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이웃에서 빌린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한다.”
이 같은 심리는 ‘억압의 移讓’이라는 원리로,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적절히 설명하는 논리입니다.
억압의 이양이란 위로부터의 고통이 아래로의 쾌감에 의해 상쇄된다는 균형이론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압박이 가해질 때,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보다 못한 주변을 압박한다는 것입니다.
달리말해 이는 강자로부터의 억압감을 주변의 약자로 이양하여, 강자로부터 당한 피해의 고통을 주변의 약자들을 억압해 얻는 가해의 쾌감으로 보상받고자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억압의 이양은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의 논리가 됩니다.
아베총리가 정신적 지주로 존경해 마지않는 동향(야마구치현, 죠슈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억압이양의 원리에 근거하여 征韓論을 주창하였습니다.
개항이후 열강의 중압감을 끊임없이 피부로 느끼고 있던 쇼인은 일본의 장래를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에서 구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앞에서의 치욕을 뒤쪽의 유쾌함에 의해 보상받고자 한 것입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병합의 논리도 억압의 이양으로 읽혀집니다.
1890년 3월 제1회 제국의회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수상은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主權線뿐만 아니라 利益線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주권선이란 일본의 영토이며, 이익선이란 한반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기 위해, 이익선인 한반도에 일본을 위협하는 세력이 진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열강의 힘에 침탈당하는 일본이 약한 이웃국가를 공격하여 이익을 보상받는 종속적 내셔널리즘이 한일병합의 논리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후 일본은 일본을 위협하는 세력인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후, ‘일본의 안전’을 위해 한국을 병합합니다.
◆가해의 기억을 소거하고자 하는 일본
억압의 이양은 피해와 가해의 양면성을 지닌 회색영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제국주의 일본은 피해자이며 가해자라는 양면성의 성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색영역에 위치한 일본은 승자독식의 사회 진화론적 사고에 심취한 결과, 피해의 기억만을 남기고 가해의 기억을 말살하고자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강자인 승리자는 가해를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 피해자의 고통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핵 피해자인 일본은 원폭피해국 일본이나 일본인전쟁희생자만을 기억할 뿐,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의 일본군성노예피해자나 강제 징용공의 고통스런 기억을 소환하기를 거부합니다.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역사는 민족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게 당연하다.”라고 가치상대주의를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妄言은 자국중심주의적 역사인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가해의 기억을 지우고 그 책임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아베총리도 2005년 전후 70년 담화에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에 대해 가해자의 반성과 책임을 밝히기는커녕, 당시 식민지화가 세계의 대세였다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일러 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세계를 휩쓸었던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민족자결의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그간의 식민지화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당초에는 일본도 보조를 함께 했습니다.”
러일전쟁은 아시아에게 용기를 주기는커녕, 한국인에겐 고통의 서막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후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한일병합의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초에 식민지화에 일본도 보조를 함께 했다는 아베총리의 주장은 일본이 세계의 대세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 잘못은 없다는 점을 강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와 강제징용공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인배상을 거부하는 근거가 됩니다.
◆ 한일, 아름다운 신뢰를 위해
가해의 기억을 소거하는 자국중심의 역사인식에 빠져있는 아베정부가 가치상대주의에서 탈피하여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선, 피해자의 기억에 의한 역사 성찰에 동참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 자신이 가해자라는 측면을 자각하는 것으로, 아시아 식민지화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해의 기억의 소환은 자랑스럽고 찬란한 ‘아름다운 나라’의 회복을 지향하는 아베총리와 신보수주의자들에겐 수치와 굴욕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나라는 인간의 보편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나라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여 인간존중의 가치가 한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차원의 가치로 확대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他者의 기억에 의해 自己를 인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아베 정부는 최근 한국의 신뢰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자국 중심적 역사인식에서 보편적 가치에 근거한 역사인식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힐 때, 한일 양국은 상호존중의 신뢰의 가치를 쌓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한국의 광복절과 일본의 패전일인 8월15일에 즈음하여, 세계의 정의와 평화는 우리 모든 세계인이 추구해야하는 소명임을 가슴깊이 새기며, 일본이 패배의 기억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가해의 기억을 소환 할 때, 한일 양국의 영속적이고 아름다운 신뢰는 담보될 것입니다.