그리고, 밤에 토론하는 삶을 즐기면서 헌신하는 노동을 애써 회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기여 없는 공짜점심은 호혜성(reciprocity)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이하 조남경)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은 열심히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착취하게 됩니다.
심지어 반사회적 행위를 반복적으로 행하는 사람에게 조차 이러한 욕구 충족을 위한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일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두에게 보편적이며 동시에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은 정치적 수용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자유시간의 길이 vs 자유시간의 질
또한 노동이 소명이라는 가치는 ‘자유시간의 길이’보다 ‘자유시간의 질’에 대한 관심과 조응합니다.
빠레이스 논리를 따르는 기본소득자들은 사람에게 주어진 총시간에서 노동시간을 극소화하여, 노동의 질을 높이고 자유시간의 길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자유를 보장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노동시간의 감소는 총산출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는데, 노동의 질의 향상과 자유시간의 확대가 감소된 총산출을 끌어올릴 수 있는가라는 점에 의문부호가 던져진다는 점입니다. (곽노완)
만약 총산출의 감소로 인해 자유시간의 질이 점차 떨어진다면, 꼬뮨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경제적으로 열등하게 될 수 있습니다. (곽노완)
결국 ‘각자 능력에 따라, 각자 필요에 따라’라는 맑스의 유토피아는 자체적으로 근본원리로 실현될 수 없거나 실현될 경우 경제적으로 파국을 초래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됩니다. (곽노완)
빠레이스조차 필요에 따른 분배가 성장을 제약함으로써, 노동의 질을 높이는 혁신을 방해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곽노완)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지향하는 노동시간의 극소화 곧 자유 길이의 극대화가 획일적 평등을 보장할지 모르지만, 혁신의 결여로 자유의 질은 담보되지 못합니다. 결국 자유는 저렴한 자유로 전락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노동윤리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인간의 존재를 입증하는 노동의 존재가 생산을 극대화하여 자유의 질을 높일 수 있어서입니다.
물론 적정한 생산과 소득 극대를 자극하며 노동의 질을 고양시키는, 적정한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길이를 발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
탈노동대신 노동윤리를 지향한다면,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요?
이는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중략),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이 전문의 내용은 아마티아 센의 ‘역량의 평등’ 논리와 흡사합니다.
역량은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와 능력(잠재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역량은 개인의 선택을 통해 ‘기능’이라는 성취를 이루도록 합니다.)
예컨대 굶주림(starvation)에 시달리는 사람과 종교적 배경으로 금식(fasting)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기회와 잠재력의 부족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반면, 후자는 선택의 자유가 존재하여 역량을 갖추고 있다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지향해 할 평등은 이러한 역량의 평등입니다.
기존의 평등론은 인간의 다양성(human diversity)을 무시하고 획일적 분배를 통해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목광수)
기본소득에 따른 평등도 개인이 처한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 소득재분배를 이루겠다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각 사람들은 다양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개별적 능력, 사회제도, 사회규범, 자연 환경등들)에 의해 역량의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의 차이가 곧 역량의 차이를, 이어 역량의 차이가 기능의 차이를 초래하여, 최종적인 불평등이 발생합니다.
때문에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평등은 역량의 평등이며, 공동체의 목표는 개인의 역량 강화에 두어져야 합니다.
역량강화 과정의 첫 단계는 선별입니다. 각 개인이나 각 사회를 개별적으로 평가하여 역량의 평등에 이르지 못한 수혜 대상인 개인이나 사회를 개별적으로 선별합니다. (목광수)
이어 이렇게 선별된 개인과 사회에게 국가는 부족한 재화를 직접 분배하거나, 재화를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개별적 요소들의 문제점을 수정합니다.
예컨대 국가는 불리한 가정환경 탓으로 개별적 능력이 계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무상으로 충분히 제공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회진출이 제약되어 있는 여성을 위해 차별적 사회규범과 제도를 폐기 수정합니다.
이처럼 개인의 역량의 축적을 방해하는 개별 요소들을 변경하여 각자의 역량을 강화할 때, 역량의 평등은 실현되고 기능의 차이라는 불평등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량의 평등 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헌법 전문과 유사합니다.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는 역량의 강화와 역량의 평등을 의미하며,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은 역량의 강화에 의한 기능의 향상을 뜻합니다.
이처럼 헌법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헌법 제1조)이 추구하고 달성해야 할 목표는 ‘역량의 평등’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적 경제적 약자집단에게 원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평등의 가치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선별이 수혜자의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도록 신중한 배분방식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종합적으로, 우리 공동체는 피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목표는 국가가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여 역량의 평등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또한 노동윤리를 소명으로 하여 기여와 이에 대한 대가가 교환되는 호혜성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각자 능력에 따라, 각자 필요에 따라’라는 사회를 파국으로 이끌 수 있는 유토피아의 명제를 내려놓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원리에 따라 노동윤리를 고양하는 국가적 노력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미래 기술 실업으로 임노동이 불가능할 경우, 공짜점심의 교환으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socially useful work)이라도 제공되어야, 착취 없는 공동체, 공정과 정의가 숨 쉬는 공동체가 달성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곽노완, “기본소득과 사회연대소득의 경제철학”
조남경, “기본소득 전략의 빈곤 비판: 호혜성, 노동윤리, 그리고 통제와 권리”
목광수, “역량중심 접근법과 인정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