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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연대 ] 상호부조를 이끄는 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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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국민의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함께 이겨내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료 시민을  돕는 행위는 어떤 원리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정의의 원리일까요 ,연대의 원리일까요?



◆상호부조는  정의감의 발로


상호부조가 정의의 발로라는 주장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불운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엔 부의 몫이 같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즉 천부적 능력의 불평등 탓에, 게다가 주어진 재능의 개발과 성숙이 가정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기에, 제약된 사회의 자원은 사람들 사이에 배분을 달리합니다.


또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외부적 사건에 의해 자연적 배분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눈먼 운’(brute luck)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개인은 불운을 통제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의 결과는 보상을 통해 바로잡아져야 합니다.


우호적이지 않은 여건이  열악한 처지를 만들었다면,  국가와 사회 구성원들의 의무는 자연의 수혜를 받지 못한 이들의 처지를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당연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유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회의 성원은 불평등한 운에 빚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불합리한 조건은 부채의식을 낳아, 상호부조의 의무를 이행하는 동력이 됩니다. 



◆ 상호부조는 연대의 산물


상호부조는 연대(solidarity)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연대란  차이의 감각에서  공통의 체험으로의 이행을 말합니다.


유리한 환경에 위치한 사람들의 일부는 고난 속 사람들이 발산하는 고통의 파동을 민감하게 수용합니다. 


연대의 정점은 한 몸 의식입니다. 한 몸이라는 뜻인 共同體(community)의 성원은  그를  ‘우리 중의 한 사람’(one of us)’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조건에 대한 대응이 아닌 형제애(fraternity)로부터 비롯된 자연스러운 감각입니다.


결국 처지의 공감으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들은  비록 자신에게 일부 손해가 발생할 지라도, 그의 복지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태도를 지닙니다.



◆기부는 기부자 자신을 구원



곤경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무관심하지 않는 마음은 정의감로부터 또한 연대의식로부터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료 시민이 타고난 불운과 예상치 못한 자연적 불운으로 인해 존엄성과 자존감을 상실했을 경우, 우리는 부채의식에 의하든 한 몸 의식에 의하든  그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국민의 경제적 고통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상호부조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집단의 고통에만 침윤하는 한국인의 clan의식에 대한 도전으로 읽혀집니다. 


소속 공동체 내의 유대는 강하지만 경계를 넘어선 공동체의 성원들에게는 무관심과 심지어 적의를 뿜어내는 한국인들에게 이번 코로나19는 연대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복지의 전달 방식으로의 논쟁은 연대의식의 부재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편적 복지인가 자산조사에 의한 선별적 복지(잔여주의 복지)인가를 둘러싼 다툼은 일부 여유 있는 성원들과  정책담당자들이 고통 받는 공동체의 성원의 파동을 체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념을 관철시키겠다는 숨은 의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국민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참에 소비 진작이라는 명분하에 모두를 포함한 평등한 사회권을 확립하겠다는 주장은 공허하고 한가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합니다.


[ 복지급여를 하위 70%에게 지급하든 100%에게 지급하든, 이 둘의 총수요는 사실상 같습니다.


상위 30%의 소비는 지원금의 유무와 무관하게 거의 동일합니다. 지원금과 기존의 돈은 모두 한 통장으로 통합되어, 상위 소득자들은 그 한 통장에서 계획된 소비량을 실행합니다. 결국 지원금은 사실상 저축으로 남아 차기 납세의 재원이 됩니다.


게다가 예산재편성으로 인해 정부소비를 줄이고 그 자원으로 개인소비를 늘릴 경우 총수요는, 정부수입으로 인한 누출의 감소가 총수요 증가에 일부 영향을 미칠 뿐, 크게 증가하지 않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아무도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위기 상황에선 ‘전체소득이전에서 빈곤층이 받는 이전소득의 비율(VEE: Vertical Expenditure Efficiency)’이 높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든 이의 기본권에 대한 주장은  결핍의 공포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린 후나 생각해 볼 차후의 과제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종합적으로, 부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의로운 상호부조, 고통 받는 이의 아픔에 공감하여 한 몸 의식로부터 이루어진 상호부조등은 결국 기부자 스스로를 救援하는 또 하나의 모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